그 에너지가 말하고 있는 것 -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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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에너지가 말하고 있는 것 -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1.07.1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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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사진: 이터널저니 제공

최근 재연을 완료한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작/연출 유병은, 작곡/음악감독 강진명, 제작 이터널저니,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1. 5. 28 ~ 7. 4)는 고전적이고 올드한 뮤지컬이다. 드라마 진행 방식으로도 양식적으로도 그렇다. 작품의 사건은 전국광산연합에 가입하려는 켄터키주 할란카운티 탄광촌의 노조위원장 모리슨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리슨은 노동조합의 활동을 막으려는 이스트오버 광산회사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모리슨의 딸 엘레나를 비롯한 할란카운티의 노동자들은 모리슨을 배신자로 모는 이스트오버의 거짓말에 속아 세력이 와해될 지경이다. 드라마의 변곡점은 ‘말을 못 하는’ 흑인 노예 라일리와 함께 북부로 도망가던 다니엘이 루이빌 역에서 우연히 모리슨의 살해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할란카운티로 ‘들어오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다. 뉴욕(북부)으로 가 자유를 찾으려 했던 다니엘과 라일리는 모리슨의 부탁을 전하기 위해 할란카운티로 오고, 이들은 모리슨의 마지막 부탁을 전하면서도 ‘이방인’으로 배척당하고 배신당하는 과정을 겪으며 할란카운티의 노동자들과 운명을 함께 한다. 이후 모리슨 살해의 배후가 결국 밝혀지지만 라일리는 투쟁 과정에서 다니엘 대신 죽는다. 결국 다니엘은 할란카운티의 광부로 남고 할란카운티 노동조합은 전국광산연합에 가입하였으며, 켄터키주는 1976년에 노예제를 폐지함으로써 라일리는 죽고 나서야 자유인이 된다. 

 

사진: 이터널저니 제공

간단히 드라마를 정리했으나 사실 작품은 세부적으로는 많은 이슈를 담고 있다. 가장 주요한 것으로 흑인 노예제와 탄광촌의 노동운동이 전경화되며, 아이-노동자 문제, 자본주의와 휴머니즘, 이방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 장애인 문제 등이 장면과 인물형을 통해 다양하게 제기된다. 특히 <1976 할란카운티>는 <Harlan County USA>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바바라 코플, 1976년)를 바탕으로 1973~74년에 벌어졌던 브룩사이드 파업이라는 실제 사건을 극화함으로써 리얼리티를 담보한다. 180명의 탄광 노동자들과 그 아내들이 연합하여 듀크 파워사가 소유한 이스트오버 석탄 회사에 대항해 벌였던 노동운동이 뮤지컬의 뼈대가 된 것이다. 

 

사진: 이터널저니 제공

뮤지컬은 여기에 ‘흑인 노예제’와 관련한 인종문제를 더하여 다큐멘터리와 차이를 만들고 극화의 방향을 만든다. 1976년에 비로소 노예제도 철폐를 골자로 수정헌법을 통과시켰던 켄터키주의 역사가 노동운동의 역사와 결합된 것이다. 그런데 공연에서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이 역사적 토대가 사실 애매한 것은, 흑인 노예제도와 인종문제의 재현방식이 1852년의 소설 <엉클 톰스 캐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톰 아저씨가 켄터키주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을까) 물론 공연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리얼리티 자체가 목적일 필요는 없다. 문제는 드라마의 변곡점을 만드는, 즉 극 중 할란카운티 노동운동의 촉매제이자 진실의 키를 쥐고 있는 다니엘과 라일리가 <엉클 톰스 캐빈>의 조지와 톰의 인물형을 공유하며 ‘도망 노예법’에 저촉된 신세로 설정되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들이 1970년대 켄터키주에 들어오는 것은, 소설 속 인물이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불균형한 감각으로 그려진다. 다큐멘터리에 토대를 둔 극 전체의 추진력이 정작 판타지에 놓인 아이러니한 감각이다. 따라서 켄터키주가 실제로 1976년에 노예제를 철폐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엉클 톰스 캐빈>의 시대적 상상력에 묻혀버린다. 뮤지컬의 세계가 낭만화, 도식화되고 인물들이 이상적인 비전에 이끌리는 것은 따라서 필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작품 속 노동자들은 순진하며 상황에 잘 휩쓸리고 여성들은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하거나 후경화·도구화되어 있으며 자본가들은 극단적으로 나쁘다. 보수적인 젠더 감수성과 함께 뮤지컬에서 참 낯익은 풍경이다. 

 

사진: 이터널저니 제공

그런데 이 도식적인 풍경 안에서, 다니엘과 라일리가 할란카운티를 인종문제에 ‘편견이 없는 곳’이라 믿고 이것을 북부 뉴욕행을 잠시 포기하는 이유로 명확히 한다는 점은 무엇보다 도드라진다. 이 믿음은 극 초반부 루이빌 역에서 모리슨이 심어준 것이다. “광부들은 갱도에 들어갈 땐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나올 때는 똑같이 검게 변하지. 그래서 세상을 차별 없이 볼 수 있”다는 모리슨의 이야기에, 백인이지만 ‘영혼은 검은색’인 다니엘이 반응한 것이다. 이 논리는 <1976 할란카운티>가 노동과 인종문제를 다루는 관점을 표명하며 작품이 진행되는 지렛대로 작용한다. 광부-노동자들이 편견 없는 ‘선한’ 존재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매일 노동의 부산물인 석탄분진을 뒤집어써서 모두가 ‘동일하게’ ‘검게’ 변하기 때문이라는 것. 광부-노동자들의 현실 또는 실재와 관련된 세부적 사항을 지우는 이분법적이고 낭만화된 이 논리는 심지어 정체확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할란카운티 사람들에게 다니엘과 라일리는 이방인으로 배척당하지만, 모리슨의 딸 엘레나는 그들이 ‘아버지의 말’을 전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보는 식이다. 이 논리는 작품의 마지막, 흑백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다니엘의 넘버 ‘28. 라일리의 죽음’에서 다시 반복된다. 노예제가 폐지되어 죽은 라일리가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음을 ‘세상 모든 것을 하얗게 감싸는 눈’으로 은유하는 넘버다. 할란카운티 노동자들과 함께 직접 투쟁에 나서고 종국에는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탄광 노동자로 살게 된 다니엘의 성장이 실체를 덮고 지움으로써 같아진다는 모리슨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한 채 멈추어 있다. 단순하고 이상적이며, 보수적인 인식이다.   

 

사진: 이터널저니 제공

그리고 또 한 가지, <1976 할란카운티>는 다니엘의 영혼이 왜 검은색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국 창작뮤지컬의 어떤 원형적 정서를 활용한다. 다니엘에게 흑인 노예 라일리는 죽은 부모를 대신한 절대적인 존재였다는 사연이 플래시백으로 펼쳐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라일리는 부모가 죽어 고아로 자라다 실수로 농장주의 농장을 태워버린 어린 다니엘을 지켜주며 대신 끔찍한 노예의 삶을 살아왔고, 다니엘은 이런 라일리에 대한 부채의식에 시달리며 ‘나약한 자신’을 자책해 왔다. 이 사연은 다니엘이 할란카운티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수용함으로써 노동자로 살아가도록 그를 자극한다. 모리슨의 죽음이 이스트오버의 음모 아래 흑인 라일리의 살해로 왜곡되는 과정에서 다니엘은 나약한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울음을 토해낸다. 다니엘의 넘버 ‘14. 나 때문에’는 진실이 가려진 억울한 상황 앞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상향 진행하는 고음의 클라이막스로 토해내며 절규하는 곡이다. 각성의 계기가 인물의 결여로부터 주어지고 이를 과잉된 정서의 넘버로 표출하는 방식은 창작뮤지컬의 핵심적 정서를 만드는 원형적 토대라 할 만큼 반복되는 것이다.

 

사진: 이터널저니 제공

그런데 공연에는 이상하게도 묵직한 감동이 있다. 주체로서의 노동자-여성은 배제되어 있지만, 뮤지컬이 최대한 많은 인물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노력했기 때문이리라. 때로는 장면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고 템포가 늘어지기도 하지만 공연은 인물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물론이고 가장 어린 앰버까지, 공연은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켜켜이 쌓아 놓는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하는데 바로 배질과 라일리다. 배질은 원래 모리슨과 뜻을 같이 했으나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회사 편에 섰다가 결국 비극적으로 죽는 인물이다. 이런 배질은 공연에서 마치 안타고니스트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연이 끝날 즈음 배질은 언제나 광부였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광부의 권익보장을 위해 ‘자기 방식대로’ 노력했던 인물임이 드러난다. 배질이 극중 유일하게 현실적인 욕구에 따라 움직이며 ‘고민하는’ 인물로서 관객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는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의 지점에서 라일리는 소설 속 톰 아저씨처럼 ‘희생의 숭고함’을 따뜻하고 겸손하게 전달한다. 2019년 초연보다 흑인임을 표시하는 분장의 수위를 낮춘 반면, 가장 절박하고 순수한 차원에서 터져 나오는 ‘몸의 언어’의 밀도를 높인 결과다. 공연은 커튼콜을 마치 후일담처럼 구성하여 미처 공연에서 다 말하지 못한 그들의 ‘그 이후’까지 포괄한다. 따라서 커튼콜의 마지막 순간까지 객석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2021년 동시대의 현장에서 <1976 할란카운티>의 한계는 너무나 명백하지만, 공연이 인물에 갖고 있는 애정만큼 배우들의 에너지 또한 높았던 공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작품의 가치가 더 섬세하게 세공되기를 기원한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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