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와 조이스의 아일랜드 정치 및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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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와 조이스의 아일랜드 정치 및 문화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7.1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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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51강〉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51강〉_ 허현숙 건국대 교수의 「예이츠, 조이스, 아일랜드 정치와 문화」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51강 허현숙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예이츠와 조이스의 아일랜드 정치 및 문화

허현숙 교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에 대해”, 특히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과 관련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각각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미래의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또 “어떤 꿈을 지녔는지”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이는 12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아 그 언어마저 상실한 나라, 아일랜드가 19세기 내내 독립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홍을 겪는 과정을 실제로 체험한 이들 두 작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문학과 정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시인 예이츠에게 “아일랜드는 그의 내면을 사로잡은 문제였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는 그의 영원한 뮤즈였다”고 할 수 있으며, “아일랜드를 떠나 살았던 조이스에게도 아일랜드는 그의 내적 현실이자 작품의 출발점이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간단히 말하여 두 작가에게는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던 ‘아일랜드’라는 존재가 “평생 삶의 현실적 문제”이자 글을 쓰도록 만든 “영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5일, 허현숙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5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글의 목적 

12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일랜드는 1922년 아일랜드 남쪽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이 되었고, 북부는 영국 지배의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로 분리되어 영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 19세기 내내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에 대해 격렬한 논쟁과 분열이 있었고, 결국 1910년대 후반에는 내란에 가까운 싸움이 일어나 가까스로 남부의 독립으로 귀결되었다. 그 싸움의 주체는 물론 아일랜드 사람이었으나 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그들 스스로 아일랜드인이 누구냐는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들 각각이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여 서로 충돌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면서 아일랜드 사람이 누구이며 아일랜드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서로 갈등을 겪으면서 혼돈에 빠지게 된 것이 바로 19세기에 들어서 아일랜드가 직면한 문제였다. 

이러한 시대에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와 조이스(James Joyce, 1846-1941)가 태어나 활동했다. 이 두 사람 모두 더블린에서 성장하면서 당시 아일랜드가 직면했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문제를 각각의 성장 과정에서 실제 체험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약 1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비슷한 정치 지형을 지나지만 다른 관점으로 아일랜드를 이해했고, 그런 만큼 아일랜드의 문제를 작품에서 다루는 방식 역시 서로 달랐다. 

2.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상황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후손인 예이츠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아일랜드의 근대 국가를 이루기 위한 움직임’의 세 번째 단계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예이츠의 이러한 언급은 그의 시 작품이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점, 특히 아일랜드 독립을 향한 운동 안에서 쓰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그의 젊은 시절에 쓴 작품들이 아무리 현실과 무관한 낭만주의적 작품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당대 아일랜드의 정치 및 문화적 소용돌이와 같은 변화와 관계없이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이츠가 말한 세 번째 단계는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으로의 도약으로 이 시기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종파나 민족이 아닌 다른 구조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는 1840년대 전후, 토머스 데이비스(Thomas Davis)가 주도한 ‘청년아일랜드당(Young Ireland)’(1840) 운동을 통해 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목표가 드러났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고유 문화, 켈트족의 문화와 켈트어가 아일랜드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토머스 데이비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사무엘 퍼거슨(Samuel Ferguson)은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데이비스와 더불어 아일랜드 독립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 

아일랜드의 언어와 역사 및 문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후 스탠디시 오그래디(Standish O’Grady)와 존 오리어리(John O’Leary) 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예이츠와 같은 시인의 심성에 닿게 된다. 

3.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 예이츠와 문예부흥 운동 

주로 런던과 더블린을 오가며 성장한 예이츠는 영국의 전통적인 문학 형식, 특히 서정시의 전통적인 운율이나 형식적 요소들에 익숙했고 동시에 아일랜드인 특유의 환상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을 수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모국어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자치(Home Rule)’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들 사이에서 자치가 가장 큰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 역할을 찰스 파넬(Charles Stuart Parnell)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1891년 파넬이 죽으면서 아일랜드의 정치적 독립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정치 지도자가 없는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파넬의 죽음 이후 예이츠는 현실 정치에서부터 ‘상상의 민족주의(imaginative nationalism)’, 옛이야기, 그리고 서정시와 연극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 나아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혼이나 요정의 세계와 같은 초자연적인 비이성의 영역에 익숙했고, 합리적 판단을 근거로 삼는 체계적 지식이나 사상보다는 고대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 등 아일랜드인 고유의 신비 세계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의 종교적인 통합, 나아가 사회적 계층의 통합을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를 회복함으로써 이뤄내는 것에 흥미를 지녔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이츠는 파넬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상상의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추구했다. 이후 그가 설립한 문학 단체들이 이를 증명한다. 1891년 ‘아일랜드 문인 협회(Irish Literary Society)’, 1892년 ‘아일랜드 민족문학 협회(The National Literary Society)’, 1899년 ‘아일랜드 문예 극단(The Irish Literary Theatre)’ 등이 그 단체들인데, 이 단체들을 중심으로 예이츠는 앞으로의 아일랜드 독립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예이츠가 구성하고 참여한 이들 단체는 당시 아일랜드의 문예부흥 운동, 즉 아일랜드의 문화 민족주의의 주요한 주장들과 특징들을 구현한 중심 단체들이다. 이 단체들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시했다는 의미에서 당시 아일랜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이츠를 비롯한 당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 주창자들은 무엇보다도 아일랜드의 영웅 이야기를 당대 아일랜드 사람들이 친숙할 수 있도록 다시 쓰는 것에 집중했다. 예이츠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아일랜드는 이야기가 풍부하고 상상력이 넘치는 곳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특히 예이츠는 이러한 옛 영웅 이야기를 복원하고 재창조하여 아일랜드가 신성한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래서 그리스나 로마, 또는 유대 문화에 마음을 주는 것보다 더 먼저 아일랜드에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초자연적 세계를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예이츠의 경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 큰 관심을 지니고 성장하면서 아일랜드의 민속 신앙, 접신술, 강신술 등을 배우고 그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에서 비롯된 이야기에서 소재를 찾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이츠의 문예부흥 운동은 아일랜드 전통의 회복에 목표를 두고, 켈트의 여명 또는 켈트의 황혼으로 불리는 스타일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자연적 존재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예이츠는 유미적이면서 상징적인 시 작품을 통해 이러한 특징을 형상화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벌인 연극 운동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가 그레고리 부인과 함께 창설한 ‘애비 극장(The Abbey Theatre)’에 올린 그의 작품들 『캐슬린 백작 부인(The Countess Cathleen)』, 『캐슬린 니 훌리한(Cathleen ni Houlihan)』 등에서 알 수 있다. 

2) 예이츠의 극 운동 

19세기 말 아일랜드 문화를 부흥하려는 수단으로 시와 전설 및 신화 이야기를 연결하여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이츠는 극장의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통해 아일랜드 민족의 특징과 그 이미지를 제시할 필요를 느꼈다. 1899년 레이디 그레고리 및 에드워드 마틴(Edward Martin)과 함께 예이츠는 ‘아일랜드 문예 극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극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아일랜드가 그동안 표현되어온 것처럼 저속한 익살과 얄팍한 감상의 고향이 아니라 고대 이상주의의 고향임을 보여줄”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캐슬린 백작 부인』을 쓰게 된다. 아일랜드의 굶어 죽는 농민들을 구제하려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백작 부인을 그린 이 작품으로 예이츠는 일약 대중적 관심을 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 번 째 작품인 『캐슬린 니 훌리한』에서는 아일랜드 민족의 자각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을 묘사하여,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대한 추구를 극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실제 당시 그의 여인이었던 모드 곤(Maud Gonne)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워 애비 극장에서 공연한 이 연극은 큰 인기를 얻었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연극으로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예이츠는 파넬의 죽음(1891년)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는 당대 정치적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문학을 선전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신교도와 가톨릭, 지주와 농민, 합방주의자와 분리주의자 등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가는 아일랜드 상황에서 예이츠는 문학과 극 공연을 통해 아일랜드의 문화를 일깨우는 것이 아일랜드인의 통일된 의식을 일깨우고 결국 독립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문학과 극이 민족주의를 선전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문학은 문학의 원칙과 이상을 지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이념에 예속되는 문학이 아니라 국민적 정서에서 나오지만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인 문학으로 존재해야 아일랜드의 문학이 아일랜드인의 것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3) 예이츠의 문예부흥 운동의 한계 

아일랜드 고유의 민족혼, 아일랜드다움, 아일랜드성(Irishness)을 작품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영국과 구별되는 문화를 아일랜드 대중에게 고취하는 것, 이를 통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예이츠의 믿음은 정치적 독립을 추구한 다른 성향의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에게 문학 작품은 민족주의와 별도로 그 자체의 법칙과 원리를 따르는 것이어야 했고,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 켈트 족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갈등의 배후에는 이미 아일랜드의 상황 자체가 가톨릭 신자와 신교도, 농민과 지주, 합병주의자와 분리주의자 등 서로 다른 정치 지향으로 나뉘고 분열되어 있었던 점이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이츠가 아무리 자신의 개인적 능력으로 이들을 통합하고 서로 다른 이익 추구의 공통점을 찾으려 애쓴다 해도 그것은 한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4.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과 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예이츠보다 17년 늦게 태어났다. 그래서 그가 접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은 예이츠의 그것과 얼마간 거리가 있으나, 조이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배경으로 삼거나 암시하는 아일랜드의 상황은 예이츠가 참여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의 시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더블린에서 대학(University College Dublin)을 졸업한 후 더블린을 떠나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스테, 스위스의 취리히, 프랑스 파리 등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아일랜드의 정치와 문화로부터 떨어져 지냈으면서도 조이스가 작품에서 묘사하는 것들은 대부분 아일랜드 사람들과 그들의 내면이었고 그 속에 작용하는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의 틀을 늘 암시한다. 

1) 파넬과 조이스 

파넬은 19세기 말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신교도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토지 연맹(Land League)’을 이끌면서 정치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당시 영국의 글래드스턴 정부가 토지법을 통과시키자 아일랜드의 자치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아일랜드민족연합당(The Irish National League)’을 출범, 명실상부한 아일랜드의 독자적인 정당으로 성장시켰다. 이후 그가 지지한 자치는 영국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아일랜드의 독립을 향한 좋은 방법으로 환영받았다. 그는 신교도 가문 출신의 지주였으나 그의 정당 ‘아일랜드민족연합당’은 반지주적 성격이 강했고 가톨릭 농민층에 주된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889년 그가 동료 오셰이(William O’Shea)의 부인 캐서린 오셰이와 불륜 관계를 맺고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는 것이 알려져 재판까지 받게 되면서 그의 ‘아일랜드민족연합당’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그가 1891년 캐서린과 공식 결혼한 얼마 후 갑자기 죽으면서 아일랜드의 정치계는 혼돈에 빠졌다. 파넬이 죽은 후 아일랜드에서는 자치를 통한 독립 추구를 이제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있는지 등의 논란이 가속화되었고 아일랜드 내부의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의 「담쟁이 날의 위원회실(Ivy Day in the Committee Room)」이라는 작품에서 조이스는 파넬이 죽은 후 아일랜드의 독립을 향한 정치는 그저 구호에 불과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한다. 조이스에게 파넬은 영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헌신한 아일랜드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였다. 이를 그는 1914년에 발표한 「파넬의 그림자(The Shade of Parnell)」라는 에세이에서는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조이스는 그의 몰락을 아일랜드인들의 배신 탓으로 돌리며 아일랜드인들을 비난하고, 파넬에 대한 지지를 계속 이어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16년에 발표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첫 부분에서도 이어간다. 

조이스는 이렇게 파넬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당대 아일랜드의 정치가 과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통일된 관점을 지녔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드러낸다. 

2) 문예부흥 운동과 조이스 

조이스의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은 자신이 속한 아일랜드의 종교, 국가, 가족 모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표시하고 결국 그 모든 것을 버린다. 이는 조이스 자신의 초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이츠가 더블린에 거주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향해 여러 시도를 하는 동안 조이스는 그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아일랜드 정치 현실과 무관한 작품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를 아일랜드의 당대 상황과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은 마치 허공에 지은 집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일랜드를 떠났음에도 그가 쓴 작품은 모두 아일랜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아일랜드는 그 자신의 출발 지점이자 그가 머무는 현실의 공간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조이스가 묘사한 아일랜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다. 조이스가 바라보는 아일랜드인의 모습은 무식하고, 세련되게 사고하지 못하는, 그럼에도 민족의식은 강한 족속이며,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서도 영국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바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이스가 취한 아일랜드에서 문예부흥 운동에 대한 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조이스는 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게일어를 회복해야 한다는 게일 연맹의 주장에 대해 여러 논의들이 있었을 때 그 주장에 의문을 표한 바 있다. 조이스는 아일랜드가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진 일종의 ‘커다란 옷감’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순수하게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아일랜드야말로 다양성의 섬이고 그것을 부정하면서 아일랜드성(Irishness)을 논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게일어 부활에 대한 조이스의 관점은 『더블린 사람들』의 「죽은 사람들(The Dead)」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 단편에서 조이스는 게일어를 아일랜드의 모국어로 활성화하려는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한다. 하지만 조이스가 게일어의 부흥을 반대하면서 영어를 자신의 언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조이스에게 게일어는 이미 과거의 언어이고 현재 모국어는 영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서 사용하는 영어가 런던의 영어와 같은 언어이지는 않다는 인식에 닿으면서 조이스의 아일랜드어에 대한 태도는 복잡해진다. 그는 앵글로아이리시어 즉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영어를 아일랜드의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라고 보았다. 

조이스는 1922년 출간한 『율리시즈(Ulysses)』에서도 문예부흥 운동의 한계를 암시한 바 있다. 1904년 6월 16일 주인공 블룸(Leopold Bloom)과 스티븐(Stephen Dedalus)의 하루 동안의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은 1914년부터 1921년 사이에 발표한 것으로서 배경인 1904년의 더블린 뿐 만 아니라 19세기 전반기 아일랜드 상황에 대한 조이스의 관점을 반영한다. 이 작품에 드리운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묘사와 암시가 바로 이를 드러낸다. 특히 「키클롭스」에서 중심인물인 ‘시민’은 한쪽 눈만 있는 키클롭스를 모델로 한 인물인데, 한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는 점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의 관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더욱 문제 되는 것은 자신의 관점을 폭력적으로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가 주장하는 아일랜드 역사의 질곡과 영국에 대한 반감은 당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이스는 그의 타협적이지 않은 자세와 블룸에게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태도에서 독선적이면서도 이분법적인 한계를 암시한다. 이는 곧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조이스 자신의 평가이기도 하다. 그는 예이츠 등이 이상적으로 보았던 아일랜드의 영웅을 가져와 그들의 허리께부터 바다 돌멩이들이 매달려 있다고 묘사한다. 그 영웅들은 공자, 셰익스피어, 콜럼버스 등이다. 즉 아일랜드와 상관없는 영웅들을 자신의 영웅이라고 우기는 꼴임을 암시하여 민족주의자들이 부활시킨 아일랜드 영웅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고 풍자하는 것이다. 

5. 아일랜드: 영원한 문제(matter)이자 뮤즈(Muse) 

예이츠는 아일랜드 농민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18세기의 귀족 사회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그는 1910년대 초반에 이미 당대 아일랜드 대중이 저급하고도 상업적인 영혼을 지닌 집단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의 눈에 당대 아일랜드 대중은 시냇물 속에 박혀 있는 바위와 같은 존재들이어서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가야 할 아일랜드를 방해하는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그로서는 ‘낭만적 아일랜드는 죽어 사라졌다’는 한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이츠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의 대중을 혐오하는 것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16년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를 겪으면서 대중의 힘을 새로이 인식하고 그들의 순수한 희생의 의미를 되짚는다. 물론 부활절 봉기로 인해 그가 이제까지 추구했던 아일랜드의 통합과 문화적 역량의 강화를 향한 시도들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믿지 않았던 중산층 사람들이 ‘끔찍한 아름다움’을 잉태했다고 받아들인다. 즉 그들의 피의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아일랜드는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음을 예이츠는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부활절 봉기의 결과로 탄생한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상원 의원직 제안을 받아들여 신생 국가에 자신의 이상적 이념을 뿌리내리려 노력한 예이츠의 활동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신생 국가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종교, 성,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가 되기를 염원하여, 가톨릭의 가르침이 더 느슨하고 성적 억압에서 자유로운 사회, 사상의 힘보다는 상상력의 힘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했다. 예이츠가 바라는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세련된 문화적 취향과 전통에 대한 존중을 통해 누구나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할 수 있는 사회였다. 그래서 상원으로서 재임하는 동안 예이츠는 자신의 이상적 사회를 향한 교육 정책이 실현되도록 여러 교육 기관을 방문하여 아일랜드의 교육이 이전과 달라지도록 독려하고 격려했다.

예이츠에게 아일랜드의 상황은 그의 노년에도 여전히 난공불락 소용돌이의 와중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일랜드의 분열은 여전했고 그가 젊은 시절부터 노력했던 아일랜드의 문화 독립은 요원했기 때문이다. 영어로 쓴 그의 작품은 영국 문학의 한 부분으로 통합되어 그는 아일랜드 시인이지만 동시에 영국 시인이었으며 독립한 국가의 시민이지만 여전히 영국 문화권에 속한 국가에 사는 시민이기도 했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즐겨 썼던 통합(unity)이라는 말은 국가가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그의 어휘였다. 이는 처음에는 존재의 통합, 즉 서로 다른 욕망이나 기질을 마치 음과 양처럼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완전한 존재로 되게 하는 요소로 긍정하는 말이었으나, 아일랜드 문제와 관련지으면서 아일랜드와 영국, 아일랜드 안에서의 켈트 족과 영국계아일랜드와 같은 서로 다른 민족과 서로 다른 종교 및 서로 다른 지향 등을 아일랜드라는 통일된 단위로 통합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초기 작품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였고 그의 개인적 삶을 지탱시킨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아일랜드 문제를 빼고 그의 작품을 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일랜드는 그의 내면을 사로잡은 문제였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는 그의 영원한 뮤즈였다. 

조이스 역시 20세기에 발표한 작품에서 아일랜드를 계속 다루고 있다. 그가 1922년 발표한 『율리시즈』에는 30대의 블룸과 20대의 스티븐 등의 인물들을 통해 아일랜드의 식민지 상황 및 그 안에서 제기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암시한다. 그들의 일상은 우연하고도 순간적인 생각과 만남으로 이어지지만, 전통적인 종교의 힘에서 받는 억압적 내면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겪는 일탈에서 비롯한 복잡한 사색의 일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들의 일상에 대한 묘사를 통해 조이스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 하나는 아일랜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의 상황에 대한 질문이다. 우선 아일랜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블룸과 스티븐을 통해 제기된다. 블룸은 유태인으로서 민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같은 장소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답하면서, 자신은 켈트인이 아니지만 아일랜드에 사는 아일랜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성장하고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이 아일랜드 민족을 규정하는 가장 우선적인 요건인 것이다. 이러한 블룸의 주장은 예이츠가 이상화했던 아일랜드의 농부,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의 ‘가톨릭 신자이면서 게일 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아일랜드 민족의 본질적 존재라 여긴 관점과는 다르다. 

스티븐 역시 자신이 의대생이지만 의대생 집단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믿었던 종교에도 그는 더 이상 기대지 않음으로써 더블린의 주류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일랜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인가. 조이스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규정되기 위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현재 아일랜드에 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이 아일랜드의 전통적이고도 주류를 이루는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조이스가 이 작품에서 암시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의식의 흐름’으로 쓰여져 있다고 평가받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은 전후 상황의 맥락과 관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내면은 더블린이 처한 식민지 상황과 그곳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체제 및 가톨릭교회, 민족주의적 주장에서 비롯된 병리 현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일랜드 중산층 출신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블룸과 스티븐이 접하는 문화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문화이며, 저속한 문화 모방과 상투적인 문화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조이스는 민족주의의 주장이 결국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이라기보다는 잘못된 흉내에 불과함을, 나아가 저항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내면이 불안과 억압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함을 보여준다. 

아일랜드를 떠나 살았던 조이스에게도 아일랜드는 그의 내적 현실이자 작품의 출발점이었다. 작품의 초점이 항상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조이스에게 아일랜드는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실제 떠난 곳임에도, 아일랜드의 상황과 정치 문화적 변화는 그의 작품의 현실 자체였다. 그 자신은 아일랜드의 억압적인 분위기로부터 거리를 두었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아일랜드의 소용돌이치는 정치적 풍경과 그 속에서 휘둘리며 살아가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조이스에게 아일랜드는 아무리 멀리 떠나 있다 해도 그의 의식에 살아있는 힘이자 기억이며 현실이었다. 아일랜드가 있어서 조이스는 작가로 존재할 수 있었다. 

예이츠와 조이스에게 아일랜드는 개인적 삶의 현실이면서 뮤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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