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과거(科擧)와 시권(試券)으로 조선시대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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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과거(科擧)와 시권(試券)으로 조선시대를 읽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7.05 0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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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 스케치]

■ 조선시대 선비의 과거와 시권 | 김동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364쪽 | 2021년 05월 25일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조선시대 과거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정리한 학술서 『조선시대 선비의 과거와 시권』을 펴냈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작성된 실제 시권(답안지)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과거제도를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과거제도의 전반적인 실체뿐 아니라, 과문(답안으로 쓰는 글)의 형식과 내용은 어떠했는지, 시험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선비들이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 등을 두루 조명했다.

 

▶ 조선을 이해하는 핵심어 ‘과거(科擧)’

조선시대는 양반이 지배층을 이룬 신분제 사회였는데, ‘양반 신분제’는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와 결합하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양반은 곧 문반과 무반의 관인이다. 문반·무반의 관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문과 또는 무과라는 과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문과와 무과 중에서도 문과가 중시되었으니, 이는 유학을 기반으로 한 숭문주의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에게 인생 최대의 목표는 관리로 임용되는 문과의 급제였다. 그들에게는 관인이 되는 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과의 급제가 아니면 차선책으로 생원시·진사시에라도 합격하여야만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양반의 신분은 과거의 합격과 관직의 획득으로 유지되는 것이므로, 과거제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일이다. 이 책은 과거제도의 개요와 문란상 등의 전반적인 실체를 살펴보는 동시에 과거 공부의 내용, 시권(試券)의 형태와 작성, 각종 과문의 형식 등을 시권 실물, 일기·일지 자료, 회화 작품, 가사 작품, 문집 등을 기초로 실증적으로 고찰하였다.

▶ 형식과 절차의 결정체, 시권(試券)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아무리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우수한 내용을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규정된 시권(試券)에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수십 년의 공부도 허사가 되고 만다. 예컨대 비봉에 성명을 적는 형식을 어기기만 해도 낙제를 당한다. 따라서 생진시 또는 문과의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형식에 맞게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렇게 적어낸 답안지가 바로 시권이다. 이 책은 생진시·문과의 시권은 외견상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하며 어떤 형식으로 작성되어야 격식에 들어맞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시권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그 특성, 분류, 명명 방법 등을 고문서를 통해 설명하였다. 또한 시권의 형태와 시험 단계에 따른 작성 과정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특히 과거시험에서 사용되는 15종의 과문 문체의 형식을 살펴보고, 실제로 몇몇 작품을 번역 해설하여 제시함으로써 과문의 체제를 실질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평생도平生圖> 중 <소과응시(小科應試)> 부분. 필자 미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 버린 과거제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 조선의 과거제도는 점차 그 폐단과 부정이 심해져갔다. 일부 집권층이 제도를 자의적으로 운용하면서 과거의 남설, 과거시험을 이용한 식당(植黨) 행위, 은사과와 같은 국왕의 자의적인 시취, 당파 간의 합격 인원수 담합, 유생들의 풍기 저하 등이 벌어졌다. 또한 시험에서도 부정행위가 빈번하여, 시제의 사전 누설, 각종 관절(關節), 혁제(赫蹄), 협서(挾書), 수종자의 대솔(帶率), 대작·차작, 대서, 동접 간의 공동제술 등이 일어났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실상 묵인된 관행처럼 여겨진 이러한 각종 폐단과 부정이 실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기록 속에 남아있는지 살폈다.

조선시대 용어 중 '동접'(同接)이라는 단어는 같은 곳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을 뜻한다. 저자에 의하면 "동접은 대개 과거 시험을 앞두고 서원이나 산사 등 일정한 장소에 들어가 함께 숙식하며 집단적·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저자는 동접 공부 방법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엄격한 규칙에 따라 학습 과정 완수하기, 수시로 묻고 답하며 학문과 덕을 닦기, 자체적으로 모의시험을 실행해 답안을 쓰고 평가하기, 향교·서원·지방관이 주관하는 백일장 등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 등 네 가지를 소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접이 공부만 같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 시험장인 과장(科場)에서 함께 답안지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과장에서 과문(科文)을 지을 때도 동접은 함께 의논했고, 한 사람이 좋은 문구를 지으면 서로 돌려가면서 베끼는 식으로 답안지를 써냈다"며 "응시자들은 동접 간에 글을 대신 지어주는 일을 범법 행위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16세기에 유생들이 모여 공부한 향교나 성균관 등에서 이러한 풍습이 생겼을 것"이라며 조선에 과거 시험을 치르는 전용 장소가 없었고, 오륜(五倫) 중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있어 친구의 곤경을 자연스럽게 도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조선 후기로 오면서 과거 응시자가 늘어나 과장은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가 됐고, 입문관과 군졸은 응시자가 하인을 대동하거나 친구끼리 모여 이야기를 해도 제지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과장 풍경은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에 잘 나타나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풍속화인데,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과거 시험장을 다룬 것으로 알려졌다.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다. 일산日傘(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세우는 우산보다 큰 양산)이 마당을 뒤덮었고, 일산마다 아래에 5~7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뭔가를 작당하고 있다. 그 사이 어떤 이는 행담行擔[책가방]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다.

단원 김홍호의 풍속화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조선후기 과거제도 폐해를 풍자했으며 단원이 30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시험장 안에는 거대한 양산이 그득하고 그 아래에 5~7명의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모습은 부정행위를 위해 팀을 짜고 있는 모습이다.

거벽이 문장을 만들고 사수가 글을 써주는 방식으로 부정행위가 이뤄지는데 정작 시험을 보는 수험생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당시 실력보다 돈과 인맥으로 시험을 치르는 폐해의 현장을 풍자했다.

그림 윗부분에 있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화제畵題의 글이 흥미롭다.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 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공원춘효만의전 貢院春曉萬蟻戰·····" 표암의 화제 때문에 이 그림에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란 제목이 붙었다. 공원貢源은 과거시험장이고, 춘효春曉는 봄날 새벽이다.

그러니까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을 그린 그림'이라는 소리인데, 만 마리의 개미[만의萬蟻]가 싸움을 벌인다고 풍자했다. 이 무슨 말인가? 만 마리의 개미가 사움을 벌이는 이 난장판 같은 단원 그림이 과거시험장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둘 다 맞는 얘기다.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을 바로 난장판이라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 것은 공동 제술을 금지한 법률 조문보다는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과 향촌사회의 실천 덕목이었다"며 "그들에게는 신의와 의리, 인정이 법보다 우선했다"고 강조한다.

이어 "동접 사이에는 스스로 실력의 순위를 이미 잘 알고 있어서 합격자를 예상할 수 있었고, 누가 합격하든 그것은 하늘의 뜻이고 운명의 소치일 뿐이었다"며 "집권 세력은 시험 문제를 은밀히 유출하거나 청탁해 그들의 자제나 이해 관계인의 합격은 이미 확보했기에 일반 유학생이 아무리 접(接)을 이루고 협력해 글을 써도 눈감아 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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