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에 대한 이해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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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에 대한 이해와 오해
  • 정병기 영남대·정치학
  • 승인 2021.07.0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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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포퓰리즘』 (정병기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110쪽, 2021.05)

 

포퓰리즘에 대한 이해와 오해

포퓰리즘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비유는 ‘민주주의의 그림자’(Canovan)와 ‘신데렐라의 구두’(Mény and Surel)다. 전자는 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로 인해 나타나는 위기의 징후라는 의미이며, 후자는 매우 다양한 양태들로 인해 속성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랜 연구를 통해 그 그림자와 구두의 실체와 주인이 일부 밝혀졌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은 여전히 백가쟁명식 논쟁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오해들이 남아 있다. 포퓰러리즘과의 혼동, 구포퓰리즘과 포스트포퓰리즘에 대한 몰이해, 반(反)민주주의적이라는 편견 등이 그것이다. 졸저 포퓰리즘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고 포퓰리즘 현상을 민주주의 발전 전망과 관련해 논의했다. 

포퓰리즘에 대한 오해와 새로운 개념

첫째,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개념은 인민주의나 민중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중추수주의 혹은 대중인기영합주의를 말하는 포퓰러리즘(popularism)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포퓰러리즘은 포퓰리즘의 부정적 측면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포퓰리즘은 협의로는 포퓰러리즘과 반대되는 긍정적 측면을 의미하며, 광의로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지칭한다.

포퓰리즘은 19세기 말 러시아 브나로드 운동과 미국 인민당 운동에 기원을 둔다. 차르 체제의 억압과 기성 정당 체제에 대항해 인민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양차 대전 사이에 나타난 남아메리카 민중주의와 서유럽의 나치즘 및 파시즘으로 인해 대중추수주의라는 포퓰러리즘(popularism)으로 잘못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주로 정치 무대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포퓰러리즘과 동일시되는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둘째, 포퓰리즘의 역사적 변화를 제대로 추적하지 못해 양차 대전 사이에 생겨난 구포퓰리즘이 올바로 파악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19세기의 포퓰리즘을 고전 포퓰리즘(classical populism)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흥한 포퓰리즘을 고전 포퓰리즘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신포퓰리즘(neo-populism)으로 규정함으로써 구포퓰리즘(paleo-populism)에 대한 개념적 인식이 없었다. 그에 따라 전간기(戰間期)에 발생한 서유럽과 남아메리카의 포퓰리즘이 예외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19세기 포퓰리즘이 고전 포퓰리즘이라면, 전간기 포퓰리즘은 그와 성격이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신포퓰리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곧, 전간기 이후의 포퓰리즘을 현대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전간기에 발생한 최초의 현대 포퓰리즘을 구포퓰리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2000년대 이후 발흥한 새로운 포퓰리즘(이탈리아 오성운동, 스페인 포데모스 등)에 대해 올바로 천착하지 못했다, 구포퓰리즘이 인민에 대한 집단주의적 사고와 인민에 의한 직접 정치를 추구했다면, 신포퓰리즘은 집단주의 사고를 유지하되 대의 정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그런데 최근의 새로운 포퓰리즘은 집단주의 사고까지 버리고 개인주의를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곧, 포퓰리즘의 전통적 성격을 대부분 수정하거나 폐기함으로써 일정하게는 포퓰리즘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포퓰리즘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절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포스트포퓰리즘(post-populism)’으로 규정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개념적 혼란을 바로잡으면서 네 가지 역사적 유형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따라서 졸저 포퓰리즘은 뮈데와 칼트바서(Mudde & Kaltwasser)의 최소 개념을 수정해 포퓰리즘을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라는 사회관과, 가능한 한 인민의 직접 정치를 추구한다는 정치관을 가진 약한 이데올로기’로 정의했다.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와 포퓰리즘

광의로 파악할 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자체의 그림자가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의 그림자다. 대의제는 올바로 작동할 때조차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민주주의 방식으로서 본질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가능한 한 인민에 의한 직접 정치를 추구’하는 포퓰리즘은 바로 이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치달을 때 포퓰러리즘이 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때 협의의 포퓰리즘이 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대중의 의식과 요구에 있다. 포퓰리즘이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대의 민주주의 한계의 징후일 수도 있고, 더 발전된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포퓰리즘 성향의 대중이 41.2%에 달한다. 촛불 항쟁에서 보았듯이 대중의 민주주의 의식과 요구가 심화하는 한편, 포퓰리즘적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커져온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포퓰리즘 발흥의 정치적 토대는 약한데, 그것은 분단이라는 요인 외에 정당 정치의 특수성과 지역주의 등 고유한 균열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엘리트 대의 정치의 한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다른 제약 조건들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엘리트 대의 정치의 한계가 지속된다면 포퓰리즘이 강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포퓰러리즘은 극복하되 협의의 포퓰리즘이 갖는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는 올바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경구는 현재 포퓰리즘에 대한 인식에 새롭게 도입되어야 할 또 다른 오랜 비유다.


정병기 영남대·정치학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유럽정치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강의·연구교수 및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과 유럽정치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표준정책론』(공저), 『전환기의 한국 사회』(공저), 『정당 체제와 선거 연합: 유럽과 한국』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시인과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시간 환상통』, 『오독으로 되는 시』 등의 시집을 상재하고 영화 분석서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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