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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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7.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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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50강〉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50강〉_ 강우성 서울대 교수의 「너새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50강 강우성 교수(서울대 영어영문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너새니얼 호손과 허먼 멜빌

강우성 교수는 미국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라고 불리는, 미국 문학사의 일대 사건 “1850년대 초반 국민문학의 폭발적 발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를 묻는다. 그 질문은 다시 말하여 “미국과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수행하는 ‘미국 르네상스’의 폭발적 문학 성취를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이들을 ‘국민문학’의 성취로 볼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은데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호손(Nathaniel Hawthorne)과 멜빌(Herman Melville)의 작업”, 특히 두 작가의 대표작 『주홍글자』와 『모비-딕』을 통해 들여다본다. 요약하여 답하며, 호손과 멜빌은 “미국 르네상스 국민문학의 국면에서 미국 사회의 지배 문화와 백인 의식을 비판하고 새로운 토착 문명의 조건들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을 유럽 문화의 계승, 인종적 유대의 회복, 대중문화의 활력”에서 찾는 데서 공통점을 보인다. 한편 호손이 “획일적 집단성의 역사적 기원을 미국 사회의 모태가 된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끔찍한 공동체에서 찾아 비판”을 가한 반면, 멜빌은 “당대 자본주의의 총아이던 포경 산업과 상업 자본의 현장에서 효율을 앞세워 대중을 선동하는 광기 어린 지도자”와 “인종적 무지를 통해 체제를 용인하고 반사회적 존재를 타자화하는 미국 자유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하는 차이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5월 29일, 강우성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5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유럽 백인 문명의 확장 

19세기 미국 문학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는 ‘미국성(Americanness)’이 아닐까 싶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봉건제 없이 출발했고, 미국의 독립전쟁 역시 부르주아 혁명과는 다른 성격을 띠었으며, 종교적 신념인 청교도주의가 근대 국가로의 이행에 중요한 이념으로 기능했기에, 미국 문학은 애초부터 유럽의 리얼리즘과 거리가 있는 탈사회적 특성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때로 이 미국성론은 유럽에 비해 뒤늦게 국민문학을 갖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미국의 근대성과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함으로써 미국 문학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문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이 논의는 문학 외적 지표들을 통해 문학을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이 강하며, 이른바 ‘미국 예외론’의 전제를 정당화하려는 가설일 확률이 크다.

미국 문학의 미국성론을 찬찬히 살펴보면, “미국이 예외가 아님은 물론 미국 예외론도 예외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때로는 더 공감하게 된다. 미국의 ‘예외성’을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역사적 가능성과 동일시하는 입장은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며, 특히 미국 문학 연구에서는 19세기 국민문학의 발흥이 어떻게 이러한 미국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성취인지 판별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미국은 구세계 유럽과의 단절을 통해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 사회를 신대륙에 건설하려는 백인 문명의 확장이다. 따라서 미국성의 기원을 청교도주의에서 찾는 논의는 반쪽의 진실에 불과하다. 물론 청교도 시대의 문학 유산을 근대 미국 문학사의 일부로 포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근대 국가 성립 이전의 문학적 표현들을 어떤 명칭으로 포괄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문제다. 

‘국민문학’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일은 마땅하나, 북미의 백인 문명이 이룩한 국민문학의 성과들에 담겨 있는 자기비판의 정신을 가려보는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구세계 유럽을 부정하는 청교도주의 담론의 영향을 담고 있으면서도 독립전쟁을 이끈 계몽주의의 세례도 짙게 포함하는 19세기 미국 문학의 성취는 유럽 백인 문명의 연장 이상의 새로운 기운의 발흥을 선취하기 때문이다. 미국 문학의 고전 작가들이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의 미국 문학 장은 독립전쟁의 정치적 선진성을 독자적 ‘국민문학’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던 ‘국가주의적(nationalistic)’ 담론들과 치열한 대결을 통해 이룩한 성과인 측면이 많다. 더구나 19세기 국민문학은 문화적 독립의 국가주의적 이념과 달리 독립전쟁 이후에 유럽, 특히 영국에 문화적으로 의존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값진 성취이다.

정치적 독립과는 달리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이야말로 미국 문학의 ‘예외적’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티슨(F. O. Mattheissen)이 ‘미국 르네상스(American Renaissance)’라고 부른 1850년대 초반 국민문학의 폭발적 발흥은 미국 문학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2. ‘미국 르네상스’와 국민문학 

1850년대 미국 르네상스의 문학적 성취가 ‘뉴잉글랜드 백인 남성 작가’들의 고전에 한정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고전에 집약된 문제의식의 의미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도 1850년대를 청교도 이주나 독립전쟁에 버금가는 역사적 계기, 즉 독립전쟁 이후 미국 사회의 모순이 인종 문제와 결부되어 남북전쟁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위기 상황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소로(Henry David Thoreau), 호손(Nathaniel Hawthorne), 멜빌(Herman Melville), 휘트먼(Walt Whitman) 등 ‘고전’ 작가들이 만들어낸 ‘미국 르네상스’는 미국 백인 문명의 연장에 불과하지 않고 시대적 상황과 대결한 세계 문학의 일부로 논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수행하는 ‘미국 르네상스’의 폭발적 문학 성취를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의미에서 이들을 ‘국민문학’의 성취로 볼 수 있을까? 
 

3. 유럽 국민문학 정신의 재전유 

호손과 멜빌이 활동했던 ‘미국 르네상스’ 시기의 미국 고전 문학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사상가이자 에세이 작가인 에머슨이다. 근대 미국의 사상적 기반을 집약했다는 평가를 받는 에머슨의 작업은 한마디로 유럽 문화의 미국적 재전유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에머슨은 유럽 문화의 핵심에 플라톤과 그의 철학을 놓는다. 따라서 미국이 플라톤의 철학을 토대로 보편성을 정립했던 유럽 문화의 창조적 계승 없이 문화적 독립을 이루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에머슨

에머슨이 의미하는 유럽 국민문학의 플라톤 철학 전유는, 후설(Edmund Husserl)이나 베버(Max Weber)가 말한 근대와 유럽과 철학이 ‘보편성’의 이름으로 종합되는 과정이라기보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 국민문학들을 통해 평민성(=민주주의)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계승되는 도정이다. 따라서 미국 국민문학의 성패는 유럽의 철학적 계승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몽테뉴, 괴테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국민문학 성과의 재전유(re-appropriation)에 달려 있다.

이러한 입장은 유럽과 단절된 토착 문학의 창조라는 국민문학 주창자들의 당위적 이념과 상충하며, 1850년대 미국 르네상스 작가들의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상통한다. 미국 문학의 독특한 사명을 ‘유럽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근대 유럽 국민문학의 창조적 계승에서 찾고, 이를 미국의 토착 문화 현실—평민(common men)의 자주성이 광범위하게 향유될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요청한다. 이 재전유론은 미국의 새로운 글쓰기의 원천이 대서 양의 양편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발상으로서, 미국 문학을 유럽 문명의 연장으로 보는 동시에 토착적 재창조의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다. 

 

4. 창조성과 난해성의 동거: 호손과 멜빌 

1850년대 작가들의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은 새로운 글쓰기의 모색으로 이어진다. 특히 호손과 멜빌을 비롯한 ‘고전 작가’들의 서사성, 즉 호손의 표현을 빌리면 서사의 ‘진정성(authenticity)’을 구현하는 소설의 ‘허구성’에 대한 고민은, 한편으로는 당대의 대중문화에 팽배했던 감상주의적 글쓰기와 다른 한편에서는 1848년 이후 유럽 소설들의 자연주의로의 경도와 구별되는 미국 작가 특유의 글쓰기 실험이었다. 

 

호손과 멜빌

특히 호손의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1850)와 멜빌의 『모비-딕(Moby-Dick)』(1851)은 매우 남다르다. 호손은 문화적 자양분이 궁핍한 현실에서 글 쓰는 미국 작가의 깊은 고민을 자신의 ‘로맨스’론에 담았는데, 『주홍글자』는 특히 그 진의를 밝히는 데 중요하다. 우선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주홍글자』에 포함된 「세관(The Custom-House)」에는, ‘로맨스’가 마땅히 재현할 대상의 결핍에서 초래된 예외적 ‘비사실성’의 장르라는 『일곱 박공의 집(The House of the Seven Gables)』(1851)과 『블라이스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1852) 서문에서의 ‘수상한’ 주장이 없다. 「세관」에서 ‘로맨스’는 사실적 재현이라는 ‘소설’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허구)로 이해되지 않고, 재현의 충실성 여부를 넘어서서 소설이 구현하는 진리—진정성—를 담는 새로운 소설 쓰기 양식이자 미국 소설의 독창적인 진리 구현 방식을 지칭한다. 

이렇게 소설의 본 이야기에 쉽사리 포괄되지 않으나 본 이야기의 진정성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이질적인 담론들이 소설의 서사적 지평을 구성하는 『주홍글자』의 서사 구조는 멜빌의 『모비-딕』과 이른바 ‘고래학장들(Cetological chapters)’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모비-딕』의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고래학장들’은 멜빌이 이슈마엘(Ishmael)의 명상 형식을 빌려 고래를 과학적ㆍ철학적 분류 체계 속에서 인식하려는 시도의 난망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고래의 ‘인식’에 과학적 담론 체계를 원용하여 결국 그 체계의 타당성을 해체하는 ‘고래학장들’의 유사 과학적(pseudo-scientific) 담론들은 ‘예외론’에 경도된 미국 문학 특성론자들에게 흔히 『모비-딕』의 ‘로맨스’적 특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취급되었으나, 최근에는 이슈마엘의 패러디(parody) 스타일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사실성을 드높이는 효과로 평가받는다. 기존의 체계화가 고래를 “수평꼬리를 지니고 물을 뿜는 물고기(a spouting fish with a horizontal tail)”로 칭하는 데 그치거나 책 조판 체계를 빌려 탐구한 끝에 이슈마엘이 “이 체계는 여기서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는 대목은, 분류의 과학성을 입증하기는커녕 고래가 합리적 체계화의 사유 구조 내부에 존재하는 재현 불가능의 영역임을 나타내준다. 더구나 이슈마엘의 패러디는 이 재현 불가성이 실은 근대적 사유—서양 철학 및 근대 과학—의 합리성을 떠받치는 논리이며 이는 일견 그것과 대척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온 에이헙(Ahab) 선장과 매플 목사(Father Mapple)의 종말론적 수사와 쌍둥이 관계에 있음도 드러난다. 

 

이처럼 호손과 멜빌은 소설 내부에 소설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매우 이질적인—철학적 사변의 형식을 차용하여 그 형식의 해체를 지향하는 유사 철학적(quasi-philosophical)—담론을 포함시켜 소설에 있어서 재현 행위를 과학 및 철학과는 다른 소설만의 독특한 진정성, 곧 소설적 ‘진리’라는 차원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소설의 ‘진리’와 새로운 소설 쓰기 양식에 대한 두 사람의 고민은 ‘탈현실’의 장르를 의미할 때의 ‘로맨스’라는 다분히 예외론적이고 특성론적 개념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버코비치는 ‘미국 르네상스’의 뛰어난 성취들도 결국 청교도주의 수사에서 발원하는 미국 예외론의 이데올로기에 궁극적으로 ‘포섭’되어 그것을 정당화하는 담론 체계가 된다고 보았지만, ‘예배의 자유’와 공화주의, 연방주의(Unionism)와 대타협 같은 미국적 ‘합의’의 허위성을 계보적으로 해체하는 이들의 성취는 근대 장르인 소설의 리얼리즘 정신을 이어받아 이를 미국의 토착 현실과 밀착된 새로운 소설 쓰기 양식으로 창조한 진정성의 분출이다. 

따라서 ‘미국 르네상스’ 고전 작가들의 작품과 당대의 소위 ‘비주류 문학’에 담긴 비판의 정신을 현실의 재현 여부라는 단일 기준이 아닌 다양한 잣대로 평가해야만 1850년대 초반의 폭발적인 성취를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터이다. 이때 고전 작가들 특유의 애매함과 사변성은 두고두고 문제인데, ‘비사실성’ 혹은 사회 현실로부터의 탈피라는 낯익은 예외성의 지표—반재현성—를 동원함이 없이 1850년대 고전 작품들의 독서 체험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명할 기제는 없을까? 

필자는 이렇게 ‘애매함’으로 나타난 창조성과 난해성의 동거를 ‘미국 르네상스’ 고전 문학의 ‘유사 철학성’이라 부르고 싶은데, 이는 미국 문학의 미국성에 대한 또 하나의 특성론이 아니라 1850년대 미국 문학의 ‘새로움’이 왜 하필 극도의 반(反)재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산문 형식으로 자신을 드러냈는가를 그들 작품의 독서에서 겪는 어려움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에머슨의 ‘에세이’가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근대 서양 철학의 장르 법칙을 파괴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신의 해체 대상인 철학의 개념과 범주들 없이는 이해되기 힘든 것이나, 소설이 구현하는 진정성의 지평을 연 「세관」의 탁월한 ‘로맨스’론의 진의가 서사 내부에 호손 자신이 마련해둔 온갖 판단 불능의 장치들과 그것들의 모호함을 극복해야만 드러난다는 사실, 그리고 근대의 과학기술적 사유 체계와 지극히 비합리적인 청교도 수사 간의 음험한 결합을 비판한 ‘고래학장들’이 『모비-딕』의 독서를 소설 읽기에서 고도로 철학적인 사변의 영역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 ‘유사 철학성’을 뒷받침하는 독서 체험이다. 따라서 이 ‘유사 철학성’은 1850년대 미국 ‘고전 작가’들의 깊은 고민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의 지역적ㆍ인종적ㆍ문화적 편중과 고립을 나타내는 ‘영광의 상처’인데, 이는 로렌스(D. H. Lawrence)가 말한 미국 ‘고전 작가’들의 표리부동성(duplicity)과도 연관될 듯하다. 

 

5. 백인 의식의 탐구 

호손과 멜빌의 새로운 글쓰기 형식은 미국인의 백인 의식 내지는 인종적 무의식의 탐구로 이어진다. 호손이 이 작업을 주로 미국의 역사적 과거로 돌아가 수행한다면 멜빌은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통해 접근한다. 『주홍글자』는 「세관」이라는 이질적 서사를 통해 미국식 글쓰기의 새로움을 설파할 뿐만 아니라, 헤스터의 수난을 그려내어 신대륙으로 건너온 백인 문명의 허위의식을 집요하게 고발한다. 17세기 말에 벌어진 이른바 ‘마녀재판(witch trial)’의 허위성을 낱낱이 밝히기 위해 이 사건의 희생자인 한 여성의 눈에 비친 청교도 사회의 모순과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러한 청교도의 낡은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19세기 미국 백인 문명을 비판한다. 

호손은 헤스터를 억압적 청교도 사회의 희생자로만 그려내지 않고, 그 사회 가치가 논리적 극단으로 향할 때 나타나는 백인 의식의 외설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한다. 그 단적인 사례가 청교도가 금하는 간통을 저질러 교수대에 오른 ‘죄인’ 헤스터에게 청교도 목사들이 건네는 질문이다. 그들은 간통의 상대, 즉 공범이 누구인지 밝히라고 묻지 않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강요한다. 이는 유럽에서 건너온 청교도 백인들의 의식에 공동체의 혈통이 지닌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무의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간통의 대상이 누군지 알아내서 처벌하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그 사람이 이 공동체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논리인 것이다. 이는 마녀재판이 종교 공동체의 유지 이전에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인종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인종적 편견—백인 순혈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과 상통한다. 더구나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바로 간통의 공범—창백한 젊은 백인 목사—이라는 역설은 이 점을 더 부각시킨다. 또한 헤스터의 남편이 간통을 저지른 두 사람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복수극이 이 소설의 중요한 플롯인 점도 이 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소설은 간통 사건을 중심으로 관련된 세 사람이 각기 벌이는 복수극의 연쇄에 가깝다. 주된 플롯은 남편의 복수극으로 진행되지만, 이 과정에서 두 남성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대결이 부각되면서, 죄의식에 찬 백인 목사가 특유의 정신 착란을 통해 다른 두 사람에 반격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고, 죄인 헤스터가 여성으로서 억압적 시스템에 기생하는 두 남성을 향해 벌이는 싸움으로 읽을 여지도 크다. 칠링워스 복수의 도구가 ‘지식’이라면, 딤즈데일의 복수는 ‘고백’을 통해 이루어지며, 헤스터는 고립된 동안 얻게 된 ‘사색의 자유’를 통해 복수를 수행한다. 

헤스터의 사색의 자유는 “가장 대담하게 사색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사회의 형식적 규칙을 가장 온순하게 따른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라고 작가가 뒤이어 일갈하듯,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 특히 사색의 자유를 통한 헤스터의 복수는 죄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서 여성성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헤스터에게 모든 법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청교도 사회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자기만의 적극적 ‘포기’ 행위로 대체하는 수행자임을 드러낸다. 여성성의 자발적 말소는 청교도와 백인 남성들의 억압적 체계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그들의 인종적 무의식—순혈주의—을 거세하는 작업이다. 호손은 백인 문명을 이식한 청교도 사회의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드러내는 이중성을 헤스터의 여성성을 말소함으로써 파국에 이르게 한다. 직접적으로 당대의 인종적 편견을 고발하기보다 역사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백인 문명의 이식을 주도한 미국 사회의 정신주의가 여성이라는 타자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1851년에 출판된 『모비-딕』은 멜빌에게 작가적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자, 신생국 미국의 문학이 유럽에 버금가는 세계 문학의 성취를 일궈냈음을 널리 알린 사건이다. 남태평양의 원주민 문화를 서구 문명인의 잣대로 바라본 ‘볼거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바다를 공유하는 인간 존재들의 ‘평등한 눈’으로 그려낸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모비-딕』의 세계가 지구의 북반구를 차지하고서 과학 기술을 앞세워 남반구의 토착 문명을 교화하고 지배하려는 제국의 식민화 논리와 크게 다른 이유기도 하다. 멜빌의 해양 소설은 제국과 식민지, 문명과 야만, 빛과 어둠을 나누는 지배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는 제 나름의 고유성을 갖는다는 문화 상대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제국과 자본은 뉴잉글랜드와 남태평양을 가리지 않고 전 지구적으로 관철되지만 결국 제국의 지배는 식민의 생명에 기생한다는 것, 식민의 어둠을 밝히려는 문명의 빛은 그들 스스로를 눈멀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백색은 가장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 더운 피가 돌지 않는 죽음과 파멸의 상징이라는 것. 『모비-딕』은 끝내 자기 파괴로 돌진하게 될 미국 문명의 미래를 예언한 레퀴엠이자 서사시다. 

『모비-딕』의 백인 문명 비판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재성찰하는 비판 작업으로 이어진다. 문명사회를 밝히기 위해 숨 쉬는 향유고래의 기름을 짜내는 19세기 포경 산업의 실용주의적 잔혹함이 멜빌의 사실적 필치로 가감 없이 고발된다. 고래를 다룬 동서고금의 지혜들은 포획을 위한 과학적이고 해부학적 지식들로 대체된다. 그리고 포경선 피쿼드호는 더 많은 포획을 향한 실용주의적 집단 광기와 흰 고래(=악의 화신)를 향한 에이헙의 분노에 찬 사적 원한이 결합된 전함으로 뒤바뀐다. 그 과정에서 이 ‘남자 형제들의 무리’는 잔인한 노동 착취, 끔찍한 인종 차별, 무분별한 환경 파괴, 그리고 파시즘적 권위주의와 공생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극화한다. 이 난감한 19세기 포경선의 묘사에서 세계를 향해 무역 보복을 감행하고 ‘악의 축’을 되뇌는 미 제국의 현재 모습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모비-딕』이 고전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멜빌의 작가적 위대함은 『모비-딕』에서 현재 미국 제국의 씁쓸한 면모를 미리 읽어낼 수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멜빌은 18세기 말 독립전쟁을 통해 전 지구적 변혁의 기운을 선도했고 이를 새로운 사회의 민주주의적 원리로 주조했던 신생국 미국의 가능성이 자신의 시대에 이르러 반동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음을 날카롭게 감지했다. 멜빌이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의 미국 사회는 초창기 혁명 국가 미국의 새로움이 노예제 문제를 두고 내적 모순에 봉착한 격동기였다. 남북전쟁은 이 모순이 착종된 해결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해 사회적 혁신의 계기를 마련한 동시에 해방된 노예들과 농본적 남부를 본격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 결과 사회적 혁신의 계기는 남부의 식민화를 통한 급속한 국가적 자본주의화와 서부로의 영토 확장으로 전이돼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로 나서게 된다. 멜빌을 비롯해 이 시기 미국 국민문학의 개화를 이끌었던 작가와 지식인들이 강렬한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남북전쟁 직전의 이 시기, 즉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사회적 혁신의 기운이 여전히 존재했던 19세기 중엽의 기간을 흔히 ‘미국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에머슨, 소로, 호손, 멜빌, 휘트먼이 생산했던 미국 문학의 고전 작품들은 대부분 이때의 성취다. 특히 멜빌의 작품들은 당대의 뛰어난 작가들이 보여준 사회적 혁신의 기운과 공명하되 그들보다 더 나아가 미국 민주주의에 내재된 어두운 암흑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그 암흑이란 미국의 민주적 원리가 품고 있는 일종의 획일주의의 그림자다. 

호손이 이 획일적 집단성의 역사적 기원을 미국 사회의 모태가 된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끔찍한 공동체에서 찾았다면, 멜빌은 당대 자본주의의 총아였던 포경 산업의 현장에서 효율을 앞세워 대중을 선동하는 에이헙이라는 광기 어린 지도자, 그리고 그를 용인하고 나아가 욕망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집단적 최면 상태를 고발한다. 따라서 흰 고래를 향한 무모한 추격전을 독려하는 원한의 화신 에이헙은 자본가의 수사로 물질적 보상을 암시한다. 그가 “내 위에 누가 있다는 거야?”라고 권위를 강변할 때 다인종으로 이뤄진 평등한 선원 집단이 열렬히 호응하는 장면은 극적 압권과 끔찍한 공포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에이헙의 모습에서 링컨과 히틀러가 겹쳐 보인다면, 그리고 열광하는 선원들에게서 혁명 대중과 나치 군중이 오버랩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도 설파했듯이 미국 백인 지배 문화의 무의식에는 스스로의 본질적 선함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의 지도자(선조)들은 악행을 일삼는 폭군이 아니라는 맹목적 환상이 존재한다. 이런 환상은 지극히 평범한 백인, 특히 구세계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평등한 ‘형제애의 사회’를 이뤘다고 믿는 미국 백인 남성의 심리 현실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인종이나 성이 다른 이른바 가시적 타자, 혹은 자신이 기준으로 삼는 ‘평범성’을 벗어난 불가해한 존재에게 두려움과 혐오가 섞인 양가적 태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물론 이들은 스스로의 선량함을 확신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기에 이런 양가감정을 드러내 놓고 표출하지 못한다. 멜빌의 천재성은 이 표출되지 못한, 즉 표면적 선량함과 민주적 태도 이면에 존재하는 평범한 미국 백인 남성의 자기 망각을 문제 삼으며 이 ‘선량한 자기 망각’이 어떻게 무의식적 파괴 충동과 폭력성으로 분출될 수 있는지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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