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 관념화와 ‘효치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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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관념화와 ‘효치국가’의 탄생
  • 계승범 서강대·한국사
  • 승인 2021.06.27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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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모후의 반역: 광해군 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계승범 지음, 역사비평사, 384쪽, 2021.05)

유교의 양대 핵심 가치가 충과 효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국가에서 가정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충·효를 기반으로 엄격한 사회질서를 구축하였다. 국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정점에는 국왕이 있었다. 한 집안의 인간관계에서 최고 어른은 부모였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무대에서는 충과 효가 얼마든지 충돌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에서 사례도 적지 않다.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인목대비 폐위 논쟁도 마찬가지다. 국왕을 저주하고 부친의 역모에 내응한 대비(모후)를 자식인 국왕은 어떻게 처결해야 할까? 충을 생각하자면, 나중에 정상참작을 해줄지언정 반역보다 중한 죄가 없으니 일단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기는커녕 어떻게 어머니를 처벌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율배반이다. 

조선 역사에서 충과 효가 충돌한 대표적 사례는 광해군 재위(r. 1608~1623) 중에 발생하였다.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부친 김제남의 역모에 내응했다는 혐의를 받은 데 이어 저주 행위에 대한 유죄판결까지 받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모후가 반역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왕 광해군은 자식으로서 인목대비를 어떻게 처결해야 할까? 

내용과 상황 전개가 워낙 극적이다 보니, 인목대비 문제는 역사적 고찰에 앞서 문학의 소재로 널리 회자하였다. ‘자식에게 핍박받은 어미’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계축일기』는 인목대비를 문학적으로 소비하는 데 천혜의 보고 역할을 하였다. 그 덕분에 대중에게도 매우 낯익다. 역사학계도 광해군의 모후 핍박을 패륜으로 보는 데 동의하였다. 

패륜이란 무엇인가? 17세기 초 조선에서 인목대비를 논죄한 광해군의 행위는 패륜이었을까? 주자학 범주 안에서 논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한 패륜이었을까? 이론의 여지가 없는 패륜이라면 당대의 국왕 광해군도 그 점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그는 왜 그런 패륜을 굳이 자행했을까? 만일 주자학의 잣대로 볼 때 패륜이 아니라 정당한 법의 집행이었다면, 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한목소리로 그것을 패륜으로 간주하고는 토론의 여지조차 완전히 봉쇄했을까? 

더 나아가, 인목대비 폐위 논쟁은 그저 한때의 일회성 소동으로 끝났을까? 충·효라는 가치 위에 우뚝 선 조선왕조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충·효 논쟁은 아무런 여파도 남기지 않았을까?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장기 진화 과정에서 이 논쟁의 전후 맥락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정표를 세웠을까? 역사가라면 당연히 가질 만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런 일련의 질문에 아무런 답이 없으며, 학문적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폐위 논쟁을 전체적으로 다룬 연구 논문 한 편 없는 실정이다. 

이 책에서는 광해군 대 온 나라를 10년간 격론으로 몰아넣은 인목대비 폐위 논쟁을 종합적으로 천착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통시적으로 제시하였다. 즉위 후에 임해군(장자)과 영창대군(적자)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목대비에 대한 공격까지 감행한 광해군의 심리 기저에는 장자도 적자도 아니라는 트라우마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 논쟁의 한복판에서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 국왕 자신임을 생생히 드러내었다. 이는 광해군이 대북 세력에게 휘둘려 모후를 핍박했다는 통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연구 결과이다. 

또한 단순히 조정 논쟁의 추이만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폐위론자와 폐위반대론자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중국의 유사한 사례들을 일일이 추적하고 해석하였다. 폐위 논쟁이 조선왕조의 진화 과정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모후의 반역죄가 분명하다면 자식인 국왕은 어미일지라도 국법에 따라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유권해석이 주희를 비롯하여 중국 유학자들의 공통 견해임을 밝혔다. 

 

남양주 광해군 묘: 광해군 묘는 곡장 밖 작은 망주석, 정자각을 대신하는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비석만이 쓸쓸하게 서 있는 작고 초라한 무덤이다.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도 조선의 다수 주자학자는 다른 논리로써 인목대비를 옹호하였다. 대비의 유죄를 선고하려는 장본인이 바로 국왕 광해군이었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목대비의 반역 사실이 분명하지 않으니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지 못했다. 그런 주장을 입에 올리는 순간 이원익이나 이항복처럼 역적으로 몰려 유배당할 판이었다. 그 대신, 어떤 경우에도 자식은 어미를 처벌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논리를 펼쳤다. 이는 주희의 해석에서 이탈하는 중차대한 논리이자 사건이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이런 논리는 조선 후기 내내 난공불락의 권위를 갖추었다. 효가 충을 압도하는 ‘이상한’ 유교 국가가 출범한 셈이다. 

반정(1623) 후 5년도 채 안 되어 발생한 정묘호란(1627)은 이런 ‘대전환’에 박차를 가하였다. 반정의 양대 명분은 광해군이 범했다는 배명(背明)과 폐모(廢母)였는데, 후금과 강화함으로써 인조는 광해군보다 훨씬 더 심각한 배명을 자행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인조 정권의 정당성을 떠받치던 양 날개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잃고 정상적으로 비행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인조 이후의 역대 국왕과 양반지배층은 아직 남아 있는 다른 날개(폐모)를 더더욱 강조하고 이미 잃은 한 날개가 여전히 건재한 것처럼 선전(조선중화)하면서 왕조의 지배체제를 유지하였다. 국가 차원의 기억 조작이 장기간에 걸쳐 발생한 것이다. 대비 폐위 논쟁과 관련하여 광해군을 무조건 패륜으로만 단죄해온 학계의 풍토와 대중의 정서는 모두 반정 이후 후대의 시각으로 이전의 역사를 재단한 단순한 이해일 뿐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군사부일체에서 실천적 가치로서 군(君)의 의미는 관념화 혹은 형해화하였다. 부모에 대한 의리인 효와 붕당(학맥) 보스에 대한 사적(私的) 의리로서의 충이 조선 사회를 주도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후기의 서막을 연 반정을 이 책에서는 ‘효치(孝治)국가의 탄생’이라는 담론으로 제시하였다. 효경 이래 한-당-송-명을 거쳐 조선에서도 효는 충을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었다.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에서 말한 ‘효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는 그런 효치국가가 아니었다. 실천적 의미에서 효가 충을 실제로 제압하고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는 의미의 효치국가였다. 조선 후기 내내 지속한 처절한 당쟁과 그로 인한 왕권의 실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정조의 왕권이 15세기 태종, 세종, 세조, 성종보다 과연 강했는가, 라는 역질문은 18세기 왕권 강화 현상을 별다른 증거도 없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온 학계의 통설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당쟁의 심화와 왕권의 강화는 병립하기 쉽지 않다. 무신란은 이를 나위도 없고, 국왕을 암살하려던 배후를 캐내어 극형에 처하지 못한 정조의 한계는 조선 후기(18세기) 왕권 강화라는 통설의 약점을 잘 보여준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충’으로 뭉쳐야 할 유교 국가 조선은 19세기 근대의 파고가 덮칠 때 왜 잠재적 국력을 총동원할 중앙의 권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을까? 이 책은 에필로그 말미에서 이에 대한 가설적 답도 동아시아 비교 맥락에서 현재로 끌어와 제시한다. 


계승범 서강대·한국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보는 조선시대 정치·지성사와 한중관계사를 전공했다. 특히 양반 지식인들의 중화 인식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결합하여 조선을 빚어낸 과정과 그 역사적 유산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양태에 관심이 많다. 대표 저서로는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등이 있다. 역주서로는 A Korean Scholar’s Rude Awakening in Qing China, 『북정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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