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아무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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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아무 말도 없었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1.06.2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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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 에세이]

어느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가 우연히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견하고 빌려 보았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책이지만 애써 찾아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압록강이라는 말이 웬지 북한이나 중국을 연상시키고 그것이 흐른다니 왠지 딱딱한 내용일 것 같아서 그랬을까? 아니 그런 느낌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것이지, 그냥 특별히 관심이 가지 않아서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 이미륵

내용은 이미륵 씨가 독일로 유학 가기 전 어릴 적에 고향에서 뛰놀고 장난치고 야단 맞던 시절의 추억담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서정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뛰어난 작품이다. 누구나  그런 어릴 적 추억을 가지고 있고 추억은 추억이라서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작가의 감수성과 문장력이 그 추억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독일에서 유명해지고 일부가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한다. 

독일어로 된 그 작품을 번역한 사람은 전혜린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름이고 들으면 왠지 신비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젊은 나이에 자살하여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신비로운 충격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혜린은 22살의 어린 나이에 독일로 유학하여 그 전에 이미 돌아가신 이미륵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전혜린이 죽고 나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수필집이 발간되어 많은 청춘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책 또한 ‘압록강’과 비슷하게 저자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외롭고 추웠던 뮌헨 유학 시절의 삶과 젊은 나이에 나은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젊은 여성다운 감수성과 가슴앓이를 유려한 문장으로 잘 엮어 나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청춘과 유학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유학한 미국의 버팔로 또한 어둡고 추운 곳이었으며, 나의 청춘기 또한 괜히 쓰잘데기 없이 우울한 시절이어서 전혜린의 감성이 와 닿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그런 점이 싫어서 떨쳐버리려고 꽤 노력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전혜린의 ‘과한’ 감수성과 자의식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죽어서 유명해지면 뭐 하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이다. 전혜린의 수필 내용과는 별 관계 없고 심지어 책에 그런 제목의 꼭지도 없다. 전혜린 사후의 출간 과정에서 누군가가 그 제목을 빌려온 모양이다. 그러나 얼핏 관계 없어 보이는 이 제목이 책 전체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출판 감각이 뛰어난 사람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미륵도 전혜린도 이제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야 그 책들을 읽은 나도 이젠 노년에 접어들었다. 시간은 잘도 간다. 오늘도 압록강은 흐르고 나도 언젠가 아무 말이 없게 되겠지.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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