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소설의 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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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소설의 현재성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6.2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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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9강〉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9강〉_ 윤지관 덕성여대 명예교수의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49강 윤지관 명예교수(덕성여대 영어영문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제인 오스틴 소설의 현재성

윤지관 교수는 “탈근대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현재까지도” 제인 오스틴(Jane Austen)만큼 “독자 대중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유지하고 있는 작가는 드물 것”이라면서 그런 “오스틴의 고전으로서의 의미와 그 현대성을 지구 시대, 혹은 ‘탈근대’라는 역사적 국면에서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펼쳐 보인다. 그를 위해 우선 “제인 오스틴의 근대성을 해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 중 하나, 어떤 점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으로서 교양(Bildung)을 제시하고, 그것과 더불어 ‘진정한 감정’과 리얼리즘이라는 틀을 통해 오스틴의 ‘사랑스러운’ 작품들을 살펴본다. 그렇게 볼 때 오스틴의 소설은 다음 세 가지, 첫째 “일상에서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는 위안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를 부른다는 점에서, 둘째 “사랑과 결혼이라는 일상의 모험을 주제로 근대성의 문제에 대한 환기와 탐구”를 시도한다는 면에서, 끝으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양의 구현을 통한 ‘탈근대적’ 변화 추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한 현재성을 갖고 있다고 평한다.

지난 5월 22일, 윤지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지구 시대의 제인 오스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거의 평생을 시골에 살면서 마흔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한 여성 소설가가 쓴 여섯 편의 장편소설이 세계 문학의 지형도에서 빠질 수 없는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제인 오스틴을 두고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사람도 적지 않을 법하다. 오스틴은 ‘사랑스러운’ 작가이지만 ‘위대한’ 작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톨스토이나 발자크 같은 세계 문학의 거장들이라거나 영국 19세기 경우만 하더라도 찰스 디킨스나 조지 엘리엇처럼 방대한 작품 세계를 펼친 작가들에 비하면 자신이 살던 시골의 일상사만을 그린 오스틴의 세계는 협소해 보인다. 그럼에도 탈근대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현재까지도 오스틴만큼 독자 대중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유지하고 있는 작가는 드물 것이다. 이 글은 오스틴의 고전으로서의 의미와 그 현재성을 지구 시대, 혹은 ‘탈근대’라는 역사적 국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한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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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오스틴의 한정되고 좁아 보이는 소설 세계를 이해하는 상반된 시각이나 해석을 상기해볼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이 초래한 질서의 붕괴에 촉발된 영국 모더니즘 시기의 두 대표적인 소설가들의 대조적인 관점이 전형적이다. D. H. 로렌스가 오스틴을 “속이 좁아터진 노처녀(narrow-gutter spinster)”라고 경멸적으로 부른 데 비해, 버지니아 울프는 오스틴의 좁음은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 환경의 문제였으며, “순전한 가부장적 사회의 한가운데서 (권위의) 비판에 직면하여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이 본 그대로의 사물에 천착하는 일”을 해낸 탁월한 재능과 성실성을 가진 작가로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 둘을 꼽았다(A Room of One’s Own). 

로렌스와 울프의 관점 차이는 단순히 페미니즘적 문제의식 여부나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오스틴의 소설들이 당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기성 질서의 억압 체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고 있는가라는 좀 더 광범한 질문과 이어져 있다. 계급, 성별, 성애 등에서의 불평등 현실은 근대로 접어들어 변화를 겪지만 그 차별 구조는 해소되었다기보다 어떤 점에서는 더 정교하게 재구성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크게 보아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흥과 연루되어 있다. 오스틴이 작품을 썼던 당대인 19세기 초는 이 같은 근대성의 도약이 이루어지던 혁명기이기도 했다. 

필자는 오스틴을 근대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문제와 관련지어 읽을 필요가 있고, 근대성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통해 탈근대로 일컬어지는 현 시대의 국면에서 그의 소설의 입지나 의미를 사유할 수 있다고 본다. 오스틴의 소설이 누리고 있는 대중적 인기에는 단순히 로맨스에 대한 향수나 욕망 충족 혹은 환상이 작용하는,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 소비문화의 한 양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근대 사회의 성격과 그 모순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품적 성취가 기반이 되고 있다. 나아가서 필자는 그의 소설이 한편으로는 근대의 핵심적 가치에 대한 천착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체제적 문제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탈근대’의 과제와도 이어질 가능성을 읽어보고자 한다. 

2. 교양의 이념과 편견의 문제 

제인 오스틴의 근대성을 해명함에 있어 중요한 개념 중 하나, 어떤 점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교양(culture)이 아닌가 한다. 교양이 인간의 내면적 성숙과 완성을 일차적으로 지칭한다면,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교양의 사도들이다. 작가의 여섯 편의 소설 가운데서 실질적인 첫 작품이라고 할 『노생거 사원』의 열여섯 살 주인공 캐서린 몰런드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설득』의 스물일곱 살 앤 엘리엇까지 이들은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접하고 그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하면서 내면적 완성을 이룩해가려는 여성들, 즉 빌둥(Bildung)의 과업을 떠안고 있는 여성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교양소설(Bildungsroman)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교양소설을 ‘근대성의 상징적 형식’이라고 지칭한 프랑코 모레티는 『오만과 편견』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더불어 고전적인 교양소설 두 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모레티에 의하면, 교양소설은 근대 사회에서 충돌하는 인간의 개별성과 사회의 규범성 사이의 간극을 젊은이의 성장 서사를 통해 봉합하는 문학 형식이다. 교양소설의 주인공은 삶의 경험을 통해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사회의 성원으로 스스로를 형성하고 그것과 결합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성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교양의 과제와 합치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한다. 고전적 교양소설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근대성의 특정한 국면에서 이 같은 통합을 이룩해낸 교양소설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이들의 성취 이후 사회체제와 개인적 영역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결국 통합의 형식으로서의 교양소설은 때이른 종언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Franco Moretti, The Way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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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소설의 현재성 여부는 교양이라는 이념 자체가 탈근대적 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의 질문과 맺어져 있다. 근대적 교양 개념을 정립한 매슈 아널드는 교양은 ‘완성에 대한 공부’이며 ‘무엇보다 내적인 작용’이라고 한 바 있다. 오스틴에게 있어서도 교양의 내면적 성숙과 완성의 이념은 좁은 의미의 교양이라고 할 매너라거나 사회 규범에 대한 습득으로서의 예의범절(decorum)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이는 근대적인 주체의 정립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오만과 편견』에서에서부터 교양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본격화되는데, 주요 등장인물들 사이에 교양 있는 여성은 누구인가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에서, 빙리 양이 교양의 요건으로 “음악 노래 그림 춤 그리고 몇 가지 외국어”에 대한 습득과, “걸음걸이의 맵시, 목소리의 높낮이, 말하는 태도와 표현에서의 품위”를 드는 것에 대해, 다아시는 여기에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지성을 계발함으로써 더 실속 있는 내면”을 갖추어야 한다고 정정한다. 

사실 엘리자베스, 패니, 앤 등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 같은 내적인 자기완성의 이념을 키우고 지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근대적 주체들이다. 교양 충동의 강렬함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진실을 굳건히 지키면서 기성 질서의 벽들과 부딪치며 내적인 갈등을 겪게 한다. 이 같은 갈등은 희극적 서사 구조 속에서 해소되는 듯 보이지만, 기실 작품에서는 이 과정에서 제기된 내면과 외적 질서 사이의 간극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인간 내면의 진실된 감정과 연계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도 남성에 비해 열악한 여성의 조건과 시각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근대가 진행되면서 이 같은 상황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문제로 부각되며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해짐에 따라 더 구조화되어가기 때문에, 이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탈근대’의 요청은 이들 주인공들의 교양 충동이 가지는 현재성을 더 분명히 해준다. 교양의 이념은 근대적이면서 동시에 탈근대적인 과제와 맺어지게 되고, 오스틴의 소설의 현재성의 기반도 여기에 있다. 

3. ‘진정한 감정’과 리얼리즘 

오스틴이 활동하던 19세기 초는 영국 낭만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워즈워스와 콜리지, 셸리를 비롯한 시인들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고, 역사 로맨스의 대가인 월터 스콧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메리 셸리는 고딕 로맨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과학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했다. 오스틴 자신은 고딕소설의 애독자이긴 했지만 이 낭만주의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도 하거니와, 리비스를 비롯하여 그의 ‘위대함’을 말하는 후세의 논자들도 대개 그를 리얼리즘의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 소설가로 본다. 

그러나 오스틴의 작품들과 낭만주의의 관계는 적대적인 것으로 정리될 수 없을뿐더러 나아가서 그의 리얼리즘적 성취 자체가 낭만주의의 요소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오스틴이 고딕소설의 애독자라는 것은 당대 인기 작품들을 섭렵하고 있는 『노생거 사원』의 캐서린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목적 중 하나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고딕소설의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 있으며, 오스틴은 작중 작가의 목소리로 소설이야말로 일상적인 일을 그리면서 “정신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 발휘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 그 다양한 면모에 대한 가장 기막힌 묘사, 생생하게 넘쳐흐르는 위트와 유머가 선택된 최상의 언어로 세상에 전달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의 주제인 연애와 결혼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로맨스의 틀을 가지고 있고, 사랑이라는 ‘진정한 감정’의 문제가 그의 주인공들의 인식과 성장에서 핵심을 이룬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스틴과 낭만주의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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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리얼리즘적 성격과 관련하여 작가가 ‘이성(분별력)’과 ‘감성(감수성)’의 대립 구도에서 이성과 합리성을 우선하고 감성의 절제와 통제를 말하고 있다는 평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정작 오스틴의 소설들은 전체적으로 ‘감정’의 진실성 혹은 진실된 감정을 인간적 완성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의 ‘진실된 감정’은 ‘감성’을 동반하지만 감성에 매몰된 감정은 아니며, 한편으로 감성이 결합되지 않은 이성을 오스틴의 주인공들이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성과 감성』에서 엘리너와 매리앤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 전자의 ‘이성’과 후자의 ‘감성’의 대비와 전자에 대한 작가의 옹호라고 쉽게 결론지을 일은 아니다.
 
언니인 엘리너가 분별력이 강하고 특히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한 데 비해 동생 메리앤은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적극성을 가지고 있다. 언니는 동생의 과도한 감정 몰입을 우려하고 동생은 언니가 너무 이성적이기만 한 것이 불만이다. 그러나 ‘진실된 감정’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둘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 에드워드에 대한 엘리너의 감정은 서서히 형성되었고 억눌려 있지만 더 단단하게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고, 메리앤의 감정은 열렬하고 숨김없지만 매혹에 의존해 있고 성찰이 없다. 메리앤의 감정에 비해 엘리너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는 만큼이나 성숙한 것이고, 이것이 오스틴의 관점에서 더 ‘진실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메리앤의 실패와 엘리너의 성공으로 연애 서사가 마무리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낭만적 열정이나 나아가서 낭만주의에 대한 오스틴의 부정이라기보다 ‘낭만성’의 의미에 대한 관점과 유관하다. 워즈워스는 좋은 시의 원천을 “강렬한 감정의 자연 발생적인 넘쳐흐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강렬한 감정’은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오랜 명상과 숙고를 거친 감정을 말한다. 어떤 점에서는 엘리너의 감정은 동생에게서 ‘미적지근’하다는 불만을 야기하지만, 엘리너의 ‘숙고된’ 감정의 강렬함은 에드워드의 사랑을 확인하고 터지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려고 방을 뛰쳐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려진다. 

오스틴에게 이 ‘진정한 감정’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력과 사유가 감성의 영역을 떠나서 이룩되지 않는다는 칸트적인 인식과 유관한데, 리비스가 말하는 오스틴의 ‘강렬한 도덕 의식’도 여기서 발원한다. 사회 규범으로서의 도덕률이나 매너로 나타난 일상화된 도덕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의 진실성이라는 원천을 견지함으로써 그의 여주인공들의 삶은 기성 질서의 윤리와 충돌하는 지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연애와 결혼이라는 주제와 맺어져 있을 때 사랑의 감정의 진실성과 사회적 필요로서의 결혼 풍습 사이의 갈등은 더 날카롭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를 통해서도 이 같은 갈등이 중점적으로 그려지지만, 이 문제가 가장 심도 있고 면밀하게 다루어지기는 다음 작품인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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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상의 길과 양심의 문제 

『맨스필드 파크』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오스틴의 근대성의 억압적 성격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최근의 비평에서 강조된다. 특히 토머스 경의 부가 안티구아의 농장 경영과 맺어져 있고 직접 현장에 가서 수개월을 보내는데, 작품에는 직접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작가가 당시 정치적 논란이 있던 ‘노예제 폐지’에 대한 패니의 질문을 끼워넣어 이 제국주의적 현실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더부살이 처지의 패니의 환경과 그 수동성 자체가 그런 핍박의 현실과 유비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탈식민주의적 읽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으나, 서사의 중심은 당시 런던으로 대변되는 근대적 흐름과 맨스필드 파크로 대변되는 봉건적인 구질서 사이의 대립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패니와 에드워드의 ‘보수성’을 크로퍼드 남매의 ‘진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패니가 자신의 ‘진실된 감정’에 충실하고 그런 점에서 사회의 기성 질서와 결합된 풍습에 저항하는 ‘근대적’ 성격을 보여주는 반면, 메리 크로퍼드는 에드워드가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는 직업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새로 형성되는 세속적 권력 구조에 전적으로 승복하고 있다. 이 대립은 근대성이 가지는 양면적인 성격을 환기시키고, 오스틴의 소설을 읽는 한 방식은 이 같은 양면성이 어떻게 작품 속에 구현되고 해석되고 있는가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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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가치를 근대적 가치로 치환하려는 크로퍼드 남매의 ‘근대성’이 벤담적인 ‘변혁성’을 담지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정서 자체는 새 시대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공리주의적 이념에 기울어 있다. 오스틴이 공리주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가령 당대의 물질주의적 경향에 대한 풍자는 그의 작품들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맨스필드 파크』에서도 장원 개량의 유행을 따르는 러시워스 씨라든가, 『이성과 감성』의 경우 토지의 울타리 치기(enclosure)를 통해 부를 늘리는 존 대시우드 씨 같은 인물들의 부정적인 사례들이 그려진다. 

패니의 감정의 훈련과 자기 교육의 과정은 말하자면 밀이 말하는 근대성의 한 축으로서의 교양적 지향과 맺어져 있다. 『맨스필드 파크』는 오스틴의 전통 수호의 ‘보수성’이 반영된 작품이라기보다, 낭만주의에서 발원한 이 교양의 이념이라는 근대 주체의 대두를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고, 이 주제는 이후의 두 작품 즉 『에마』와 『설득』에서도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특히 『설득』에서 작가는 새로운 주체 의식과 도덕 의식이 기성의 질서와 연동된 사회적 규범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더 깊이 있게 탐구한다. 

『에마』와 『설득』에는 이전의 작품들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사회 변화의 모습들이 묘사되고 전통적인 지주 계급이 아닌 전문직이나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의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가령 『에마』에서 마틴과 같은 농부나 약제사 페리 씨, 학교 운영자, 상인 계급 등이 마을 공동체의 성원으로 묘사되고, 『설득』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부각된 해군의 젊은이들이 주역을 맡는다. 이 가운데 『에마』가 젊은 여성인 주인공이 마을의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성장해가는 서사를 통해, 변화의 와중에 있는 공동체의 어떤 새로운 질서와 그에 대한 근대적 의식의 문제를 다루려고 했다면, 『설득』은 여성 주인공 앤 엘리엇을 통해 기성 질서 및 그 규범과 자기 진실 사이에서의 고투를 심도 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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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의 소설은 결국 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추구하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사유는 후기작으로 갈수록 더 진전되고 깊어진다. 교양소설은 젊은 주인공이 경험을 통해 세상 물정을 알아가고 그것과 타협하고 화해하는 서사를 기본 틀로 하는 것이지만, 오스틴은 그 ‘세상의 길’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체계성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과 길항하면서 인간의 삶의 완성을 지향해나가는 주인공을 통해 형식으로서의 교양소설의 ‘고전적’ 의미를 지켜낸다.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해지면서 교양소설의 가능성도 와해되고, 이를테면 반-교양적 교양소설들이 그것을 대체하고 있지만, 오스틴에 대한 독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은 이 ‘탈근대적’ 조건에서도 여전히 교양에 대한 꿈이 존속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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