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체험
상태바
가장 큰 체험
  •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 승인 2021.06.21 1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베르타스]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몹시 사랑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이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도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스완네 집 쪽으로』는 프루스트가 14년에 걸쳐 완성한(구상한 시점까지 고려하면 19년) 7편의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운데 제1편이다. 거의 모든 삶을 아우르고 있어 갖가지 진동으로 체감하는 삶의 의미망이란. 그 아련함과 짜릿함이란.

   어머니는 하인을 시켜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작고 통통한 과자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 과자는 생자크라는 조개의 가느다란 홈이 팬 조가비 속에 넣어 구운 것 같았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해 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
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인 그 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
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나를 휘감았다. 그 매혹적인 쾌감은 사랑이 적용할 때처럼 귀
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면서, 즉시 나를 인생의 변전 따위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고, 
인생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했다. 
아니, 오히려 그 정수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위의 인용 부분으로 ‘프루스트 현상’ 또는 ‘프루스트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대부분 특정 향기로 비롯되는 후각적인 자극을 통해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여러분은 기억의 환기를 통해 이러한 ‘감미롭고 매혹적인 쾌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 
여기서 프루스트는 마들렌 과자가 촉발한 상상 작용을 종이꽃 놀이에 비유한다. 형체를 가늠할 길 없는 종이꽃을 물이 담긴 그릇에 넣으면, 순간 꽃의 윤곽이 생기고 빛깔이 환하게 드러난다. 이 종이꽃처럼 프루스트에게 집이며 사물이며 그의 기억 저편에 숨겨져 있던 갖가지 면면들이 눈앞에 또렷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때 시간의 개념이 슬몃 들어온다. 아울러 기억과 망각도. 『스완네 집 쪽으로』가 보여주듯 프루스트에게 존재하는 시간은 매 순간순간이 의미 있는 ‘영원한 현재’이다. 그러니까 프루스트가 포착하는 순간은 단절되고 파편화된 순간이 아니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연속적인 순간들인 셈이다. 현재의 순간에는 많은 과거의 체험들이 공존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순간 속의 사연들이 무엇이든 이것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의의 있는 패턴을 가지게 되는 연속적인 순간이 되므로. 과거와 현재는 단절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므로. 하여 망각도 프루스트에게는 의미 있는 작용이 되는 것이다. 망각이 완전 소멸의 의미가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서 의미 있는 기억으로 솟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으니.
 
   『스완네 집 쪽으로』는 3부로 짜여 있다. 제1부는 ‘콩브레’, 제2부는 ‘스완의 사랑’, 제3부는 ‘고장의 이름’으로. 제목이 ‘스완네 집 쪽으로’이기는 하지만 스완의 집이 작품의 중요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마르셀의 집 안도 배경이 되고 마을의 시냇가나 들판, 성당 그리고 스완네 집과 쌍벽을 이루는 게르망트네 들이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데 주요한 장소들이 된다. 시간과 만나는 장소의 내밀함.  

   『스완네 집 쪽으로』(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편)를 읽다 보면 플롯이 불분명한 사건들이 뒤엉겨 나타나기도 하고 문장이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만난다. 한 신사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뒤척이는 장면을 무려 30쪽에 걸쳐 묘사하고 있으니. 게다가 인과 관계마저 불분명하다보니 서사구조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줄거리가 명확하지도 않다. 이 모든 것이 프루스트가 떠오르는 대로 쓰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갈리마르 – NRF의 편집장이었던 앙드레 지드는 『스완네 집 쪽으로』의 출간을 거절했다. 결국 『스완네 집 쪽으로』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부득이 자비로 출간되는 사연을 남겼다. 훗날 앙드레 지드는 프루스트에게 이 소설의 출간을 거부한 일로 편지를 보낸다. 출간을 거부한 것이 몹시 후회되는 일이라고.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을 때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일관성 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져도, 시간의 흐름이 순차적이지 않아도 뭐, 괜찮다. 어차피 우리들의 마음자리는, 의식은 그리 질서정연하지 않지 않은가. 순간순간들에 주목하면 될 것이다.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몸을 맡기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영원한 현재’로 연결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마치 전혀 다른 방향처럼 여겨졌던 스완네와 게르망트네가, 전혀 달라 보이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야”와 “전형적인 강가 풍경”이 실은 맞닿아 있었으며, 결국은 하나의 통합된 풍경이라는 것을.
   의식이 환기하는 대로 묘사하고 서술해 나가는 방식. 그러므로 한 인간의 의식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바로 『스완네 집 쪽으로』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요약은 프루스트가 원하지 않는 일일 터. 프루스트는 요약이니 정리니 따위를 떠나서 기억과 망각의 카테고리를 자유롭게 넘나들기를 간절히 원할 테니까. 그러므로 정석대로 정리하고 분석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충분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가 7편 『되찾은 시간』에서 말했듯이 소설은 확대경이니까.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이거나 미처 자신이 보지 못했던 주위 것들을, 사회를, 타인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확대경이니까. 그 확대경의 의미망을 『스완네 집 쪽으로』는 내밀하고도 찬찬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선뜻 권하는 데 망설임이 일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영혼의 유영을 위하여 덧붙이는 한 마디!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고 난 후 나머지 6편의 이야기들도 읽으면 어떨까. 굳이 권유하지 않아도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는다면 나머지도 찾아서 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도 “한없이 다시 읽고 또 읽고 싶은 작품”이라고 했으니.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 책인 『스완네 집 쪽으로』 곳곳에 보석 같은 삶의 면면들을 흩어놓았다. 그래서 『스완네 집 쪽으로』의 진수를 맛보려면 마지막 일곱 번째 책인 『되찾은 시간』까지 읽은 후 다시 되돌아와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어야 한다. 결국 두 번을 읽어야! 그러니까 『스완네 집 쪽으로』는 결국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펼쳐 내는 여덟 번째 책이 되는 셈이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구성인가. 이 단계까지 가면 “생명력이 가득 넘쳐흐른다.”는 폴 발레리의 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이 되어 보는 것, ‘가장 큰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즐거운 독서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떠신지, 이 어수선한 여름 길목에서.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