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매한 환경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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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매한 환경 사랑
  • 정범진 경희대·원자력공학
  • 승인 2021.06.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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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 시대는 환경이 대세이다. ‘친환경’이라는 단어는 어디나 들어간다. 마치 사이비 종교 같다.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지성으로 무장되어 있더라도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으로 또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으로 입력되어 있다면 그 지성은 악한 칼이 될 것이다. 또 환경에 대해 우리는 선동가와 언론이 깔아놓은 정보를 과학적 상식으로 충분히 걸러서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혹은 맹목적으로 흡수시키고 있을까?

공장의 굴뚝에서 오염물질이 배출되면 우리는 대기오염을 떠올린다. 조금이라도 나오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환경오염에 대한 과학적 정의는 ‘자정능력을 초과한 배출’이다. 자정능력 이내의 배출은 환경오염이 아니다. 그것이 배출기준이라는 것이 있는 이유다. 만일 조금이라도 배출되면 환경오염에 이른다면 배출기준은 무조건 0(영)이어야 할 것이다.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었다는 뉴스에 접하면 곧바로 불매운동에 들어간다. 우리가 컵라면 한 개를 먹으면 얼마나 많은 환경호르몬이 인체에 유입되고 또 얼마나 배출되지 않고 남는지 그리고 우리가 연간 컵라면을 얼마나 소비하는지 따져보고 인체에 유해한 결과가 나타나는 문턱값보다 크게 하회한다면 그 컵라면 용기는 그대로 사용되어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숫자로 따져보지 않는다. 마녀사냥인 것이다. 그런 식의 언론의 마녀사냥에 망한, 번데기 통조림 제조업체의 기억은 고등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한다. 

제로에너지 주택은 전기와 냉난방에 필요한 에너지를 자급한다. 그러나 연료만 자원이 아니라 그 주택을 건축하는 데 들어간 소재도 모두 에너지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제로에너지 주택이 자급하는 에너지는 전체 에너지의 10%가 안될 것이다. 대부분의 에너지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들어가기 때문이다. 절약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제로(0)일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자전거는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적 교통수단이다. 그러나 이 자전거가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공유하면서 자동차의 운행속도를 느리게 한다면 그것도 친환경일까? 자전거 도로를 건설해 놨는데 이용하는 자전거가 많지 않다면 그것도 친환경인가? 공유자전거 제도를 만들었는데 엄청난 공적재원을 낭비하게 했다면 그것도 친환경인가? 자전거가 친환경이라는 등식이 언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쳐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도 마찬가지다. 친환경적 발전수단이지만 그것을 위해 어떤 환경적 희생을 치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국토를 훼손하고 벌목을 해가며 건설된 태양광 발전의 긍정적 효과는 그것이 훼손한 만큼은 감해야 타당할 것이다. 또 태양광 패널이 그것을 제조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 만큼도 생산하지 못하고 수명을 다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건 오히려 환경을 훼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석탄발전 대신 천연가스 발전은 친환경인가? 둘 다 화석연료의 연소를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데 오십보백보가 아닌가? 멀쩡히 돌아가는 석탄발전소를 폐지하는 데 또 가스 발전소를 새로 짓는 데 들어가는 것은 에너지가 아닌가? 천연가스의 천연은 땅에서 캤다는 뜻이지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석탄도 천연이고 우라늄도 천연이다. 

유기농이 친환경인가?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품종개량도 되지 않은 식물을 생산한다면 땅은 100배가 필요하다. 만일 모두가 그걸 먹어야 한다면 숲은 모조리 농토가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많은 농부가 필요할 것이고 그리고도 우린 굶주릴 것이다. 유기농이 몸에 좋을지 몰라도 지구에 좋은 것은 아닌데 왜 친환경으로 부를까? ‘친인간’이겠지. 그것도 믿기 어렵다. 신선한 채소의 가격이 올라가서 조금밖에 먹을 수 없다면 친인간도 아닐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친환경 제품은 다소 비싸도 사준다. 환경을 지키는 것이 좋으니까. 그런데 제품의 가격은 투입된 자원을 생산량으로 나누어 결정된다. 그런데 비싸다는 말은 투입된 자원이 많거나 생산이 적다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친환경인가? 리싸이클을 했으면 더 싸져야지 어떻게 더 비싼가? 환경팔이 장사꾼이 아닐까?

산업화 이전의 상태가 낭만적이고 좋아 보이는가? 그땐 배고팠고 일찍 죽었다. 1960년대 우리의 평균수명은 60세를 멀리 미치지 못했다. 지금 훨씬 풍요롭고 깨끗한 환경에서 오래 살고 있다. 우리가 문명을 키우고 산업화를 통해서 발전시킨 결과이다. 


정범진 경희대·원자력공학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졸업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박사후연수. 과학기술부 사무관, 제주대학교 교수 역임 후 현재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 한국연구재단 원자력단 단장, 한국원자력학회 부회장, 산업부 전력정책심의위원, 국무총리실 원자력이용개발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세부전공은 열수력에 기반한 원자력 안전성으로, 원전 중대사고, 피동안전계통 설계, 액체금속로(SFR), 수소생산용원자로(VHTR) 혼합대류 현상론에 대한 연구로 2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다양한 원자력정책자문 활동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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