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 처벌에도 근절되지 않은 과부 보쌈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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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처벌에도 근절되지 않은 과부 보쌈 풍속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6.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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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⑲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⑲_ 엄한 처벌에도 근절되지 않은 과부 보쌈 풍속

 

과부 탐내다 딸 뺏긴 이방

“안동에 사는 권 진사(進士)는 나이 삼십이 못 되어 상처(喪妻)하고 자식도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이웃에 부유하고 예쁜 과부가 있어 권 진사가 여러 번 매파를 보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어느 날 과부가 권 진사를 불러 저녁을 대접하고는 서로 옷을 바꿔 입자고 하였다. 권 진사가 과부의 옷을 입고 자리에 누워 있었더니 장정 여러 명이 들어와 권 진사를 보쌈해서 고을 이방(吏房)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방이 들어와 미음을 권했으나 권 진사가 얼굴을 보이지 않고 거절하자, 오늘밤은 자신의 딸과 함께 자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권 진사는 이방의 딸과 동침한 후, 다음 날 아침에 이방을 불러 호통을 치니 이방이 놀라 사죄하고 딸을 권 진사 댁으로 보냈다. 권 진사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 과부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방이 자신을 보쌈하려는 계책을 미리 알고 차라리 양반의 후실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권 진사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하였다. 졸지에 권 진사는 이방의 딸과 과부를 모두 아내로 맞이하여 재산도 얻고 편안하게 잘 살았다.”

위의 이야기는 조선후기의 야담집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실려 있는 「과부 탐내다 딸 뺏긴 이방」 이야기이다. 자신을 보쌈하려는 고을 이방의 계획을 알아챈 과부가 이웃의 권 진사를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과부 대신에 보쌈을 당한 권 진사가 아름다운 두 아내를 들이는 행운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조선후기 각종 야담(野談)을 모은 책 『청구야담(靑邱野談)』.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후기 구전 설화 중에는 과부 보쌈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아서, 한 연구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구비문학대계』 등에 모두 44편이 실려 있는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설화집에 실린 이야기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 실제 일어났던 과부 보쌈은 위의 이야기처럼 행운을 가져다주는 낭만적인 스토리는 결코 아니었다.

“과부 보쌈을 치도율(治盜律)로 다스리소서.”

과부 보쌈은 조선시대에 몰래 과부를 납치하여 강제로 혼인하는 일종의 약탈혼의 풍습을 말하는데, 한자로는 박과(縛寡), 겁과(劫寡), 약과(掠寡), 혹은 박취(縛娶)라고 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기 관습 조사에 따르면 보쌈을 행하는 방법은 홀아비 측의 동료 여러 명이 공모하여 과부 집에 침입해서 포대에 과부를 집어넣거나 혹은 손발을 묶고 입에 버선 짝을 틀어막고는 등에 메고 도망하였다. 등에 업을 때 과부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입으로 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등과 등이 맞닿도록 업었으며, 겨울에는 이불로 둘러싸서 결박했다고 한다. 보쌈은 강제로 행해지는 강제 약탈도 있었지만, 간혹 과부 본인이나 부모와 약속을 하고 합의하여 약탈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MBN 퓨전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 포스터. 조선 광해군 대 생계형 보쌈꾼이 실수로 옹주(翁主)를 보쌈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퓨전사극.

과부 보쌈에 대한 이른 시기의 기록은 1554년(명종 9)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경상도 단성의 사족 유몽상(柳夢祥)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유몽상의 딸이 시집간 지 십 년도 되지 않아 지아비가 죽자 수절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몽상이 딸의 뜻을 돌려 장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게 하려고 했으나 그의 딸은 절개를 보존하고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결국 유몽상은 이웃 마을의 무뢰한과 짜고 밤에 딸을 보쌈하게 하여 다음날 강제로 그와 혼례를 맺었다. 이 소식을 들을 사간원(司諫院)에서는 풍속을 해친 유몽상, 그리고 이를 제대로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유몽상의 딸 혼례식에 참석한 단성현감 성준(成遵)을 엄히 처벌할 것을 요청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정조가 심리한 중죄인 판결 기록을 모은 『심리록(審理錄)』에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경기도 장단(長湍) 땅에서 과부 보쌈에 가담한 자들끼리 충돌하여 한 명이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홀아비인 고지방(高之方)이란 자가 이웃의 과부를 보쌈, 겁탈하기 위해 무리를 이끌고 갔다가 동리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과부를 제대로 안고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지방이 동료와 합세하여 최원세(崔元世)를 발로 차고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오면 과부 보쌈이 더욱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05년(순조 5)에는 형조 판서 이면긍(李勉兢)은 과부 보쌈을 엄벌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평소 예의의 나라로 일컫고 있어서 비록 민간의 보잘것없는 백성이라도 아내를 들일 때에는 각기 통상적인 예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외읍의 시골에서 수절(守節)하는 양인(良人) 과부가 있으면 강포한 자가 무리를 이끌고 가서 밤을 틈타 겁탈하고 보로 싸고 묶어서 데려가는 것을 ‘보쌈’이라고 합니다. 풍속과 윤리를 해치는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이로 인해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리석은 백성들이 양반 집안 여인들을 범하는 것도 예사로 여기고 있고, 관부(官府)도 정한 법률이 없는 탓에 나날이 심해지는데도 금지할 수 없으니 정말로 한심합니다.”

이면긍은 잘못된 폐습인 과부 보쌈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엄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하여 수교(受敎)가 만들어진다. 그의 주장은 보쌈 가담자는 밤에 무리를 지어 재물을 약탈하는 명화적(明火賊)과 다를 바 없으니 주범과 종범 할 것 없이 모두 진영(鎭營)에 넘겨 치도율(治盜律)로 처벌하자는 것이다. 각 도에 설치된 진영은 당시 강, 절도 피의자에게 주리(周牢)와 난장(亂杖)이라는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악명높은 군영이었다. 치도율은 도적을 처벌할 때 적용하는 무거운 형률을 말하는데, 예컨대 명화적 활동을 한 자들은 설사 사람을 해치지 않고 훔친 물건이 적더라도 먼 외딴 섬의 노비로 삼도록 했다. 

조선후기의 각종 왕명을 모은 『수교등록(手敎謄錄)』. 순조 5년에 형조 판서 이면긍의 요청으로 제정된 과부 보쌈에 대한 처벌 수교도 실려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과부 보쌈이 가져온 비극

순조 5년 왕명의 제정으로 이제 과부 보쌈 행위는 엄한 형벌을 받는 중죄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과부 보쌈 행위는 근절되었을까? 불행히도 관련 기록을 종합해보면 정부의 엄한 처벌 의지에도 불구하고 보쌈 풍습이 여전히 강고하게 잔존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순조대 법규 제정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대한제국기 『사법품보(司法稟報)』에는 과부 보쌈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 폭력 사건이 계속 등장하고 있었다.

예컨대 1899년에는 전남 창평군 내남면에 사는 과부 김 여인을 광주 석저면의 김영국(金永國)이란 자가 보쌈, 겁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김 여인이 목에 칼을 찌르고 곡기를 끊어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전라남도 관찰사가 1899년 2월 28일 법부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수절하는 창평군 과부 김여인을 보쌈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피의자 김영국에 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사법품보』 수록.

1902년 5월 강원도재판소 판사가 법부(法部)에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강원도 인제군에서 청상 과부인 딸이 보쌈당한 후 그 어머니 조 여인이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한 일도 발생하였다. 또 같은 해 황해도 봉산군에서는 과부인 외손녀 전 여인이 홀아비에게 보쌈을 당하자,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낫을 휘둘러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도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지역을 가릴 것 없이 벌어지고 있던 과부 보쌈은 종종 살인,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인명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과부 보쌈의 폐해가 쉽게 근절되지 않아서인 듯 1905년에 제정된 최초의 근대 형법전에서도 이에 대한 무거운 처벌 규정이 담기게 된다. 『형법대전(刑法大全)』 605조에 따르면 유부녀나 미혼 여성을 강탈하여 처나 첩을 삼은 자는 법정 최고형인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다만 보쌈당한 여인이 과부인 경우에는 여기서 한 등급을 감한 징역 15년의 중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1907년 의주(義州)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박종현(朴宗玄)이란 죄수는 박과(縛寡), 즉 과부 보쌈을 이유로 징역 7년 형에 처해졌다. 보쌈을 해온 과부의 몸을 빼앗지 않고 원래의 가족에게 돌려보낸 것을 참작하여 재판소에서는 그에게 원래 형량보다 낮은 판결을 내렸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 징역형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1907년 의주재판소에 수감된 죄수의 성명, 범죄내용, 형량 등을 적은 시수성책(時囚成冊). 맨 왼쪽의 박종현(朴宗玄)이란 인물이 박과죄(縛寡罪), 즉 과부 보쌈의 죄명으로 징역 7년에 처해진 사실이 나온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신부 납치’

앞서 본 것처럼 과부 보쌈 행위는 매우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제시대의 민속학자 손진태는 1912년에 고향인 부산 동래구 사하면 하단리에서 남편을 여의고 남은 아들도 전염병으로 잃은 삼십 세 전후의 과부를 이웃 홀아비가 포대에 넣어 업어 와서 부부가 된 이야기를 직접 목도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1930년 여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과부 약탈혼이 보편적이었음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과부 보쌈 풍속이 식민지 시대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셈이다.

               민속학자 남창 손진태(孫晋泰: 1900~?) 선생. 

최근 매스컴 보도를 보면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는 12세기 유목민 시절의 전통에서 비롯된 약탈혼 관습인 신부 납치 피해가 지금까지도 극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라 카추(붙잡아서 뛰어라)’라고 부르는 신부 납치는 정상적인 연애결혼이 어려운 가난한 남성들의 혼인의 한 형태로 여전히 선호되고 있으며, 옛 소련 시절에 이미 법으로 금지됐지만, 요즘도 매년 무려 1만여 명이 넘는 여성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납치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저항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성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현재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진 과부 보쌈이라는 약탈혼 전통이 중앙아시아 지역 일부 나라에서 여전히 강고하게 잔존해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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