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그냥 좀 내버려 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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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그냥 좀 내버려 둔다면?
  • 김진영 연세대학교·노어노문학
  • 승인 2021.06.13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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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올해 들어 학과 일을 다시 맡아보게 되었는데, 예전에 비해 서류 양이 엄청 늘었다. 압축 파일 속 압축 파일로 쏟아져 내려오는 온갖 공문과 지침, 관료주의적 절차와 형식논리가 지나쳐 보인다. 교육부 감사의 된서리를 맞은 후 대학은 자기방어적 행정시스템을 강화했다. 각각의 업무마다 각각의 학칙과 내규에 따른 위원회가 구성되고, 회의록이 작성되며, 더불어 서약서가 첨부되어야 한다. 모든 각각의 것들에 대한 자가점검 단계를 거쳐 업무가 완료된 후에는, 그 노동의 흔적을 어떻게 보관 혹은 폐기해야 하는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장황하고 복잡하고 따분한 전 과정은 한 치의 규격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차 시 어느 방향, 어느 각도, 어느 간격으로 일사불란 차를 위치시키느냐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것과 같아서, 때론 운전자(교수)와 주차관리원(행정직원)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양측 모두 자기 검열과 방어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을뿐더러, 자칫 본말이 전도되는 소모적 양상이다.

대학의 본분은 가르치고 공부하는 것이 건만, 그 일이 뒷전으로 밀렸다. 본질적이지 않은 일로 대학이 너무 바쁘다. 학생은 수업 외 활동으로 바쁘고, 교수들은 학문 외 업무로 바쁘다. 공부를 하더라도 내용(질)이 아니라 형식(양) 채우기에 바빠서, 실은 제대로 된 발전을 할 수가 없다. 다들 아는 뻔한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서 긴 호흡으로 완성된, 앞으로도 오래 남을 업적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국내 몇 위, 세계 몇 위 성과를 내세운들, 실상은 그렇게 큰소리칠 바 아닌 것이다. 

교육부 감사와 더불어 대학의 진정한 발전에 장애 되는 또 하나 요소가 대학 평가다. 특히 교육부가 주관하는 '기본역량진단'(2015년부터 3년마다 시행)은 정부의 재정지원 및 구조 조정을 도구 삼아 대학의 목을 죄는 평가 제도이다. 총점 100점 만점에서 6개 항목, 13개 지표의 점수로 감점해나가는 '진단' 결과표에 따라 학원의 존폐마저 갈릴 수 있기에, 대학은 평가 대응에 사활을 건다. 대응 업무 최전선에서는 행정직 교원이 뛰고, 그들의 지휘 아래 실무 최전선에서는 교수가 뛴다. 대학의 3년은 평가 대비를 위한 3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대학 운영과 교육 제도는 '역량 개선' 혹은 '체질 개선'의 명목 아래 바뀌고, 획일화되어간다. 

무릇 모든 사물, 모든 제도에는 점검과 보정이 필요한 법이고, 교육도 그런 정비과정을 거침이 당연하다. 교비 운용, 법인·이사회 운영, 재정, 전임 충원율 등과 같은 교육 여건의 '틀'은 외부의 객관적 잣대를 통해 건전성을 확보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 '내용'은 다른 문제이다. 평가 항목 중 '수업 및 교육과정 운영'(29%), '학생지원'(13%), 교육성과(25%)처럼 점수 비중이 높은 영역의 '지표'와 '요소' 중에는 대학 자율권에 속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학 교육의 기본 책무나 성격에 맞지 않는 것들도 많다. 

일례로, 교육부가 제시한 '학습역량지원'(비교과 프로그램) 지침이 대학에 적합한 임무라고는 동의하기 어렵다. "학생의 학습능력 향상을 위하여 전문성을 갖춘 학습역량 지원 조직을 구성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학습역량 강화를 위한 비교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라는 문장부터가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이 지표에 무려 5점이 배점되어 있다. 당연히 대학과 학과는 저마다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꾸려 학생·교수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의 목표란 것이 원래 양질의 '교과(전공+교양) 프로그램' 아니던가? 대학 입시생이라면 이미 일련의 '학습능력' 계발과 평가를 마친 학생들 아니던가? 

시간만 있다면, 100쪽짜리 '대학 기본역량 진단 지침' 자체를 한번 진단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 역시 주기적으로 기본역량 진단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터, 그런 일은 과연 누가 맡아서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공부하는 문학 분야에서 좋은 작품의 기준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에 있다. 무슨 말을 하는가와 어떻게 말하는가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의 감동을 찾아 글 쓰고 읽고 공부한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미학의 문제라기보다 지적 효율성의 문제이며, 진짜 좋은 작가는 절대 쓸데없이 힘 낭비하지 않는다. 대학도 쓸데없는 데 힘 낭비하지 않아야 진짜 좋은 대학이 될 수 있다. 내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대학이 형식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냥 좀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 


김진영 연세대학교·노어노문학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 Mass.) 러시아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슬라브어문학과에서 푸슈킨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술은 <푸슈킨: 러시아 낭만주의를 읽는 열 가지 방법>, <시베리아의 향수: 근대 한국과 러시아 문학, 1896-1946>. 번역서로 <예브게니 오네긴>, <코레야 1903년 가을: 세로솁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공역), <땅위의 돌들>(러시아 현대시선집), Так мало времени для любви(정현종 러시아어 번역시선집) 등이 있다. 푸슈킨 단행본은 러시아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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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 2021-06-18 17:44:32
100% 동의합니다. '생활 세계의 식민화'라는 게 바로 국가기관의 저런 작태를 두고 얘기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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