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숙의 ‘새벽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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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의 ‘새벽 숲’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0.01.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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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의 그림이야기]
▲ 김명숙, 무제_종이에 혼합재료_198x176cm 1991
▲ 김명숙, 무제_종이에 혼합재료_198x176cm 1991

김명숙은 어두운 숲을 그렸다. 숲은 거대한 생태계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컴컴하고 깊은 숲에서 번져 나오는 비릿한 냄새와 부분적으로 밝게 빛나는 햇살이 형언하기 어려운 색채로 파득거리는 숲의 언 한 순간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그것이 무엇이라고, 어떤 느낌이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당연히 그것의 온전한 재현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림이란 말이 그치고 문자가 오그라드는 순간에 부득이 밀고 나온다. 그러니 이 숲은 작가가 경험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가시화하고 기억하고 다시 환생시키기 위한, 그것을 영구히 하고자 한 선택 아래 풀려나온다. 숲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 감각이란 그 모호하고 규정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고자 한다. 하여간 자연은 그 자체로 자존하기 보다는 그것을 보고 느끼고 인문화 하는 작가, 주체의 해석에 의해서만 자리한다.

작가는 새벽 시간에 숲을 찾아가 오랜 시간 앉아서 수목들이 짙고 깊었던 어둠과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는 그 순간을 함께하며 그네들의 숨결과 체취를 느꼈다고 한다. 어두움과 밝음이 공존하고 음과 양이 서로 길항하며 죽음과 삶이 함께 하는 새벽 숲에서 햇살들에 의해 비로소 조금씩 몸을 드러내는 숲을 목도한 체험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경이로움과 충격이었다고 한다. 비로소 신비스러운 어둠과 깊이를 내장하고 있는 숲을 형상화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연의 신비와 영성을 태곳적부터 간직하고 있을 법한 것이 바로 숲이다. 아마도 그 숲이 인간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해있기에 그럴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감성으로는 도저히 포착하기 어려운 생경함으로 자리한 저 완강한 타자를 어떻게든 내 것으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어두운 숲에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저 숲의 타자성이 우리에게 호락호락하게 몸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숲은 어떤 미지의 세계이자 영적인 세계의 원형이며 아울러 모든 생명의 근원, 거대한 자궁이자 도저히 가늠하고 측량할 길 없는 숭고함과 두려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인식이 이 같은 숲을 그리게 했다. 그러니까 작가는 보이는 숲 자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켜나 있다. 오히려 작가는 숲을 매개로 해서 본인이 접한 숲에 대한 이른바 정신적 체험, 영적인 느낌과 수많은 단상들을 온전하게 그림으로 가시화하고자 했다. 그림 속의 숲은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하는 일종의 신성림이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끊임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또한 신성한 숲을 받치는 신전들의 기둥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 있다.

작가는 생명과 혼을 지니고 있는 숲의 신비로운 표정을 그림으로 담아내려 한다. 경질의 재료들인 파스텔, 크레파스, 목탄을 종이 위에 긋고 칠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신과 재료를 부단히 하나로 일치시키면서 그 일을 ‘수행’한다. 이는 마치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세계를 향해 온몸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을 받아주는 종이의 두께는 턱없이 얇다. 그래서 작가의 시도는 다만 그 피부, 종이의 표면에 들러붙어 절망하듯 부딪치고 흩어진다. 그림으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깊음의 세계'를 얇은 종이의 표면 위에 새긴다.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욕망이다. 그러나 작가는 온 힘을 다해 화면에 부딪쳐본다. 육체와 감각으로 문질러진 화면은 피와 상처, 고독, 절망, 날 선 신경들로 참담하다. 그리고 그 장엄한 절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정작 그림이 되었다.

그림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선들은 그대로 자신의 육체와 감성의 혈관들이 되어 얹혀있다. 이 촉각적인 선들, 선들의 촉각성은 다분히 여성적인 감각에 해당한다. 여성들은 대개 시각보다는 촉각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느끼고 인식한다고 한다. 그것은 눈에 의존하는 남성의 망막중심주의로는 근접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여성만의 감각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이 그림은 여성 특유의 촉각으로 빚어낸 생태계이자 자연과 세계의 초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구사한 수많은 선들은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세계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오로지 그어질 뿐이다. 대상의 재현이나 외형의 윤곽을 가까스로 연상시키는 지점에서 멈춰선 선들은 화면 전체를 빼곡히 덮치면서 그 모든 선 하나하나를 되살린다. 이 비현실적인 선들에 의해 우리들은 숲이 지닌 고유한 기운을 만난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 있고 색채는 모노톤에 가깝게 제한되어 있다.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효과는 그림의 일부분에 집중광선을 사용하는 데서 고조된다. 화면 전체를 통제하기도 하고 낱낱의 작은 것들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화면은 긴장감과 신비함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다. 어둡고 습하며 깊고 모호해 보이는 그림들은 멀어져간 것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운명의 비극적인 빛깔과 눅눅한 냄새 같은 것들을 가득 풍긴다.

서늘한 새벽 숲을 그린 이 그림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우주와 함께 호흡하면서 비밀스럽게 제 몸을 여는 신비로운 순간을 형상화 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에 의해 그려진 숲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숲이지만 동시에 자잘한 선들의 집적과 어둠과 빛으로 인해 나누어진, 깊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비현실의 숲이기도 하고 작가만의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의 흔적이 배제되고 오로지 울창한 수목과 숲을 둘러싼 기묘한 기운과 비릿한 내음만이 자리한 그런 풍경이다. 이처럼 두려움과 숭고함을 은연중에 부추겨주는 숲의 육체는 타자의 몸이다. 우리들의 육체(특히 남성의 육체)와 너무 먼 그 숲은 경이롭고 모호한, 측정하기 어려운 판독 불가능한, 난해한 모습이다. 이 숲 풍경은 자연주의적인 그림이나 사실주의에 가 닿지 않고 미끄러지면서 일종의 생태적 세계관을, 여성만의 육체적 감각과 시선으로 잉태된 자연을 가시화한다. 작가의 그림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시선을 배제시키고 신이 지배하는 목적론적 시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더듬어 가면서 숲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그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육체가 실은 그 같은 숲이 아니겠는가라는 인식이 그림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와 자연(숲)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시도는 아마도 작가가 꿈꾸는 현실을 만나고 세계를 재현하려는 작가만의 방식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치열하게 그려진 화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되었다. 얇디얇은 종이의 표면, 너무나 예민한 거죽은 어둠과 빛으로 둘러쳐진 세상의 끝처럼 깊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세상의 자궁 같은 눅눅하고 무한한 그곳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특유의 힘이 있어서 그것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음이고, 어둠과 신비를 간직한 생명의 산실인 숲의 진실한 몸으로 유인한다. 또한 파열음으로 갈라지고 쪼개지며 날카롭게 부서지는 그림 속의 빛, 선들은 그 어둠과 심연에 구멍을 내준다. 보는 이들은 그 빛에 의해 의식 저편으로 나간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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