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극’이 아닌 ‘수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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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이 아닌 ‘수행’으로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1.06.0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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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그레이트 코멧>공연 사진 (쇼노트 제공)

어떤 예술이든지 하나의 형식에 갇히게 되면 쇠퇴하기 마련이다. 미적인 쇠퇴는 장르 자체의 쇠퇴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문화의 장 안에서 도태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뮤지컬도 다를 바 없다. 대중문화는 특정 양식으로의 쏠림 현상을 쉽게 보여줌과 동시에 동시대 대중들의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해야 한다는 예민한 촉수를 갖고 있다. 

뮤지컬의 역사는 음악과 드라마의 결합 방식에 대한 실험이 장르의 지속과 확장을 견인해 왔음을 증명한다. 뮤지컬로 만들어질 수 있는 드라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에 맞는 음악의 종류와 스타일이 적용되고 증명되면서 뮤지컬은 다양한 하위 장르와 문법들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관객의 능동적 수행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려는 동시대 공연의 흐름을 참고하고 상업적으로 흡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영미권에 <나타샤와 피에르, 그리고 1812년 혜성>(미국, 2012)과 <위대한 개츠비>(영국, 2017)가 있다면 국내에는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2017), <꾿빠이, 이상>(2017)이 있다. 아직 매우 제한적이지만 ‘이머시브’ 공연의 개념을 뮤지컬로 실험하고 프로시니엄 너머 관객의 능동성을 자극하려는 지향이 발견된다.

공연 사진_정은지, 케이윌 (쇼노트 제공)

따라서 현재 처한 코로나 상황은 무대와 객석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무화시키거나 가깝게 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최근 공연을 완료한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원작 레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작곡·작사·대본·편곡 데이브 말로이, 제작 쇼노트, 연출 김동연, 음악감독 김문정, 2021. 3.20-5.30, 유니버설아트센터)이 주목되는 이유다. <그레이트 코멧>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타샤와 피에르, 그리고 1812년 혜성>의 대본과 음악의 판권만 체결하여 논 레플리카 방식으로 공연된 국내 재창작 버전의 뮤지컬이다. 

무대 전경 (쇼노트 제공)

<그레이트 코멧>의 핵심은 무대에 있다. 이 작품은 레이첼 챠브킨 연출로 오프 브로드웨이의 작은 극장 알스 노바(Ars Nova)에서 시작되었다. 벽을 붉은 천으로 휘감고 객석을 술집 테이블처럼 만들어 무대 전체를 마치 러시아의 작은 술집처럼 꾸몄다. 무대와 객석이 물리적으로 전혀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들은 관객의 바로 옆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대화하고 춤추며 공연을 펼쳤다. 관객은 19세기 러시아 술집에서 얽히고설킨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 한 복판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새로운 형태의 관극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공연은 천막 극장, A.R.T(American Repertory Theatre)의 로브 드라마 센터, 그리고 2016년 브로드웨이의 임페리얼 극장까지 점차 규모를 확장했으나 프로시니엄 무대를 벗어나 객석과 무대가 같은 장소성을 갖는 핵심 콘셉트를 유지하며 초연의 아이디어를 지속시켰다. 타임스퀘어에 천막 극장을 지어 공연을 위한 극장 환경을 조성하거나, 1,424석을 보유한 임페리얼 극장의 200석 정도를 뜯어내고 1층과 2층 사이에 계단을 놓아 무대와 관객을 밀착시키려는 무대 공사는 공연 자체가 특정 장소와 긴밀하게 연관된 ‘장소특정적’ 지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내 버전의 무대는 혜성(comet)을 시각화한 임페리얼 극장의 무대 바닥 콘셉트를 응용하여, 원형의 틀이 바닥과 천장을 혜성의 궤도처럼 이리저리 둘러싼 형태로 탄생되었다. 무대의 상하수 업 스테이지에 위치한 궤도 안에 객석 일부를 놓아 브로드웨이 초연의 콘셉트를 응용한 점, 1,082석을 보유한 고풍스러운 느낌의 유니버설아트센터 전체를 러시아 오페라 극장으로 상정함으로써 장소특정적 지향성을 유지하려는 시도 역시 흥미로웠다.

나타샤_이해나 / 피에르_홍광호 / 아나톨_박강현 (쇼노트 제공)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무대와, 관객과 밀착시키는 연출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음악의 새로움과 연동되어 있다. 데이브 말로이의 음악은 작품의 시작이며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이다. 뮤지컬은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 중 2장 5부만을 취해 드라마 구조를 만들었는데, 소설의 해당 부분을 ‘성스루(sung-through) 방식’으로 사진 찍듯 그대로 옮겨 놓았다. 원작을 그대로 담아낸 것은 무대의 미장센이 아니라 ‘음악’이다. 전쟁에 나간 안드레이와 약혼 상태에 있는 나타샤가 결혼 준비를 진전시키기 위해 친구이자 사촌인 소냐, 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에 오고, 피에르는 부인 엘렌의 방탕함에 지쳐 삶의 허무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부터 작품은 시작한다. 작품의 주요 드라마는 난봉꾼 아나톨이 이미 결혼한 처지임에도 나타샤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하여 야반도주하려다 좌절되고, 나타샤 역시 안드레이와의 약혼을 단독으로 파기하고 아나톨을 따라나서려다 실패하여 결국 윤리적 결함을 갖게 되는 상황을 다룬다. 나타샤와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냈던 피에르는 서자로서 배주호프 백작의 상속인이 된 후,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바실리 공작 가문과 갈등하기도 하지만 벌어진 사건을 중재하고 정리하는 입장에 놓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타샤 역시 특유의 활기와 명랑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받지만 정작 안드레이의 아버지 불콘스키 공작과 여동생 마리아(뮤지컬에서는 나타샤의 대모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아흐로시모바와 구별하기 위해 마리라고 명명함)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거절당하는 경험을 한다. 

아나톨_이충주  /   피에르_케이윌 (쇼노트 제공)

뮤지컬은 이와 같은 소설의 서사를 ‘직관적’인 음악으로 바꿔 놓았다. 이 작품에 러시아 전통 클래식풍의 음악을 포함하여 팝, 일렉트로닉 팝, 클래식, 록, 힙합이 다양하게 쓰인 이유다. 벨칸토 창법으로 불러야 하는 유려한 멜로디와 아름다운 화성은 <그레이트 코멧>의 관심사가 아니며, 드라마의 결과 진행 방식 그리고 인물의 정서 상태가 장면에 맞는 음악 스타일을 다양하게 결정했다. 가령, 서로를 싫어하는 나타샤와 마리의 듀엣에는 과감한 불협화음이 적용되어 있으며 아나톨의 넘버는 일렉트로닉 팝으로 섹시하게 일관되어 있다. 뮤지컬 넘버에 가장 많이 쓰이는 하향 진행 코드라든지 AABA 송 폼 대신 인물의 상황과 생각, 행동이 필요한 만큼의 전조와 변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을 여닫는 피에르의 넘버는 가장 익숙한 스타일의 뮤지컬적 음악으로 작곡되어 있어 실험의 수위를 조절하고 테마를 강조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인물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여 서술적 화자가 되기도 하고 곧바로 다시 인물이 되기도 하며 소설의 서술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문장을 ‘음악적’으로 감지하고 전체를 음악적 질서로 재편한 데이브 말로이의 아이디어는 결국 관객이 인물과 극적 사건을 함께 체험하고 때로는 함께 만들어가게 하는 지도를 제공한 셈이다. 

공연사진_홍광호 외 (쇼노트 제공)

국내 공연의 아쉬움은 이런 ‘체험’이 불가능했다는 것, 다시 말해 공연의 핵심이 완전히 경험되기 어려웠다는 점에 있다. 대규모의 극장 공사를 진행했음에도 근본적으로 객석과 무대가 뒤섞이기 어려운 극장 조건, 코로나로 인해 밀착도를 낮춰야 했던 상황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 아래에서 소설과 음악을 직관적으로 연동시킨 공연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객석에 명확히 전달되기 어려웠다는 것, 따라서 결국 공연을 반복 관람하며 나름의 이해를 높이는 팬들의 관극 문화에 향유의 맥락이 놓였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관극을 넘어선 관객의 수행에 토대를 둔 새로운 체험이 가능한 뮤지컬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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