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이라면 싫어할 책 『짧고 굵게 읽는 러시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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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이라면 싫어할 책 『짧고 굵게 읽는 러시아 역사』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1.06.06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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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나는 러시아어를 전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러시아 역사를 접했다. 학부생 때는 러시아 역사가 9세기가 되어서나 출발한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역사에 익숙해 있던 내게 로마노프 왕조니 소비에트 연방이니 등등으로 세계사에서의 족적이 그토록 뚜렷한 러시아가 통일신라 말기에나 등장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직접 만난 러시아는 이미 소련 붕괴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의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어학 교과서부터 문학이나 영화 작품에 이르기까지 영광스러운 과거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사방에서 넘쳐흘렀다.

이 책은 영국인이 쓴 러시아 역사이다.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번역 일을 하고 있는 덕분에 이 책과 인연이 닿아 번역하면서 참으로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인이 아닌 저자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바라보는 역사책이므로 지금껏 읽어온 ‘러시아에 의한’ 러시아 역사와 여러모로 달랐던 것이다.

러시아 역사의 시작점인 바이킹 통치자가 들어오는 과정부터 그랬다. 기존 역사책들은 슬라브 민족들이 외부 통치자를 초청했다고 쓰지만 이 책은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라고 일갈한다. 바이킹 전사에게 정복당한 사건을 훗날 미화했다는 것이다. ‘타타르의 멍에’라는 이름을 붙여 고난의 시기로 분류되는 몽골 지배 또한 실제 상황보다 훨씬 과장된 것이라 설명한다. 당시 러시아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공후들은 몽골 지배에 저항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정을 받아내 내부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누리려 했다는 것이다. 부역에 앞장서던 도시 모스크바를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 변화시킨 것 역시 훗날 만들어진 역사이고 말이다.

저자가 잡아낸 러시아 역사의 키워드는 결국 ‘편집’이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과거의 역사를 바꾸고 미화해온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항하는 존재로 러시아를 자리매김하려는 지금의 푸틴 정권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어느 나라의 역사든 편집 과정을 거칠 것이다. 치욕으로 점철된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거나 적당히 미화할 테고 자랑스러운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끄집어내고 과장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러시아의 경우 그 정도가 평균을 훨씬 넘어섰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는 지역적 경계도, 단일한 민족도, 중심이 되는 분명한 정체성도 없는 나라>(8쪽),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다는 건 모두에게 늘 ‘남’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유럽은 러시아를 아시아로, 반면 아시아는 러시아를 유럽으로 보았다.>(9쪽)라는 표현들이 단서를 제공한다. 러시아는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고 그리하여 계속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반 4세,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니콜라이 1세, 스탈린, 푸틴으로 흘러가는 러시아 역사는 통치자가 결정하고 이에 민중이 순응하도록 하는 방식이라는 면이 공통적이다. 통치자만이 뛰어나고 현명한 존재일 뿐 그 아래는 모두 부패하고 무지몽매하므로 전제군주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러시아가 강대국의 반열에 들게끔 애쓰면서 서구 과학기술이나 문화를 도입했던 황제나 지도자들이 그 열매를 맺게 한 사회적·정치적·법적 맥락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그리하여 허울뿐인 개혁이 반복되었던 까닭도 여기 있다. 

대체 어째서 푸틴이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답할 가능성 하나를 제시한다. 러시아는 전제군주의 통치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슬픈 역사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전제군주가 편집해 제시하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사는 세월이 어느새 천년을 넘어서 버렸다고.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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