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균열과 상처의 동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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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균열과 상처의 동질성
  • 이정현 한국외국어대·현대문학
  • 승인 2021.05.3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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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 (이정현 지음, 삶창, 408쪽, 2021.04)

기억은 언제나 편파적이다. 기억은 ‘보존’과 ‘변형’이라는 모순적인 속성을 지닌다. 같은 시공간에서 동일한 경험을 했더라도 주체가 기억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그런데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는 내부의 결속을 다지려는 목적으로 공통된 기억을 추구한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7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과 북은 한국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냉전을 거치면서 전쟁의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전승되었고, 남과 북의 이질감은 해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기억은 ‘이야기’와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한국 문학에서 전쟁과 분단을 다룬 문학 텍스트들은 ‘분단문학’이라는 영역을 형성할 정도로 많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우리의 비극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이 실제 충돌로 이어진 첫 번째 사건이었고, 여러 국가가 연루된 국제전이었다. 『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는 한국전쟁에 연루된 국가들의 문학 텍스트에 한국전쟁이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를 연구한 저서다. 일본의 항복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한국전쟁이 촉발된 시발점이 되었기에 먼저 일본의 텍스트를 다루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태평양 전쟁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섰다. 전쟁 특수로 경제가 되살아났고, 미국이 주도한 냉전 질서에 합류했다. 그 결과 재무장의 길이 열렸고 전후 책임 문제가 희석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식인들은 달러의 유혹에 빠져 역사를 망각하는 일본의 행로를 불길하게 응시했다. 훗타 요시에의 소설 「광장의 고독」,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세븐틴」, 「후퇴청년연구소」 등은 당시 일본 청년들의 내면이 진솔하게 그려진 텍스트다. 달러의 홍수 속에 타자의 비극에 무감각해지는 일본의 행태는 베트남전쟁에서도 반복되었다. 일본의 지식인과 작가들, 대학생들은 일본의 망각을 비판했지만, 그 목소리는 냉전질서가 견고해지면서 힘을 잃었다. 또한 오키나와 작가 마타요시 에이키, 오시로 다쓰히로의 소설과 일본에 귀화한 조선 작가 김시종의 시와 장혁주의 소설을 다루면서 전후 일본의 멘털리티 형성과 한국전쟁의 관계를 다룬다. 

한국전쟁은 중·일 전쟁과 함께 중국의 가장 중요한 집단 기억이다. 1949년 10월 대륙을 석권한 마오쩌둥은 타이완을 점령하고자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제7함대를 파견하여 중국의 타이완 점령을 막았다. UN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중국군은 참전을 결정한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으로 명명한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맞섰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기억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군의 2/3가 타이완행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역린과도 같다. 이 책에서는 중국군 포로가 등장하는 소설을 다루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기억에서 배제된 중국인들의 모습을 응시한다. 중국계 미국 작가 하진의 『전쟁 쓰레기』는 거제도에 수용된 중국군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의 구성은 한국의 대표적인 분단소설인 『광장』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질린 주인공 ‘유안’은 중국과 타이완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고뇌에 빠진다. 중립국을 택한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과는 달리 ‘유안’은 중국으로 돌아가지만,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장아이링의 소설 『적지지련』에는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한국전쟁에 자원하는 병사가 등장한다. 두 소설은 모두 중국에서 지금까지 금서로 남아있다. 최근 제작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화하면서 중국군을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Ⅲ장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미국 사회를 강타한 매카시즘을 그린 소설을 다루었다. 필립 로스의 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와 닥터 로의 소설 『다니엘 서』(1971)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매카시즘에 장악된 미국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2008)은 1950년에 스무 살을 맞이한 청년 마커스의 성장기와 한국전쟁을 병렬적으로 배치하여 한국전쟁이 당시 미국 청년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작가 제임스 셜터의 소설 『사냥꾼들』(1956)은 지상이 아닌 공중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미군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소설에는 일본으로 휴가를 간 미군과 그들을 상대하는 일본 여성의 모습이 짧게 묘사되는데 냉전 체제 아래 전개된 성 노동의 현실을 드러내는 문제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밖에 ‘노근리 사건’을 소재로 다룬 제인 앤 필립스의 소설  『Lark & Termite』, 미국 인종 문제와 한국전의 비극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토니 모리슨의 소설 『Home』을 다루었으며 재미 교포 2세 작가 이창래의 소설 『생존자』와 3세 작가 폴 윤의 『Snow Hunters』를 살펴보았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많은 탓에 직접 번역하는 품을 들여야 했다. 

Ⅳ장에서는 유럽 국가들과 콜롬비아가 겪은 한국전쟁을 다루었다. 한국전쟁 발발의 책임 문제를 두고 대립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논쟁, 중국군의 포로로 잡힌 영국군 장교의 회고록, 한국전쟁으로 격화된 냉전의 질서 속에서 재무장의 발판을 마련한 서독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또한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위탁하게 된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의 상황과 북한과의 유대관계를 다루었다. 

그리고 특히 중요하게 응시한 텍스트는 2015년 국내에 번역·출간된 콜롬비아 작가 모레노 두란(R. H. Moreno-Duran)의 소설 『맘브루』다. 소설의 주인공 역사학자 ‘비나스코’는 1986년, 한국전쟁 참전국 행사에 참석하는 정부사절단에 합류해 한국을 방문한다. 비나스코는 한국전쟁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웠던 병사들을 수소문해서 그들을 인터뷰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기 위해서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비나스코의 아버지는 미국의회의 무공훈장까지 받은 콜롬비아의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렇지만 비나스코는 참전병들을 인터뷰하면서 과거 콜롬비아 군사정권의 무모한 파병 결정을 비판하는 활동을 지속한다. 콜롬비아 고위 관료들과 한국전쟁 참전 경력을 발판으로 출세한 군인들은 참전병들의 경험담을 수집하는 비나스코의 활동을 방해한다. 그러나 비나스코는 굴하지 않고 증언들을 수집하며 ‘언어와 기억의 퍼즐’을 맞춰나간다. 소설에 묘사된 콜롬비아 청년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불편한 기시감(旣視感)을 선사한다. 그들의 모습은 베트남으로 향했던 한국의 청년들과 너무도 닮았다. 그들은 국가의 기억에서 줄곧 소외되거나 왜곡되었다. 그들은 단지 ‘자유를 지킨 십자군’의 이미지로만 박제되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 한국전쟁에 연루된 여러 국가들의 기록을 다루었지만 일정 부분 ‘누락’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주요 참전국인 터키를 다루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터키의 한국전쟁 관련 문학 텍스트는 아직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고, 영화 《아일라》(2017)가 국내에 소개된 정도다. 앞으로 많은 텍스트가 국내에 소개되길 기대한다. 그리스와 에디오피아의 경우 국방홍보원에서 참전국들의 활동을 정리한 홍보자료가 유일하다. 지난 2019년에는 스웨덴과 대한민국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전쟁 당시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한국전과 스웨덴 사람들>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은 언제나 엇갈리고 기억의 균열은 피할 수 없다. 연구의 시발점이 된 것은 『맘브루』를 비롯한 몇 편의 소설이었다. 한국전쟁에 동원될 물자를 선적한 수송선이 가득한 항구를 보면서 씁쓸함을 느끼는 『광장의 고독』의 주인공 ‘기가키’, 본토행과 타이완행을 고민하는 『전쟁 쓰레기』의 주인공 ‘유안’, 국가가 만든 영웅담에 가려진 진실을 찾는 『맘브루』의 주인공 ‘비나스코’의 모습은 타자가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전쟁의 기억은 정치적인 입지 강화의 수단이 되거나 냉전적 사고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적대적인 기억 투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전쟁의 기억은 계속 악몽으로 남을 것이다. 타자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가 그리 다르지 않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타자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한국전쟁에서 휘말렸던 타자의 상처와 그들의 텍스트를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응시해야 하는 이유다. 


이정현 한국외국어대·현대문학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었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서 『인간 신해철과 넥스트시티』, 『키워드로 읽는 2000년대 문학』이 있다. ‘전쟁(재난)과 인간’, ‘집단의 기억에서 누락된 자들의 목소리’, ‘냉전시대의 갈등과 문화사’,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 ‘1990년대의 상처와 기억’이 주요 관심사다. 중앙대학교, 가천대학교, 선문대학교, 협성대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비평과 정신분석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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