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기 묻어나는 강릉…평등과 호민을 꿈꾼 허균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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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기 묻어나는 강릉…평등과 호민을 꿈꾼 허균의 고향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3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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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강릉, 허균에 관하여
강릉 사천 바닷가의 교문암. 바위에는 영락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옛날 교산(蛟山)의 구릉과 사천(沙川)의 물길이 나란히 바다로 들어가는 백사장에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 밑에는 늙은 교룡이 엎드려 있었는데, 어느 날 교룡은 바위를 깨뜨리고 떠났다. 깨어진 바위의 모양이 문과 같으니 사람들은 이를 교문암(蛟門岩)이라 불렀다. 8년 뒤, 교산 자락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허균(許筠)이다. 허균은 그 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교산이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외가인 애일당(愛日堂)이다. 애일(愛日)은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세월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효자가 부모를 오래 모시고 싶은 마음을 비유한 말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경상감사 허엽, 어머니는 강릉김씨로 허균은 5남매 중 막내였다. 큰누이와 큰형 허성은 전처의 소생이었고, 작은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은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이들 남매간의 우애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허균의 태를 묻었다는 애일당 터에 그가 40세를 전후해 썼다는 ‘누실명’이 새겨진 교산시비가 있다.

허균은 임진왜란 당시 외조부 별세 후 33년간 방치된 애일당을 고쳐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오대산 줄기인 교산 기슭에 있었던 애일당은 현재 덩그러니 터만 남아 있다. 옛날에는 시야가 탁 트여 사천 바다가 내다보였다는데, 지금은 사방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 땅을 감춘다. 그곳에 교산의 시 '누실명(陋室銘)'을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 나에게는 / 신선의 세계인 저.’ 사천 해변에 있는 교문암에는 영락대(永樂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강릉 사천의 교산. 야트막하지만 구불구불 뻗은 산세가 이무기가 기어가는 모습을 닮았다.

태어난 곳은 애일당이지만 그가 자란 곳은 남쪽으로 16㎞가량 떨어져 있는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다. 허균은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유성룡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허균은 무엇이든지 한 번 들으면 기억했고, 당시(唐詩) 수백 수를 며칠 만에 줄줄 외웠다. 사람들은 허균을 신동이나 천재라 하기보다는 ‘귀신의 정(精)’이나 ‘도깨비의 화신’이라 했다. 훗날 조선 후기의 사상가 동주 이민구는 그에 대해 ‘재주가 펄펄 날리고 총명하기가 누구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라 했고, 순암 안정복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다’라고 했다. 명나라의 문장가 이정기는 ‘그의 글은 물굽이가 부드럽게 흐르는 모양과 같고, 그의 시는 심오하고 미묘하며 화려하여 화천의 정취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총명했던 허균의 사상과 학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이는 스승 이달이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릴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의 제약으로 술과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허균은 불합리한 사회구조 때문에 재능과 큰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스승을 가슴 아파했다. 

강릉 초당동의 솔숲. 숲은 허균이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허난설헌 생가를 둘러싸고 있다. 
초당동 허난설헌 생가 앞에 위치한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허난설헌 생가는 드넓은 경포호 아래 아름드리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일대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이다. 고택 앞에는 허엽, 허성, 허봉, 난설헌 허초희, 그리고 허균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은 우리 한문학사에서 ‘허씨 5문장’으로 문명을 떨쳤다. 허균은 언제나 고향집을 그리워했다. 그는 ‘내 집은 경포호의 서쪽’이라 했다. 그는 서얼출신의 많은 벗들을 사귀었고 일생동안 진심으로 아꼈다. 그는 때와 장소 없이 주색 방탕하였으나 그에 대해 숨김이나 거짓이 없었다. 부안 기생 매창과는 죽을 때까지 문학적 정신적 동지였다. 그는 장차 책벌레가 되겠다고 할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유, 불, 선은 물론 천주교에 이르기까지 독서의 영역에는 제한이 없었다. 

허균은 언제나 고향집을 그리워했다. 그는 ‘내 집은 경포호의 서쪽’이라 썼다. 

명문가의 막내 도련님으로 자라서일까, 그는 자유분방했다. 큰 바다와 큰 호수와 곧고 울창한 솔숲을 보며 자라서일까, 그는 ‘기교 술수 부릴 줄 모르고 아첨 아양 부릴 줄 모르며 권세가에 발 들이면 발꿈치가 욱신욱신, 고관에게 공손히 인사하려면 기둥이 박혔나 허리가 꼿꼿’했다. 이러한 기질과 행동으로 인해 그의 생은 순탄치 못했다. 허균은 관직생활 동안 3번의 유배와 6번의 파직을 거듭했다. 황해도도사 시절에는 기생들을 관아에 끌어들여 파직되었고, 수안군수 때는 부처를 받들고 토호를 함부로 다루었다고  파직되었다. 삼척부사로 부임했을 때는 두 달 만에 파직되었는데 불상을 모시고 불경을 읽었다는 이유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예교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 부침을 오직 정에 맡길 뿐 /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 나는 내 삶을 살아가리니.’ 

허엽, 허성, 허봉, 난설헌 허초희, 그리고 허균의 시비. 이들은 우리 한문학사에서 ‘허씨 5문장’으로 문명을 떨쳤다.

허균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것은 1611년 전라도 함열에서의 유배가 풀렸을 때다. 소설에는 그의 사상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서얼이라 해서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란 ‘유재론’, 기구와 관료를 줄여 국고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관론’,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호민론’. 결국 허균은 역모죄로 1618년 처형되었다. 사지가 찢기는 형벌이었다. 그가 죽은 뒤 광해군은 반교문을 내렸다.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그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니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죄인을 잡아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그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그리고 조선은 그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의 핵심 사상은 평등과 호민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었다. 오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이루기 어려운 꿈을 그는 일찍 꾸었다. 우리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시대의 아웃사이더였고 미완의 혁명가이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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