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정치 이론이 품어온 유구한 남성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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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 이론이 품어온 유구한 남성됨의 역사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1.05.3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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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됨과 정치: 서구 정치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적 독해 | 웬디 브라운 지음 | 황미요조 옮김 | 정희진 감수 | 나무연필 | 480쪽

서구 정치 이론이 품어온 유구한 남성됨의 역사, 지난한 배제를 넘어서 그 구조와 실제를 탐색하는 책이다. 저자는 페미니즘 연구의 첫 여정이 전통적 학문에서 여성을 지우거나 터무니없게 묘사하던 것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데서 그 삭제와 묘사를 바로잡는 데로 이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 여정은 그렇게 여성을 복원해낸 관점으로 세계를 비판적으로 따져보면서 기존 담론, 규율, 제도, 실천의 젠더화된 특질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녀가 남성됨과 정치를 다루는 것은 이 두 번째 여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후 저자는 서구 정치사상의 한가운데 있는 세 명의 대표적인 정치 이론가를 호출해 무대 위에 올린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막스 베버가 바로 그들이다. 저자는 남성성의 의미를 정형화된 무언가로 미리 전제하거나 규정하지 않으면서 이들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려 했는지를 각기 규명해 나간다. 이들이 어떤 의도와 방식으로 세계를 만들어 가려 했는지 정밀하게 실증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를 생존의 영역과 떼어놓으면서 인간, 즉 남성을 고귀한 선의 자리로 밀어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그렇게 구축된 폴리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에 의존적이거나 기생하는 무엇이다. 여기에서 피어나는 정치란 자신을 지탱하는 활동을 폄하하고 배제하면서 삶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또한 생존의 영역에 있으면서 폴리스 바깥으로 밀려나버린 여성이나 노예는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정신마저도 남성에게 내맡기게 된다. 지배와 착취의 정치는 이렇게 자리 잡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에 만연했던 치열한 경쟁에 철학적 기반을 부여했음을 발견한다. 이때의 경쟁은 단순히 뛰어남을 드러내거나 유용한 행위라기보다는 상대방을 명명백백하게 꺾음으로써 영광의 무대에 오를 때 드러난다. 실제 삶과 괴리된, 그리하여 불안한 남성적 존재감은 경쟁, 좀더 정확히 말하면 경쟁을 통한 동료들의 인정을 통해 다독여진다. 그러나 이는 한 번으로는 도저히 만족되지 않는 것이다. 영원한 승리를 바란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꿈꿀 수 없는 불멸을 바라는 것 아닐까. 진정 그러하다면, 이러한 존재란 그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고매한 본성을 추구하는 것을 뒤로한 채 교활할지언정 강력한 군주를 바랐던 마키아벨리는 어떠할까. 그리스 시대에 아랫자리에 놓여 있던 육체는 마키아벨리에 이르면 정치와 통합된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본능적인 것이다. 그것은 미학적 이상이 아니라 삶 자체다.

그러나 정치가 탈신비화되어 지상으로 끌어내려졌을지언정,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야심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스스로 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이를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려는 충동, 그것을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질로 본다. 이때 정치는 그 자체의 명분, 영광, 남성됨과 자유를 위해 스스로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된다.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품은 인간은 그렇게 전투에 휘말리며 자신과 주변 환경에서 소외되어버린다.

또한 이러한 정치의 정식화는 결국 육체, 욕망 등을 철저히 젠더화해 구성한다. 가령 ‘포르투나’로 표상되는 여성적 힘은 불가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자연과 연관된 신비로운 것이지만 유혹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실패를 자아내는 것이고,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인간에 맞서는 힘이다.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지상에 발 딛고 있는, 영광스럽지도 않고 강력하지도 않은 생명체다. 그는 많은 것을 열망하지만 자신과 자기 환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욕망하면서도 위엄을 갖추거나 성공하지는 못한 존재다. 정치는 이러한 인간을 발전시키지만, 결함투성이 인간에게는 새로운 투쟁의 무대가 펼쳐진다. 끊임없이 분투하면서 지배하고자 하며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치열하게 싸우지만 그럴수록 미지의 적들에 휩싸여 영원한 긴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존재.

원서 & 저자 웬디 브라운

그렇다면 인간을 자연에서 구하기 위해 탄생한 합리성이 인간을 기계로 예속화하고, 사회는 관료주의 집단이라는 분쇄기에 갈려 나가는 비극을 묘파해낸 베버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러한 근대에 도래한 것은 경쟁을 통해 자기 몫의 영광과 불멸성을 찾아 헤매던 그리스의 인간이나 도시가 아니라 민족국가다. 또한 사회적 삶을 자동적으로 조직하는 능력 때문에 베버에게 감탄과 개탄을 동시에 끌어낸 자본주의 체제다.

그 가운데서 베버는 매우 진지하게 카리스마적 영웅인 정치가를 꿈꾼다. 베버가 고안해낸 정치 영웅은 근대의 특정한 실패 지점과 맞서 싸우면서 합리화 시대에 가능한 위대함으로 국민들을 이끌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웅은 궁극적으로 괴물과 같다. 그는 고전적 남성됨의 망토를 두른 채 막강한 근대 국민국가의 힘을 행사한다. 게다가 이 영웅은 자기 권력을 주장할 때는 관료제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지 않은 채 그것을 경유해야만 한다. 즉 남성적 통제와 지배에서 비롯한 합리화된 정치적·경제적 삶을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따라 그것을 동원하려고 한다.

권력을 원하되 자기만을 위한 권력이 아닌 것을 바라는 인간. 베버가 말하는 참된 정치가는 정치를 소명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권력 충동을 품고서 권력의 근대적 도구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베버는 진정한 정치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것은 이처럼 양가적인 아이러니를 품은 인간이다. 게다가 이 전망은 음울하게 이어진다. 베버는 대부분의 경우 관료제 국가에서 카리스마가 발흥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저자가 분석하는 남성됨이란 생물학적 남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가 기대고 있는 젠더라는 렌즈는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주된 규범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내딛으려는 그다음 걸음은 남성 자체가 아니라 제도화된 남성됨을 해체하는 것, 정치 자체가 아니라 소외된 남성의 정치를 삶과 인간에 대한 기획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즉 관습으로 구성된 남성됨과 결별하는 정치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이전까지 이어져온 페미니즘의 시도들을 간략하게나마 날카롭게 벼리며 비판적으로 분석한 뒤 조심스레 대안적 방향을 제시한다. 남성됨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삶의 토대와 필요를 다뤄내면서 그 가운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경계를 부정하고 부수는 것을 넘어서 경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체성과 안정성에 위기를 불어넣는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남성적 특성으로 여겨지는 협의의 용기가 가진 단순함을 뛰어넘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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