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명문서 ‘고신(告身)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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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명문서 ‘고신(告身)의 숨겨진 이야기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1.05.2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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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전시]
- 202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획전 ‘고신(告身), 조선시대의 임명문서 읽기’ 개최
- 중국부터 조선까지 ‘고신’ 문서를 통해 동아시아의 통치시스템과 문화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우)은 장서각과 타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신’을 중심으로 관련 문헌 자료를 모아 2021년 장서각 기획전 ‘고신(告身), 조선시대의 임명문서 읽기’를 개최한다. 고신(告身)은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을 말한다. 

고신은 4품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에게는 교지(敎旨) 형식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왕의 어보인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어 관교를 발급하는 형식과 5품에서 9품 관원에게는 왕의 명을 받아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임명하는 형식이 있다. 

이 전시는 중국에서부터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식의 ‘고신’이 정립되기까지 문서 양식, 문서의 작성자, 문서를 작성한 서체, 문서에 찍힌 보인(寶印) 등을 통해 문서를 분석하여, 조선시대 고신의 양식적 기원을 밝혔다. 

○ 제Ⅰ부 ‘양식(樣式)’에서는 중국 당나라 때 완성된 율령 가운데 행정 문서의 양식인 공식령(公式令)이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본다. 건중 3년(782) ‘주거천(朱巨川) 칙수고신(勅授告身)’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관직을 받은 고려 경종 즉위년(975)의 ‘김부(金傅) 고신’에, 그리고 당의 제수고신(制授告身)이 고려 고종 3년(1216) ‘혜심(慧諶) 고신’에 영향을 미쳤다. 원나라의 간략한 문서 양식을 받아 팍빠 문자로 작성된 원통 2년(1334) ‘이달한(李達漢) 선명(宣命, 원나라의 고신 명칭)’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이다. 이후 조선시대의 고신은 전대의 양식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여 『경국대전』에 반영되었다.
 
○ 제Ⅱ부 ‘작성자(作成者)’에서는 임명문서의 작성자에 대한 오랜 오해를 풀어준다. 태조 4년(1395)에 작성된 ‘강순룡(康舜龍) 왕지(王旨)’는 강순룡의 후손이 이를 태조 이성계의 친필이라 하여 영조(英祖)에게 바쳤고, 영조는 이를 어필(御筆)로 여겨 모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신은 이조(吏曹)의 영사(令史)가 작성하도록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전통시대 인물들의 오해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임을 밝혔다.

○ 제Ⅲ부 ‘서체(書體)’에서는 임명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된 서체를 조망한다. 우리나라의 임명문서는 행서(行書)→초서(草書)→해서(楷書)로 서체가 변화하였다. 그 가운데 왕희지의 행서와 해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 등에 영향 받은 고신과 관련 문헌을 제시하여 아름다운 서체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제Ⅳ부 ‘보인(寶印)’에서는 고신에 찍혀진 도장들을 살펴본다. 중국에서 유래한 보인은 진시황 이후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고, 당나라 때 8보로 정비되어 용도에 따라 다른 보인을 답인하였다. 조선시대 고신에 안보된 ‘시명지보(施命之寶)’에 이르기까지 어떤 보인들이 고신에 사용되었는지 다양한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전시의 주 자료가 온전히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문헌이고, 텍스트에 투영된 역사적 맥락과 인문학적 코드를 해명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보는 방식’에 ‘읽는 방식’을 상당 부분 가미한 장서각의 독창적인 전시이다. 

전시의 도록은 한국학 연구에 직접 활용되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문헌과 문헌의 텍스트 원문과 그것을 탈초한 석문(釋文)을 모두 수록했다.

출품 자료는 약 20점이며, 일부는 원본 대신 유물을 복제한 사진이다. 하은미 한중연 연구원은 전시에 대해 "고신을 통해 동아시아 통치 시스템과 문화사를 조명하고자 했다"며 "고신에 얽힌 역사적 맥락과 인문학적 코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5월 31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하며, 코로나바이러스-19 예방을 위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www.aks.ac.kr)을 통해 사전예약제로 관람할 수 있다. 

● 전시회 개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수많은 종류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고, 이를 연구하고 있다. 이 고문서 가운데 특별히 조선시대의 임명문서인 ‘고신告身’을 2021년 기획전의 전시 주제로 선정했다. 낱장 문서에 지나지 않는 ‘고신’은 얼핏 보면 단순한 임명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하게 보이는 이 문서에 들어있는 여러 요소를 조감하면 문헌학과 역사학의 기초는 물론, 나아가 동아시아의 율령律令이라는 커다란 빙산氷山과 조우하게 된다.

‘고신’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통치시스템 중 하나인 율령과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위계를 표상하는 기호들이 가득하다. 이를 학술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이번 ‘고신’ 기획전은 양식樣式, 작성자作成者, 서체書體, 보인寶印 등 네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전시를 꾸몄다.

 

< 주요 자료 >

■ 조선 선조 28년(1595) 박의장 고신朴毅長告身

박의장朴毅長(1555-1615)을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의 품계로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이다. 박의장은 영해寧海 무안박씨務安朴氏 가문의 인물로, 이 가문의 고문서는 『고문서집성』82(한국학중앙연구원, 2005)에 실려 있고, 현재 장서각에 기탁되어 있다. 문서의 양식은 『경국대전經國大典』 고신식告身式에 나타나는 ‘4품이상고신식’이다. 문서는 전부 6행으로 1)행의 기두어는 ‘敎旨’로 되어 있고, 6)행의 중국 연호 만력萬曆과 연年 사이에 안보된 어보御寶는 [施命之寶](方 10cm)이다. 1)행과 6)행은 다른 행보다 한 글자 위로 썼다. 조선시대에 4품 이상 관원을 임명하는 문서는 이런 형태를 가졌다. 

■ 당 건중 3년(782) 주거천 칙수고신朱巨川勅授告身

중국 당唐의 덕종德宗 건중建中 3년(782)에 주거천朱巨川을 수중서사인守中書舍人에 임명하는 칙수고신勅授告身이다. 당의 임명문서는 5품 이상은 제서制書로 임명하는 제수고신制授告身과 6품 이하는 칙지勅旨로 임명하는 지수고신旨授告身이다. 그런데 산관散官 6품이 5품의 직사관職事官에 임명되거나, 이와 반대로 산관 5품을 6품의 직사관에 임명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때 발일칙發日勅으로 임명하는 칙수고신勅授告身을 임시로 만들어 운용하였다. 칙수고신은 문하성의 복주覆奏가 생략된 간단한 문서양식이므로, 안록산安祿山(703-757)의 난(756)으로 발생한 군공軍功을 포상하기 위하여 대량으로 발급되었고, 나말여초羅末麗初 시기 한국에도 전래되어 고려의 김부 고신金傅告身(975)에 영향을 주었다. 당의 제수고신은 고려의 혜심 고신慧諶告身(1216)에 영향을 주었다. 

■ 고려 경종 즉위년(975) 김부 고신金傅告身

고려 경종景宗 즉위년(975) 10월에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978, 재위 927-935)를 상보尙父․도성령都省令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당唐 칙수고신勅授告身의 양식을 따랐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기이紀異」 김부대왕金傅大王 조에 실려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가 고려에 귀부歸附를 하자,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943, 재위 918-943)은 자신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김부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을 다시 고려의 제5대 국왕 경종景宗(955-981, 재위 975-981)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자 경종 즉위년(975) 10월에 경종은 김부를 상보․도성령에 임명하면서 이 문서를 발급하였다. 문서에는 광평성廣評省, 내의성內議省, 내봉성內奉省, 군부軍部, 병부兵部 5개 관부의 장관과 차관이 참여하고 있으므로, 아직 당의 3성제가 정식으로 도입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 고려 고종 3년(1216) 혜심 고신慧諶告身

고려 고종 3년(1216)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을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이다. 이 문서는 당唐 제수고신制授告身의 양식을 따랐다. 혜심 고신 때문에 당의 3성제三省制가 고려 성종成宗(961-997, 재위 981-997) 이후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곧, 중서성中書省의 기초起草, 문하성門下省의 심의審議, 상서성尙書省의 발급發給이라는 3성제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과정이 문서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혜심 고신은 당의 제수고신 양식을 그대로 도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문서의 기초는 당의 경우 중서성의 3관이 참여하는데 반하여 혜심 고신은 2관만이 참여하고 있다. 곧, 중서성에서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이 참여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문하성門下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빠져 있다. 또 상서성의 시행에 해당하는 관원은 칙수고신의 양식을 따랐다. 따라서 혜심 고신은 당의 공식령을 참고로 하였지만 고려의 관제에 맞게 적절히 개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체는 중국 당에서 시작되어 북송까지 공문서의 작성에 사용된 왕희지 행서의 영향을 강하고 받았다.

■ 원 순제 원통 2년(1334) 이달한 선명李達漢宣命

몽골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 토곤 테무르Toɣon Temür(재위 1333-1370)가 원통元統 2년(1334) 정월에 이달한李達漢을 무덕장군武德將軍․고려국만호부만호高麗國萬戶府萬戶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이러한 문서의 양식은 몽골시대에서는 선명宣命이라고 하였다. 몽골어로 황제의 명령은 쟈를릭ǰarliɣ이라 하고 한자로는 성지聖旨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임명문서의 경우 1-5품까지는 선명宣命, 6-9품까지는 칙첩勅牒이라고 불렀다. 몽골의 제5대 황제 후빌라이 한Qubilai Qan은 지원至元 6년(1269)에 티벳의 라마승인 팍빠’Phags-Pa에게 새로 운 문자를 만들게 하여 몽고신자蒙古新字 또는 국자國字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다. 이후 몽골의 공식 문서는 모두 팍빠 문자로 작성하게 하였고, 당시 몽골의 부마국 소속의 고려인 이달한도 고려국만호부의 만호에 임명되면서 팍빠 문자로 된 선명을 받은 것이다. 

■ 조선 태조 4년(1395) 강순룡 왕지康舜龍王旨

조선 태조 4년(1395) 12월 22일에 강순룡康舜龍을 특진特進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재령백載寧伯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강순룡의 본관은 신천信川이고 호는 화곡化谷이다. 고려말 몽골에 들어가서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 되었고, 몽골명으로 바얀 테무르(Bayan Temür, 伯顔帖木兒)라고 하였다. 공민왕 3년(1354)에 고려로 돌아와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다. 누이동생은 신덕왕후神德王后로 이성계李成桂의 비이다. 이성계의 정변과 집정 과정에서 도움을 주어 조선 개국 이후 재령백載寧伯의 작호를 받았으나, 제1차 왕자의 난에 참화를 당하였다. 
  강순룡의 후손은 이 왕지를 태조 이성계의 친필親筆로 여겨서 국왕 영조에게 올렸고, 영조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서 모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강순룡 왕지는 당시의 국왕 태조 이성계가 쓴 것인가?

■ 조선 태종 9년(1409) 정전 왕지鄭悛王旨

조선 태종 9년(1409) 정전鄭悛(1356-1435)을 중직대부中直大夫․전농정典農正․지제교知製敎․첨지문서응봉사사僉知文書應奉司事에 임명하는 왕지王旨이다. 정전은 본관은 팔계八溪(草溪)로 고려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이 문서에 안보된 [朝鮮國王之印](方 10cm)은 조선 태종 3년(1403) 4월에 명의 영락제永樂帝가 반사한 것이다.
 

■ 조선 세종 15년(1433) 이징석 왕지李澄石王旨

조선 세종 15년(1433) 3월 24일에 이징석李澄石(1373-1461)을 가정대부嘉靖大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하는 왕지王旨이다. 이징석의 본관은 양산梁山이다. 동생이 이징옥李澄玉이다. 무과로 출사하였다. 1433년 변경의 울라(兀剌, Ula) 등으로 가서 파저강婆猪江에 침입한 야인을 평정하였다.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함길도도절제사로 있던 동생 이징옥이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려 하다가 피살되었다. 이에 아들과 함께 연좌되었다가 석방되어, 세조 1년(1455)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봉되고, 양산군梁山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강莊剛이다. 이 문서에는 [國王行寶](方 10cm)가 안보되어 있다. 이 어보는 세종 14년(1432) 10월 12일에 예조의 건의에 따라 책봉冊封과 제수除授에 사용하기 위하여 주조하였다.

■ 조선 성종 25년(1494) 김종한 교지金從漢敎旨

조선 성종 25년(1494) 2월 27일에 김종한金從漢을 봉렬대부奉列大夫․행안동교수行安東敎授에 임명하는 교지敎旨이다. 김종한의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자는 종해宗海이다. 세조 11년(1465)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문서에 안보된 어보는 [施命之寶]이다. 이것은 성종 24년(1493) 3월 28일에 정비政批와 관교官敎에 사용하기 위해 주조하였다. 이 어보는 성종 24년(1493) 9월 30일에 다시 주조하기도 하였다.

■ 신라 김생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711-791 이후)의 글씨인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는 『선우추․김생서법첩鮮于樞․金生書法帖』에 들어 있다. 이 법첩은 조선 중종 19년(1524)에 모각하였다. 앞부분은 원의 서예가 선우추鮮于樞(1256-1301)의 초서草書로 당의 시인 위응물韋應物(737-804)과 두보杜甫(712-770)의 시 23수가 들어 있다. 뒷부분이 바로 김생의 글씨이다. 김생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48 열전列傳에 서예가로 실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전유암田遊巖은 『구당서舊唐書』의 「은일열전隱逸列傳」에 실려 있다. 조로調露(679) 중에 당의 고종이 숭산嵩山에 행행하였다가 전유암을 만난 일화가 유명하다. 「전유암산가서」의 글씨는 왕희지의 행서가 신라로 전파되어 고도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후 이러한 서체는 고려시대의 임명문서에도 계속 사용되었으니, 고려 고종 3년(1216)의 혜심慧諶(1178-1234) 고신告身도 그러한 영향을 받았다.

■ 조선 남하행 『초결백운가草訣百韻歌』

조선후기의 문인 남하행南夏行(1697-1781)이 영조 31년(1755)에 임서한 초서의 학습서인 『초결백운가草訣百韻歌』이다. 남하행의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자字는 성시聖時, 호號는 잠옹潛翁 또는 둔암遯庵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문하이다. 직계 조상 중에 13대조로 개국공신 남재南在(1351-1419)가 있고, 전서篆書에 능했던 7대조 남응운南應雲(1509-1587)등이 있다. 장서각 소장 『초결백운가』에는 [潛翁]․[聖時]․[南氏書籍][南夏行印] 등의 인문이 답인되어 있어 남하행의 소장본임을 알 수 있다. 『초결백운가』는 남송의 『사림광기事林廣記』(속집)에 실려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원나라 말기에 여러 판본이 나오면서 여말선초에 한국에 유입되어 초서 학습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남하행의 『초결백운가』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玉洞 이서李潊(1662-1723)의 옥동체玉洞體의 영향을 받아, 연미姸媚하고도 유려流麗한 필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 조선 엄한붕 『초서천자문草書千字文』

조선후기의 서예가 엄한붕嚴漢朋(1685-1759)이 초서로 쓴 『천자문千字文』이다. 엄한붕의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도경道卿, 호는 만향재晩香齋이다. 이 첩의 발문은 정조 13년(1789)에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지었는데 ‘참으로 이왕二王(王羲之와 王獻之)의 묘한 곳을 얻었다.[眞得二王妙處.]’라고 평하였다. 이 외에도 송하옹松下翁 조윤형曹允亨(1725-1799)의 발문도 있어서 당시의 명사들에게 진중하게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후손인 엄성묵嚴性黙이 모각을 하였고, 새긴 사람은 남태백南太伯이라고 적어 놓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원나라의 송설체松雪體와 명나라의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1425-1487)의 글씨를 비판하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단정端正하다는 이유에서 사림士林에서 중시하게 되었다. 엄한붕의 초서는 이러한 흐름을 타고 조선중기 이후 왕희지 서풍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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