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과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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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과 현상학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5.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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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5강>_ 이남인 서울대학교 교수의 「후설과 현상학」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45강 이남인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강연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후설과 현상학

이남인 교수는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이라는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에 대해서 “입문에 대한 입문 정도의 성격”으로서 개괄적 소개를 시도한다. 그를 위하여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몇 가지 주제들”, 실증주의 비판, 보편학과 엄밀학으로서의 현상학, 영역적 존재론과 형식적 존재론, 그리고 현상학적 심리학, 현상학적 환언, 초월적 현상학 및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제재를 고른 다음 후설 현상학의 큰 얼개를 그려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현상학적 환원들이 “모두 우리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특정한 사태 영역을 개시해주고 그처럼 개시된 영역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해방적 측면이 있음을 말하면서, 비록 수행하기 어렵긴 해도 “초월론적 현상학적 태도”로까지 넘어가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현장감과 생동감을 더하기 위해” 그동안 스스로 해온 현상학 “연구들을 일부 소개하면서 현상학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지난 4월 24일, 이남인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br>
지난 4월 24일, 이남인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후설(E. Husserl, 1859-1938)은 누구인가? 

후설은 현대 철학의 중심적인 사조 중의 하나인 현상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한 평생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태어나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타계하였노라!” 철학자로서의 후설의 삶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72세의 고령에 이르러 쓴 어떤 글에서 후설은 자신을 “철학의 초심자”라고 부르면서 성경에 나오는, 1000살 가까이 살았다는 무드셀라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는 어떤 강의에서 “헛되이 명성을 추구하면 영속적인 가치를 지닌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학계에서조차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오늘날 학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20세기 초 등장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상학을 비롯해 여러 현대 철학 사조들이 전개해나감에 있어 끊임없이 자양분을 제공하고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 하트(J. Hart) 교수는 후설의 현상학을 현대 철학의 거봉 중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인 후설의 현상학은 인식론, 존재론, 형이상학, 신학뿐 아니라, 윤리학, 역사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미학, 논리철학, 수리철학, 과학철학 등 가능한 모든 철학을 포괄하며 더 나아가 응용현상학이라는 표제 아래서 현상학적으로 정초된 다양한 경험 과학까지도 포괄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후설의 현상학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서양의 철학 사조뿐 아니라, 동양의 여러 철학 사조들, 더 나아가 다양한 분과 학문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후설의 현상학은 철학적 분석의 깊이를 자랑한다. 후설 현상학의 철학적 깊이는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에 대한 저술의 양을 보아도 잘 드러난다. 철학사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시간의 경우 후설의 경우 후설 전집으로 출간된 세 권의 저술을 포함해 모두 2000쪽 가량의 지면을 할애해 시간 의식의 문제를 해명하고 있다. 또 현대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상호주관성의 문제의 경우 후설 전집 13-15권을 비롯해 2000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해 이 주제를 천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철학과 인접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인 생활세계 내지 세계 역시 2500쪽 이상의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다. 

후설이 생전에 출간한 저술은 현상학적 운동의 출발점이 된 1900~1901년에 출간한 『논리 연구』를 비롯해,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을 담고 있는 1913년에 출간한 『이념들 1』을 포함해 『엄밀학으로서의 철학』,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 『데카르트적 성찰』,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등 몇 편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약 4만 쪽에 달하며 모두 출간할 경우 약 100권 정도에 달하는 미발간 유고들이 차지하고 있다. 

후설이 생전에 출간한 저술들도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후설이 전개해나간 현상학의 진수 중의 많은 부분은 그의 생전에 출간되지 않은 미발간 유고들에 들어 있다. 이 유고들은 인식 작용, 감정 작용, 의지 작용, 수동적 종합, 상상, 미적 의식, 감각 세계, 지각 세계, 생활세계, 윤리, 시간 의식, 공간 의식, 신체 및 운동 감각, 습성, 역사 상호주관성, 본능과 충동, 무의식, 종자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현상학적 분석들을 담고 있다. 물론 후설이 생전에 출간한 저술들에도 구체적인 현상학적 분석들이 많이 있으나, 그는 이러한 저술들을 유고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현상학적 분석들로 안내하는 “입문들”로 간주했다.

2. 현대의 위기와 현상학의 이념 – 실증주의 비판 

후설은 1937년 5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에서 “유럽인의 위기 속에서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에서 현대를 위기의 시대로 진단한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병 들었고, 이처럼 병든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진 현대 문화 역시 병든 문화이며, 현대인은 현재 더 이상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유지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진단의 핵심이다. 그가 몸소 체험하였던 제1차 세계 대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 그리고 나치주의의 대두뿐 아니라, 그의 사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나치주의자들의 만행, 원자탄 투하 등은 그가 진단한 현대의 위기의 적나라한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후설이 타계한 후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후설이 진단한 현대의 위기는 더욱더 극단화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극단화하고 있는 현대의 위기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의 위기를 예리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포스트휴먼 담론이다. 포스트휴먼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현재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우리보다 여러 가지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나 우리를 예속시키고 언젠가는 우리를 말살시켜버릴 존재라고 한다면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야말로 그 어떤 위기보다도 더 처절한 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설에 의하면 이러한 현대인의 위기, 현대 문화의 위기의 일차적인 책임은 현대 과학이 병 들어서 자신의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물론 현대 과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러한 주장이 현대 과학이 이룩한 비약적인 발전을 부정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과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 함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과학이 역설적으로 인류의 삶의 고양을 위하여 지녀왔던 본래적인 의미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음을, 다시 말해 과학이 과학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후설에 의하면 이러한 과학 위기의 최종적인 원천은 바로 철학의 위기에 있다. “모든 것의 뿌리”, “모든 것의 원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하고 병듦으로써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 필연적인 결과 제반 학문들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이 이처럼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잠시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철학의 지형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후반은 실증적 경험에 기초한 개별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독일 관념론이 붕괴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이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처하게 된 시기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가 계속되면서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사이에 실증적인 개별 과학의 비약적 발전에 편승해 몇 가지 철학 사조들이 등장하였는데, 이 모든 사조들은 실증적인 개별 과학을 자신의 철학적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따라서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실증주의(Positivismus)”라 불릴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물리학적 실증주의이다.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르네상스 시대 이래 비약적으로 발전한 수리물리학의 성과에 크게 자극받고 고무되어 물리학적 방법이 모든 학문의 참된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철학적 입장이며, 물리주의(Physikalismus) 혹은 객관주의(Objektivismus)라고도 불린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물리학을 모범으로 삼아 사회학조차도 “사회물리학”으로 정초하고자 시도하였던 콩트(A. Comte)의 철학이다.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모든 대상을 자연적 인과 관계의 망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물리학적 방법을 대상 인식을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한다. 물리학은 관찰의 방법, 실험의 방법, 수량화의 방법 등을 사용하며 관찰과 실험을 위해 현미경, 망원경 등의 관찰 장비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물리학적 대상이 외적 지각을 통해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리학이 수량화의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물리학적 대상이 양을 가지고 있어 크기를 잴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바로 모든 학문이 이러한 물리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참다운 의미의 학문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그러나 물리적 대상 이외의 다양한 유형의 대상들을 경험하는 경우를 검토해보면 물리학적 실증주의가 타당하지 못한 철학적 입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점을 심리 현상에 대한 경험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우리 각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자신의 심리 현상에 대한 경험을 반성해보면 알 수 있듯이 심리 현상은 물리적 대상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우선 심리 현상은 물리적 대상과는 달리 외적 지각을 통해 경험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심리 현상을 내적 지각 내지 반성을 통해 경험한다. 그리고 물리적 대상의 경우 그것의 높이, 깊이 등을 측정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심리 현상은 높이, 깊이 등을 측정할 수 없다. 

심리 현상에 대한 경험이 보여주듯이 물리학적 방법이 모든 대상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심리 현상 이외에 사회 현상, 역사 현상, 문화 현상, 예술 현상, 윤리 현상 등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경험을 검토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현상들 역시 심리 현상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적 방법을 통해서 적절하게 연구될 수 없다. 따라서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자연, 역사, 정신, 예술, 종교, 본질, 의식 등 그 존재 및 인식 구조에서 서로 구별되는 다양한 사태 영역이 있음을 망각한 채 물리적 자연이라는 특정의 사태 영역에만 타당한 존재 및 인식 원리를 일반화시켜 모든 사태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물리적 자연 영역에 대한 탐구에서만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지닐 수 있는 이성인 자연과학적 이성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벗어나 다른 영역까지도 부당하게 침범하면서 월권을 행하고, 더 나아가 전 영역에서 독재 행위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처럼 제한된 이성이 자행하는 월권 및 독재 행위 때문에 물리학적 실증주의를 따를 경우 물리적 자연이라는 영역을 제외한 여타의 사태 영역을 그 사태 영역의 본질에 합당하게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애당초 차단되고 만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바로 “사태”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막혀 있는 물리학적 실증주의가 철학이란 “모든 것의 원리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존재자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목표로 한다는 철학의 근원적인 이념과 상반되는 —후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사이비 철학(Unphilosophie)”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이비 철학”으로 전락하게 된 물리학적 실증주의야말로 후설의 최후의 저술인 『위기』의 핵심 주제인 “철학의 위기”의 진원지이며, 바로 이러한 철학의 위기에서 현대 과학 일반의 위기, 더 나아가 현대인이 처한 실존적 위기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 후설의 분석이다. 이제 후설에게 주어진 과제는 “철학은 모든 것의 원리, 모든 것의 뿌리에 관한 학이다”라는 전통적인 철학의 이념을 근원적으로 새롭게 부활시켜 참다운 철학을 수립함으로써 현대 과학 일반이 처한 위기, 더 나아가 현대인이 처한 실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증주의에 대한 현상학의 비판에 대한 오해 한 가지를 검토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현상학이 실증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증 과학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는 실증주의와 실증 과학이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실증 과학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경험 과학을 뜻하는 것인 데 반해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모든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철학적 입장을 뜻한다. 현상학이 비판하는 것은 그릇된 철학적 입장인 실증주의이지 실증 과학이 아니다. 현상학은 실증 과학이 자신에게 할당된 대상 영역을 파악하기 위해서 자연과학적 방법을 사용해야 하며 따라서 실증 과학이 나름의 고유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현상학은 실증 과학 각각의 토대를 검토하면서 각각에 고유한 철학을 전개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후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참다운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의 목표가 “모든 것의 뿌리”를 탐구하는 데 있다는 전통적인 철학의 이념에 의하면 참다운 철학은 한편으로는 “보편성”을 지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 적합성”, 즉 “엄밀성”을 지녀야 한다. 앞서 살펴본 실증주의가 참다운 철학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실증주의는 그것이 특정의 존재자 영역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 거기서만 타당한 존재 및 인식 원리를 다른 영역에까지 확대시켜 적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존재자를 총체적, 혹은 보편적 관점에서, 그리고 사태 자체의 본성에 적합하게, 다시 말해 엄밀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다운 철학이란 보편성과 엄밀성을 동시에 지니는 철학이며, 따라서 보편학이며 엄밀학이어야 한다. 보편학과 엄밀학은 참다운 철학의 두 가지 측면을 의미하는데, 보편학은 참다운 철학의 주제적인 측면을, 그리고 엄밀학은 참다운 철학의 방법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 . . . .

9. 현상학의 풍부한 가능성과 미래 

후설은 1900/1901년에 『논리 연구』를 출간한 후 수많은 거봉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에 비유될 수 있는 자신의 현상학을 전개해나갔다. 그 후 현상학은 독일을 넘어 프랑스와 유럽의 여러 나라, 미국 및 아메리카 대륙,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등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이러한 현상학적 운동 속에서 후설의 현상학은 보덴 호수가 라인강의 수원 역할을 하듯이 자신의 풍부한 자원과 영감을 통해 그 후 등장한 여러 현상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세계적인 현상학 운동을 견인해왔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이 그처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후 등장한 여러 현상학자들에 의해, 또 현상학 이외의 여러 현대 철학 사조들에 속하는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종종 오해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후설의 현상학은 웅장한 산맥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거봉 중에서 맨 앞에 있는 거봉, 즉 그의 생전에 출간된 몇몇 저술들에 나타난 현상학과 동일시되곤 하였다. 후설은 이 현상학을 “정적 현상학(statische Phänomenologie)”이라 부른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정적 현상학은 그 근본이념에서 초시간적인 타당한 인식의 가능성을 해명하고자 한 플라톤의 철학, 데카르트의 철학, 칸트의 철학 등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후설은 중기 이후에 정적 현상학과 구별되는 “발생적 현상학(genetische Phänomenologie)”을 전개해나갔다. 의식의 발생, 세계 및 대상의 의미의 발생을 해명하고자 하는 발생적 현상학은 희랍의 소피스트 철학, 영국 경험론,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생철학, 그리고 의미 발생에 대한 해명을 목표로 하는 후설 이후의 여러 현대 철학 사조들까지도 자신의 체계 속에 포섭할 수 있다. 발생적 현상학은 능동적 발생의 현상학, 수동적 발생의 현상학, 연상의 현상학, 시간 의식의 현상학, 상호주관성의 현상학, 세대간적 현상학, 역사적 현상학, 본능의 현상학, 무의식의 현상학 등을 비롯해 무수히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후설 이후에 등장한 현상학자들과 철학자들 중에서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할 경우 그들은 종종 후설의 현상학을 정적 현상학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비판해가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간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 각자가 후설의 정적 현상학을 비판하면서 전개해나간 현상학 및 철학은 많은 경우 후설이 전개해나간 발생적 현상학의 한 부분과 유사하다. 둘째, 그들은 대부분 후설의 정적 현상학의 근본정신을 오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후설의 정적 현상학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대부분 타당하지 않다. 후설의 정적 현상학은 그것을 비판해가면서 그들이 전개시키고 있는 현상학 및 철학을 타당한 철학으로 정초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후설은 보편학으로서의 현상학을 성경에 나오는 “약속된 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칠십 평생에 걸쳐 현상학 연구를 수행했음에도 자신을 “철학의 초심자”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한 일이 저 약속된 땅의 전체적인 지리를 확인하고 그중의 일부만을 경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후설의 고백은 현상학의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제 그동안 필자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해온 주제들을 중심으로 현상학의 가능성과 미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만을 지적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 후설이 말하는 현상학의 “약속된 땅” 중에서 후설이 부분적으로 개척했다고 말하는 땅들은 대부분 그의 미발간 유고 속에 들어 있다. 후설이 타계한 후 루벵 대학에 후설 문고가 설립된 후 후설의 미발간 유고들이 편집 과정을 거쳐 40권 이상 출간되었으며, 또 미발간 유고들에 들어 있는 현상학을 주제로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후설의 미발간 유고를 정리하는 작업 및 후설의 미발간 유고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현상학에 대한 연구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구를 발판으로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은 다양한 유형의 새로운 현상을 전개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앞서 후설의 현상학이 그처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오해는 그동안 후설의 현상학과 그 이후 등장한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 및 현대 철학 사조들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를 통해 새로운 현상학이 출현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 역할을 해왔다. 물론 생산적인 오해가 창조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동안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 및 현대 철학 사조 사이에 소통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오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현상학들이 출현할 수 있기 위해 후설의 현상학과 그 이후에 등장한 현상학 및 현대 철학 사조들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를 진행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3) 후설의 미발간 유고 속에는 다양한 현상학적 분석들이 원광석의 형태로 들어 있다. 이처럼 원광석의 형태로 들어 있는 현상학적 분석들을 새롭게 가공하면서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현상학을 태동시킬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 후설의 미발간 유고 속에 들어 있는 신체 및 운동 감각에 대한 후설의 분석을 토대로 지각의 현상학을 발전시켜나간 메를로-퐁티의 작업은 현상학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후설의 유고들 중에는 단순한 착상만을 담고 있는 것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착상들을 토대로 현상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응용현상학”이다. 응용현상학이란 영역적 존재론, 초월론적 현상학 등의 철학적 현상학이 다양한 인접 학문들과 대화하면서 전개될 수 있는 현상학이다. 실제로 후설이 활동하던 20세기 전반기에 이미 응용현상학의 여러 분야를 개척해나간 학자들이 있으며 20세기 중후반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응용현상학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21세기 현상학이 나아갈 중요한 방향 중의 하나가 응용현상학이다. 

5) 후설의 현상학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기 때문에 동서양의 여러 철학 사조들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현상학이 출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후설은 철저한 방법론적 의식에 기초해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논의를 비롯해 방법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현상학은 다른 철학 사조들과 대화할 수 있는 준비가 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이 대화 상대로 삼을 수 있는 철학으로는 후설 이전의 전통 철학, 현상학을 비롯한 여러 유럽 현대 철학 사조들뿐 아니라, 분석철학, 동양 철학까지도 포함한다. 분석철학과의 대화와 관련해 최근 들어 “분석현상학(analytical phenomenology)”이라는 분야가 출현하고 있음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실제로 후설의 현상학은 엄밀한 방법을 토대로 철학을 전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석철학과 근본정신을 공유하고 있으며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에 있어서도 분석철학과 공유하는 바가 많아 그에 따라 최근 들어 양자 사이의 대화가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현상학과 동아시아의 여러 철학 사조 사이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현상학의 출현과 관련해 주목할 점은 유가 철학, 불가 철학, 도가 철학 등 동아시아의 여러 철학 사조들이 모두 과학 세계가 아니라, 후설이 그처럼 강조하며 그에 대해 수많은 분석을 남겨놓은 생활세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상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후설이 전개해나간 생활세계의 현상학과 그가 개발한 다양한 현상학적 방법을 토대로 동양 철학의 여러 사조들과 대화하면서 현상학의 새로운 지평을 풍부하게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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