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와 혁명이 중첩된 데카르트의 성찰, 근대철학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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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와 혁명이 중첩된 데카르트의 성찰, 근대철학의 문을 열다
  • 이현복 한양대·철학
  • 승인 2021.05.1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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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512쪽, 2021.04)

지지난 겨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개정 작업을 위해 독일 괴팅겐에서 몇 달 머물렀고, 그때 파리에 잠깐 들렀다. 30년 전 그곳 향수를 느끼면서, 이번에는 꼭 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 있었다. 데카르트의 비석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 비석은 젊은 시절 수없이 스쳐갔던 한 성당의 내부 벽면에 다른 인물들의 비석들과 함께 있었다. 그 칸에는 몇 개의 비석이 있었는데, 중심에는 어떤 성직자의 비석이 있었고, 데카르트의 지극히 간단한 이력이 새겨진 돌조각은 옆면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 당황했고, 딱한 마음으로 초를 하나 밝혔으며,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대인문학자”라고 적힌 비문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소녀가 다가왔다. 부녀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데카르트의 돌조각 앞에서 무언가를 길게 설명했고, 딸은 눈을 찡그리며 들었다. 그들에게 데카르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중서부 투렌에서 태어나 1650년 2월 1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죽었다. 18세에 앙리 4세가 세운 라 플레슈(La Flèche) 졸업, 20세에 푸아티에 대학에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한 후,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으로 여행길을 떠난다. 22세에 네덜란드의 의학자이자 수학자인 이삭 베크만(I. Beeckman)과의 운명적 만남, 23세에 “새로운 학문의 기초 발견을 암시하는 세 번의 꿈”, 29세에 영원한 절친 메르센(M. Mersenne) 신부와의 재회를 거쳐, 32세에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로 이주한 후, 이 이국땅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다. 1637년 《굴절광학》, 《기하학》 및 《기상학》을 담은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을 출간해 당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4년 후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을 라틴어로 집필해 세상에 내놓는다. 1642년 데카르트를 무신론자로 공격한 위트레히트 대학 학장 보에티우스(G. Voetius)와 치열한 공박전을 벌인 결과, 당대 학계는 데카르트주의자와 안티데카르트주의자로 나뉘고,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저서 《방법서설》에서도 그랬듯이, 데카르트는 두 번째 저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의 제목을 정할 때도 신중했다. 그는 “논고”(tractatus) 대신 “성찰”(meditatio)이라는, “형이상학”(metaphysica) 대신 “제일철학”(prima philosophia)이라는 용어를 가져온다. 이 책의 독자는 이 글을 논문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성찰을 함께 성찰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지향점은 기존의 형이상학을 주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철학의 으뜸이 되는 것을 제시하는 것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새로움은 그 제목에만 있지 않았다. 1642년 출간된 이 책의 재판 분량은 603쪽에 달하지만, 정작 그 본문은 90쪽, 이것도 <소르본 신학부에 바치는 헌사>(Epistola), <요약>(Synopsis) 그리고 <독자를 위한 서언>(Praefacio)을 제외하면 73쪽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이 글에 대해 당대 유력 철학자들과 주고받은 <반박들과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다. 70여 쪽에 불과한 도발적인 텍스트가 당대 철학계에 지적 파장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후 서양철학에 결정적인 한 획을 그은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헌사>, <요약> 및 <독자를 위한 서언>을 필두로, <여섯 개의 성찰>을 담고 있다. <헌사>에서 이 책의 목표가 은총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도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성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 이로써 무신론자는 물론 이신론자들의 주장을 일거에 해소하는 것에 있음을 선언하고, <서언>에서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그러나 지금, 어쨌든 일단 사람들의 판단을 경험했으므로, 나는 여기서 다시 신과 인간 정신에 관한 그 문제들 그리고 동시에 제일철학 전체의 시초들을 다루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중의 박수도 독자의 쇄도도 기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나와 함께 진지하게 성찰하고, 정신을 감각에서 그리고 동시에 모든 선입견에서 떼어놓을 수 있고 떼어놓으려고 하는 이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이 글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으며, 나는 그러한 이들이 아주 적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편, 내 근거들의 계열과 연관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흔히들 그렇듯이, 그저 개개의 어구에 매달려 트집 잡는 일에만 골몰하는 이들은 이 글을 읽어도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쩌다 많은 부분에서 억지 부릴 기회를 잡는다고 해도, 나를 궁지로 몰거나 답변할 만한 반박을 내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내 근거들의 계열과 연관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이 책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의는 이 책의 독서에 핵심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는, 제1성찰은 성찰 전체의 최초 근거일 것이고, 제6성찰은 그 최종 귀결일 것이다. 그리고 제1성찰의 제목이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이고, 제6성찰의 제목이 “물질적 사물의 현존,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별에 관하여”라면,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여 내던진다고 해도,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 이 점을 제2성찰에서 입증한다. 제3성찰에서 신은 존재한다는 사실, 인간 정신과 신체를 포함한 만물을 창조한 이 신은 선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나아가 제4성찰에서 “인간 정신이 명석 판명하게 인식한 것은 참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의 규칙”을 확보한다. 이것들을 근거로 마침내 제6성찰에서 인간 정신과 신체는 본성상 서로 상이하다는 것, 즉 이 양자는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을 결론짓는 것으로 데카르트의 성찰은 막을 내린다.

《방법서설》이 세상의 반응을 떠보는 책이었다면, 《성찰》은 세상과 마주한 책이었다. 아마도 데카르트는 후자의 내용이 일정 부분 포함된 전자의 출간을 통해 세상과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이것이 비록 익명으로, 프랑스어로, 타국에서 출판되었을지라도 말이다. 또한, 1629년 그의 나이 33세에 네덜란드에 정착해 집필했건만 세상의 흉흉한 시선에 출판을 포기해야 했던 《형이상학 논고》(Traité de métaphiyisque)의 내용을 이제는 더 이상 감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논고》를 쓴 직후인 1630년, 데카르트는 그의 평생 동지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이성의 사용을 허락한 사람들은 모두 신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로부터 나는 학적 탐구를 시작했으며, 이 길을 따라 자연학의 토대들을 찾지 못했다면, 나는 결코 이 토대들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찰》 초판이 출간되던 해인 1641년, 메르센에게 같은 입장을 피력한다. 

“우리까지 하는 말이지만, 그 여섯 성찰들은 나의 자연학의 모든 토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길 바랍니다. 그럴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것들에 동의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독자들이 내 원리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들을 폐기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서서히 내 원리들에 익숙해지기를, 또 그 원리들이 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데카르트가 《성찰》의 부제를 “여기서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성이 증명됨”으로 달고, <헌사>에서 인간의 자연적 이성으로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한 말은 일정 부분 립 서비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달리 말해, 그가 그의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결론짓고 싶었던 것은 정신과 신체/물체는 본성상 상이하다는 것, 즉 정신 안에는 어떠한 물질적인 것도 없고 물체 안에는 어떠한 정신적인 것도 없다는 것, 따라서 물체/물질적 세계는 수학적으로 해명 가능하다는 것, 그런 만큼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고, 이때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신학적 문제는 기껏해야 부차적인 사안이라는 점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철학을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하면서, “제일철학” 즉 “형이상학”을 비물질적인 사물들을 다루는 학문으로, 또 그것을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래서 줄기인 자연학, 가지인 기계학/의학/도덕학을 근거 지우는 학문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철학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실질적인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확신은 평생 불변이었다. 그에게 철학함이란 관조적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었고, 세상의 것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획득하려는 지적 노력이었다. 이를 위해 어떤 의심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토대를 발견하고자 했고, 이 지난한 과정을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지지난 겨울, 이탈리아 부녀는 비석 앞에서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모든 이들은 참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이성(raison) 혹은 양식(bon sens)을 갖고 있다는 확신 아래, 전통에 의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억견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도모하자는 데카르트의 말이었을까. 오랜 시간 깊은 성찰을 통해 접하게 되는 자기 내면의 응답들, 그러나 굳게 지켜나가기 쉽지 않은 것들, 그저 여기에 주목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마음 깊이 새기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었을까. 천천히 걷되 곧은길을 따라가는 이들이 뛰어가되 곧은길에서 벗어나는 이들보다 훨씬 더 진보할 수 있다는, 확고하고 불변하는 어떤 것을 세우길 원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고 최초의 토대들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었을까. 데카르트는 분명 합리적 회의주의자였고, 합리적 혁명주의자였다. 회의와 혁명이 중첩된 데카르트의 성찰, 아마도 그해 겨울 그의 묘비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현복 한양대·철학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 철학박사. 독일 괴팅겐 대학교 및 베를린 공과대학 철학과 객원교수. 현재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로는 《Der Begriff der Natur in der Cartesianischen Philosophie》(Innsbruck, 1990),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공저, 2007), 《확신과 불신: 소크라테스의 변론 입문》(2018)이 있으며, 역서로는 《포스트모던적 조건》(1992), 《지식인의 종언》(1993)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자연의 빛과 자연적 본능〉, 〈근대 철학에 있어 본유원리에 대한 논쟁〉,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는가〉, 〈스피노자의 자유의 윤리학에서 미신의 위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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