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꼽은 명판관, 명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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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꼽은 명판관, 명판결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5.1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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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⑱_ 정약용이 꼽은 명판관, 명판결

 

중앙집권을 표방한 조선왕조에서 고을 수령은 관료기구의 최말단인 지방 고을에서 직접 백성들과 접하는 관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방관인 고을 수령은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담당 업무도 지금과 달라 행정 외에도 군정, 사법, 치안 등 그 범위가 광범위했다. 한마디로 수령은 국왕을 대신하여 고을의 다양한 소관 사무를 총괄하는 존재였다. 특히 고을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재판, 즉 원님 재판은 수령의 핵심 업무 중 하나였다.

수령은 관내 고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송사(訟事)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사대부들은 과거 시험과 관련한 문장과 경전 공부에 치중할 뿐 법률 공부에는 소홀했다. 조선의 관직 체계상 이들이 과거에 합격해 6품 벼슬에 오르면 지방의 작은 고을 현감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백성들의 민원과 분쟁을 조정하는 능력에 대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도 진주는 있는 법. 19세기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지방관 업무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명판결 사례가 여럿 실려 있다. 다산이 꼽은 곧고 바른 명판관들의 일화에 대해 알아보자.

관아에서 재판하는 장면.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이 원고와 피고이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전답은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바치라”

명종, 선조 대의 관리 신응시(申應時)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이다. 남원에 사는 한 부유한 백성이 이단에 혹하여 재물을 모두 바쳐 부처를 섬기고, 전답까지 그 문서와 함께 영원히 만복사(萬福寺)에 시주하여 성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그 후 끝내는 굶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전 재산을 헌납하는 바람에 빌어먹고 다니다 마침내 시납한 전답을 돌려받기 위해 관에 소장을 올렸다. 여러 차례 소송했으나 그때마다 패소하자 결국 감사 신응시를 찾아가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신응시는 소장 말미에 손수 판결하기를 “전답을 시납한 일은 본래 복을 구한 것인데, 몸은 이미 굶어 죽고 자식은 빌어먹으니 부처의 영험 없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전답은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福)은 부처에게 바치라”고 하였다. 

신응시의 문집 『백록유고(白麓遺稿)』. 신응시가 지방 수령으로 일할 때는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청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경국대전』에는 노비나 전답을 절이나 무당에게 시납한 자는 처벌한 후에 그 노비와 전답을 국가에서 몰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응시는 시납자 아들의 딱한 처지를 고려하여 전답을 몰수하지 않고 위와 같은 절묘한 논리로 전답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그의 처분은 종교에 빠져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과감하게 바로잡아 주었다는 점에서 도내 많은 백성이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할 수는 없다”

정조 때의 관리 권엄(權)이 한성판윤 시절에 처리한 사건이다. 당시 국왕을 모시던 어의(御醫) 중에는 강명길(康命吉)이란 자도 있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설쳐서 관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하루는 그가 도성 서대문 밖 교외에 땅을 사 부모의 묘소를 이장했는데, 그 산 아래에는 오래된 민가(民家) 수십 호가 있었다. 그는 이들 민가마저 몽땅 사들여 10월 추수를 마친 후 집을 비우고 나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해 가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강명길은 종을 시켜 한성부에 고소하였다. 이때 권엄은 백성들을 쫓아내달라는 강명길의 고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국왕 정조는 승지 이익운(李益運)을 불러 권엄을 잘 달래서 다시 한성부로 관련 고소가 들어오면 강명길의 요구를 들어주게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권엄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 날 강명길이 다시 고소했으나 권엄은 종전 판결대로 백성들을 몰아내는 데 반대했다. 

“지금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치게 되었는데, 백성들을 집에서 몰아내어 쫓아낸다면 길바닥에서 다 죽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죄를 입을지언정 차마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할 수는 없다.”

영조 때 문과에 합격한 후 정조 때까지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권엄의 초상화.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권엄은 흉년에 집을 비우라는 명령은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일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이익운을 불러 책망했는데, 우레와 같은 왕의 노여움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으며 권엄을 위태롭게 지켜봤다. 

이 일이 있고 얼마 뒤 정조는 승지 이익운에게 “내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판윤의 처사가 참으로 옳았다. 판윤 같은 이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며 권엄의 처신을 높게 평가했다. 권엄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차례차례 소에게 물을 마시게 하라”

고려의 이보림(李寶林)이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웃 사람이 자기 소의 혀를 잘랐다고 고소하는 백성이 있었는데, 지목당한 당사자는 이를 부인했다. 이보림이 그 소의 목을 마르게 해놓고는 간장을 물에 타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차례차례 소에게 물을 마시게 하되 소가 물을 마시려 하거든 곧 중지시키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명령대로 하는데, 고소당한 자의 차례에 이르자 소가 놀라서 달아났다. 그를 다시 심문하니 “소가 내 벼를 뜯어 먹었으므로 그 혀를 잘랐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또 말이 자신의 보리를 뜯어 먹었다고 하소연하는 백성이 있었다. 당초 말 주인은 보리 주인에게 가을에 물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보리 이삭이 다시 나서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말 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보리 주인이 고소한 것이다. 이보림은 말 주인은 앉고 보리 주인은 서게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뜀박질을 하되 뒤진 자는 벌을 주겠다”고 말했다. 말 주인이 뒤떨어지게 되자 “저 사람은 서서 뛰고 나는 앉아서 뛰는데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불평하였다. 그러자 이보림은 “보리도 또한 그러하니, 말이 뜯어먹고 난 뒤의 이삭이 제대로 익을 수 있겠느냐” 하고는 형장을 쳐서 보리값을 물어주게 하였다. 이보림의 명석한 논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사건들이다.

그 외에 소개된 사례들

다산은 숙종 때의 동래부사 이세재(李世載) 또한 송사를 잘 처리한 수령으로 꼽았다. 이세재는 가까운 친족끼리 송사를 벌이는 경우 양쪽을 모두 엄히 처벌해 다시는 골육 간 분쟁으로 풍속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또한 묘지를 둘러싼 송사가 있으면 먼저 묫자리를 봐주어 분란의 원인을 제공한 지관(地官)을 처벌했으며, 금령(禁令)을 어기고 소를 잡는 백성이 있으면 적당히 돈으로 속죄하는 것을 허락지 않고 도둑을 다스리는 엄한 법률로 일벌백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 부사로 있던 3년간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선조 때 홍혼(洪渾) 또한 성품이 강직한 관리였다. 그가 양주목사 시절에 당시 후궁 김소용(金昭容)이 국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자 그 위세를 믿고 그의 조모(祖母)를 양주 경내 타인 소유의 산에 장사지냈다. 한마디로 투장(偸葬)을 한 것이다. 산주인이 제소하자 홍혼은 망설임 없이 즉시 법에 따라 파내도록 판결하였다. 경기감사가 이를 듣고 크게 놀라고 원근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

노비가 올린 청원서. 1620년 사노(私奴) 몽남(夢南)이 주인 없이 버려진 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해남현감에게 올린 청원이다. 문서 말미에 굵은 글씨로 흘려쓴 부분이 현감의 처분인데, 주인없는 것이 확실하면 경작해서 먹으라는 내용이다(今無主的實爲去等 依法耕食事 初九日). 이처럼 조선시대에 노비도 소송이나 청원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해남윤씨 녹우당 소장.

한편 다산은 중앙 관리의 일화도 하나 소개하였는데 그가 유정원(柳正源)이다. 영조 때의 관리 유정원은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어 옥사 처리를 공평하고 너그럽게 하며, 숨긴 것 찾아내기를 귀신같이 하였다. 어느 사노(私奴)가 문서를 변조하여 주인을 배반하고 서로 송사하였는데, 여러 해가 되었어도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문서를 가져다가 밝은 곳에 걸고 살펴보니 은은하게 고친 자리가 있었다. 물을 떠다 종이를 담그고 덧불인 곳을 손톱으로 긁으니 고쳐 쓴 먹 흔적이 분명하였다. 이에 엄한 형장을 가해 사실을 밝혀내고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외에도 『목민심서』에는 홍산현감 이시현(李時顯), 나주목사 이몽량(李夢亮), 안동부사 김상묵(金尙黙), 광주유수 김사목(金思穆)의 일화도 소개되어 있으니, 다산은 위세에 굴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서 많은 백성을 감화시킨 이들을 모두 훌륭한 목민관의 전형으로 본 것이다. 법원의 권위와 신뢰 회복이 절실한 요즘, 위와 같은 명판결을 내릴 수 있는 곧은 판사들이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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