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 살인마에서 우물 찾아주는 이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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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톱 살인마에서 우물 찾아주는 이웃으로
  • 이나미 한서대·정치사상
  • 승인 2021.05.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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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미국 공포 영화의 전형적인 줄거리 중 하나는 네댓명의 젊은이들이 여행을 가다가 차가 고장 나 낯선 시골에 머물고 이후 차례차례 살해되는 것이다. 대체로, 일행 중 노출 심한 금발 여성 또는 철없는 남성이 제일 먼저 살해되고, 착하고 의로운 남성이 끝까지 저항하다 마지막에 죽으며, 주인공 격인 영리하고 용감한 여성은 결국 살아남아 이후 이 여성과 관련하여 2탄이 예고된다. 두 번째 공식은 살인마에 대한 것으로, 그는 한 가난한 농가에서 숨겨져 길러진, 외모나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한결같이 더럽고 찢어진 내복 차림으로 고르지 않은 이를 보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다. 이들은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에 사는데 이 집의 냉장고에는 반드시 정체불명의 썩은 고기가 들어있고 전화기는 고장 나 있다. 또한, 이 마을의 경찰은 십중팔구 살인자 가족과 한통속이다.

이제 미국의 자랑은 더 이상 카우보이가 아니라 비싼 양복 입은 월스트리트 금융인이거나 후드티 입은 IT 천재다. 가난하고 못 배운 백인 농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포 영화의 조연 이외의 존재 이유를 갖지 못했다. 그러기까지 이들의 박탈감과 절망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결국 트럼프 등 극우 정치인들의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또한 트럼프는 이들과 이민자들 간의 대립을 조장하여 활용했다. 그런데 정이삭 감독은 영화 <미나리>를 통해 이 관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미국인들은 이 점을 영리하게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다소 의아스러운, <미나리>에 대한 전 세계적 찬탄은 이와 같은 메시지 때문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자고로 예술이란 공식을 깨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부르주아의 기생성, 프롤레타리아의 희생성이라는 공식을 깼고, 선과 악, 유능과 무능의 구도도 뒤집어 흔들었다. 예술이 제일 먼저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선언한다. 그리고 세계인들은 다행히 이를 알아차렸다.

<미나리> 역시 공식과 편견을 깨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 첫 번째는, 인종을 넘어선 계급 간 연대이다. 가난한 백인은 이제 전기톱 든 사이코 살인마가 아니라 이민 온 동양인 가족이 우물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따뜻한 이웃이다. 가난한 백인들의 교회는 더 이상 이단적 광신자의 모임이 아니라 헌금이 슬쩍 도난당해도 그냥 넘어가는 관용의 장소가 되었다. 

두 번째 메시지는,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의 유지다. 백인과 동양인이 교류한다고 하여 서로 섞이고 닮아가고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 과장된 친절도 불필요하다. 교양있는 - 그리고 때로는 위선적인 - 백인들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배우지 못한 백인 꼬마는 동양인 꼬마에게 ‘얼굴이 납작하다’고 말했지만, 이는 스타벅스 직원의 ‘눈찢기’ 표시와는 다르다. 각자의 다름을 신기하게 보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동양인 꼬마는 발끈했지만.

세 번째 메시지는 오리엔탈리즘의 거부다. 자연의 개척자요 이성의 화신으로 알려진 백인은 영화에서 오히려 ‘미신성’을 보여주었고 동양인은 과학을 신봉하며 ‘한국인은 머리를 쓴다’고 자부했다. 영화에서는 한국인들이야말로 오히려 서부 개척자로 보인다. 이는 또한 현재 세계에서 보여지는 아시아인들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생명과 영성의 회복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미나리로 상징되는 자연주의, 아픈 꼬마의 병 치유의 기적 등.

지금 우리는 영화 <미나리>와 관련하여 윤여정 배우의 수상에만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그 전에 왜 서구인들이 이 영화에 주목했을까, 그들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봤을까를 생각해보자. 또한 현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속출하고 있는데, 아시아인들은 그들에게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이제 아시아인들에게 어떤 이로 보이고 싶은 걸까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아마도 이제는 전기톱을 내려놓고, 수맥탐지기를 든 이웃으로 보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나미 한서대·정치사상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 경희사이버대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정치사상학회 이사, 한국NGO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국자유주의의 기원>, <한국의 보수와 수구>, <이념과 학살>, <한국시민사회사: 국가형성기 1945~196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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