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고정관념』…인지사학(認知史學)의 가능성을 전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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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고정관념』…인지사학(認知史學)의 가능성을 전망하다
  • 박재영 대구대학교·독일현대사
  • 승인 2021.05.1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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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역사와 고정관념(History and Stereotype)』 (박재영 지음, 선인, 412쪽. 2021. 03)

인간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대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작용기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객관적 실체로서의 ‘대상’과 인식의 결과물로서 우리 머릿속에 재구성된 ‘대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위와 같은 질문은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언어철학과 인지심리학의 연구대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대상> 또는 <타자>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 固定觀念)을 사회학적 의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이는 미국의 언론인 리프만(Walter Lippmann)이다. 그는 1922년 출간한 Public Opinion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스테레오타입을 ‘우리 머릿속의 이미지(pictures in our head)’라 정의하였다. 리프만에 있어서 스테레오타입이란 특정한 문화라는 기제에 의하여 미리 유형화되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어떠한 대상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이나 이미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역사학에서 스테레오타입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스테레오타입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 이성과 감정이 포괄적으로 작용하여 대상에 대한 주관적이고, 편향된 일반화의 형태로 나타나 사회집단 간의 대립과 충동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인종적 편견, 민족적 적대감, 종교적 대립, 성차별 등이 그것이다. 결국 인문·사회학적 연구대상들에 시간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면서 스테레오타입은 역사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역사학의 관심대상으로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중심에는 독일 올덴부르크 대학 역사연구소가 중심이 된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연구회(AHS)>가 있다. 동 연구회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역사적 스테레오타입연구(Historische Stereotypenforschung) 방법론의 정립을 위한 모색과 구체적인 사례연구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H. H. Hahn) 교수가 중심이 된 연구회의 활동은 독일 및 독일과 인접한 중·동유럽의 역사적 스테레오타입연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국내 역사학계에서의 소개와 논의도 최근에 와서야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역사적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맹아기에 속하지만 역사학의 각 분야에 걸쳐 연구자들의 관심을 자극할 만한 많은 이슈들이 있으며, 구체적이고 다양한 주제의 사례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연구 인력과 학문적 토양 역시 마련되어 있다고 사료된다. 학제간의 공동연구를 전제할 때, 역사적 스테레오타입의 연구 분야도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지난 2016년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출판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지난 3년 동안 <역사와 고정관념>이라는 주제의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이번에 출간된 『역사와 고정관념』은 그 결과물이라 하겠다. 이 책의 내용은 이론과 사례연구로 구분할 수 있겠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으며, 기 발표 논문 3편과 새롭게 작성한 논문 7편을 합하여 총 10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제1부 ‘고정관념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연구방법론’ 카테고리의 첫 번째 글 ‘역사적 스테레오타입연구란 무엇인가’는 지난 2008년 『역사학보』에 게재되었던 논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연구의 개념과 이론, 연구방법, 연구현황 및 전망에 해당한다. 두 번째 글에서는 역사교과서 분석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스테레오타입 인덱스(stereotype index)를 활용한 교과서 분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교과서 분석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편향성, 자민족중심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등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들을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저자는 고정관념지수를 수치화 할 수 있는 스테레오타입 인덱스를 적용한 새로운 역사교과서 분석틀을 제시하고 있다. 

제2부에서 제4부까지는 사례연구에 해당한다. 먼저 제2부 ‘영화와 역사 그리고 고정관념’에서는 <영화 ‘300’에 나타난 서구중심주의: 왜곡된 역사적 사실의 스테레오타입화(Stereotypisierung)>와 <영화 ‘La Haine’에 나타난 프랑스 다문화사회의 문제점>이라는 글을 통해서 서구중심주의적 역사인식과 프랑스 다문화사회의 소수자인 이주민들의 표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제3부 ‘구한말 한국을 바라본 독일인의 시선’에서는 고종의 시의(侍醫) 분쉬(R. Wunsch) 박사와 독일 쾰른신문 기자 겐테(G. Gente)가 남긴 저작을 통하여 그들의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파악하고 있다. 제4부는 냉전시대 동·서독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한국 이미지를 분석한 두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과문하지만 문헌 사료로써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동·서독에서 출판된 역사교과서의 한국 관련 내용을 각 시대별로 분류하여 서술내용의 변화를 분석하려는 연구는 저자의 시도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는 방법론적 측면에 있어서 특히 한국전쟁에 대한 동·서독 역사교과서의 서술내용이 냉전부터 최근까지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이를 통하여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프리즘이 역사적 사실의 해석과 교과서 서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증하고 있다. 제5부에서는 1970~1980년대에 걸쳐 주한 독일대사로 근무하며 한국의 험난한 정치 상황을 겪었던 주한 독일대사 위르겐 클라이너(Jürgen Kleiner)의 한국 이미지와 구동독 정권이 붕괴되는 1989년까지 주 북한 마지막 동독대사를 역임했던 주북한 동독대사 한스 마레츠키(Hans Maretzki)의 북한 이미지는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고 있다. 

역사와 고정관념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는 본문 외에도 이 책에서 독자들의 관심은 역사적 스테레오타입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인지사학(認知史學)의 가능성과 전망을 논하고 있는 <에필로그> 부분에 집중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인지사학은 현실세계의 투영이 아니라 개인 및 집단의 의식, 그리고 집단 내, 집단 간에 형성된 정형화된 표상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석하는 작업이다. 때문에 인지사학 연구는 왜곡되거나 변형되기 이전에 실재했던 사실에 대한 인식의 작용기제들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 사회적 영향 그리고 변화요인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지사학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재구성하는 작업(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이 아니며, ‘역사의 객관성’을 회의하고 역사의 ‘언어로서의 전환’을 지향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역사학과도 구별된다. 인지사학은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역사적 사실, 역사가, 역사 기록 사이의 인지적 상관관계)에 개입된 인식의 작용기제들(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표상, 이미지 등)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이론과 구별된다. 인지사학은 ‘역사에 대한 해석을 해석’하는 메타역사(Metahistory)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과 집단(민족, 인종, 종교, 젠더 등)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대립과 갈등 양상의 인지적·감정적 측면을 해석한다. 

저자의 연구가 최근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지사학(Cognitive History) 연구와는 독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연구방향과 연구내용이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는가도 관전 포인트다. 저자는 언어철학 및 인지심리학적 연구 성과와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연구를 종합적으로 재해석하고 체계화하여 인지사학의 가능성과 전망을 언급하고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때, 저자의 연구가 역사학의 학문적 효용을 제고하고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있어서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박재영 대구대학교·독일현대사

대구대학교 성산교양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일 Oldenburg 대학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연구전담교수, 한국독일사학회 편집이사, 동국대학교 역사교과서연구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역사와교육학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세계의 역사교과서 협의』, 『타자 인식과 상호 소통의 역사』, 『서양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생활문화로 보는 서양사』, 『동서양 역사 속의 다문화적 전개양상』, 『한국 역사 속의 문화적 다양성』(이상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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