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뭐길래...
상태바
이름이 뭐길래...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5.09 2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50)_ 이름이 뭐길래...

 

윤동주와 고종사촌인 송몽규,                                                            日에 윤동주 알린 이바라기 노리코

윤동주도 끝내 창씨개명을 했다. 평소동주(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슈)가 일본어로 바꾼 이름이다. 윤동주가 새로 창씨한 平沼는 파평 윤씨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본관에서 平을 취하고, 시조가 연못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에 근거하여 沼를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씨개명 후 그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그는 시 참회록(懺悔錄)을 지었다. 그럴 수 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문제는 1943년 그가 체포되기 전 체류하고 있던 하숙집 주소에 등장하는 알 수 없는 이름이다. ‘43-7 町’이라는 지번(地番) 다음에 적혀있는 ‘히라누마나가하루 방’이 그것이다. 짐작건대 히라누마는 윤동주의 새로운 創氏일 테고, 나가하루가 무엇인지 혹은 그 누군가의 이름이나 성씨일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머무는 하숙방 이름을 아무아무개의 방이라고 낭만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이면에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용기가 자리 잡고 있었을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라는 여류시인이 있기는 하다. 그녀는 시인 윤동주를 일본 내에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윤 시인이 옥사한 지 한참 지난 후에야 그를 알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결혼과 함께 여자는 남자의 것으로 성을 바꾼다. 그건 관습이다.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건 무엇보다도 일본 유학에 목적이 있어서다. 사람은 필요에 의해 어떤 행위를 선택한다. 그리고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런 면에서 정의는 일정치 않다. 그때그때 다르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일제 치하 말이 되면 웬만한 인사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가 없다. 애국자라면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어야 된다는 당위는 지나치다. 

지금의 시대는 영어로 이름을 지어도 지탄받지 않는 자유의 시대고, 일제 치하는 지금과는 시대적 상황이 달랐다. 이광수 선생도 결국 이름을 바꿔야 했고, 방정환 선생은 존경하는(?) 일본인 소파(小破)를 호로 삼았다. 현존하는 혐일 경향의 어떤 배우는 뜻밖에도, 아마 일본에서 태어나서였겠지만, 윤동주와 같은 ‘히라누마 도슈’라는 일본 이름을 지녔던 적이 있다.  

신라 말 명주(당시 강릉의 명칭)지방의 실력자 김순식(金順式 또는 荀息) 장군이 궁예 대신 새로운 국가 창업을 꿈꾸는 무인 왕건을 돕기로 하고 그와 손을 잡는다.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로 사벌주 지역의 성주였던 아자개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그 공로로 고려국 개국공신이 되어 928년 고려의 왕성을 하사받는다. 그 후 그의 집안은 김 씨가 아닌 왕 씨네로 바뀐다. 군주가 총신에게 내리는 사성 풍습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상한 것은 허월(許越)이라는 그의 부친의 이름이지만 미스터리를 풀 단서가 지금으로서는 부족하다.  

1943년 7월 14일, 윤동주는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절친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으며 윤동주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역시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일제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와 윤동주의 판결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에는 징역 2년 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은 존재의 상징이자 표상이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유령과도 같다. 사물 또한 이름을 지녀야만 비로소 구체적 존재가 된다. 고대 중국인들은 사물의 이름을 정한 것은 성인이고 가족 중 아들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조상의 신령이라고 여겼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우선 字를 지어 그에게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 후 가족이나 가문의 주요 구성원들이 모여 이름(名)을 짓고 조상의 사당에 고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조상의 이름으로 지은 名은 신성한 것이기에 함부로 부르지 않고 어릴 적 이름인 小字를 이름 대신 불렀다. 고대 갑골문과 금문을 보면 이름 名자의 윗부분은 제기에 담긴 고기를, 그리고 아랫부분은 제단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풍이 엄격한 집안에서는 名과, 名을 지닌 인격의 실체는 분리될 수 없다고 여겨 남에게 알리지 않고 족보나 호적에만 기입했다. 
                    

고대 갑골문, 금문, 설문해자에 보이는 名, 字, 姓

일본에서는 여자가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것은 자신을 허락할 때만 가능했다. 이름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중국 운남성과 태국, 라오스, 미안마 북부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아카족 남자들이 처음 만나면 자기 조상들의 이름을 대대로 암송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이 또한 이름으로써 자신의 실체적 존재를 입증하려는 것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