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의 정당성과 그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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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정당성과 그 토대
  • 김회권 숭실대·성서신학
  • 승인 2021.05.0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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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1997~1998년 IMF 경제위기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공화국 붕괴를 염려하는 선각자들(강남훈, 곽노완, 김종철, 최광은) 사이에서 국민소득 논의가 시작되었다(《녹색평론》 제131호 2013년 7-8월호). 20여 년 전부터 촉발된 기본소득 논의는,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저임금노동자들이나 실업자들의 대량 발생 사태를 본 북유럽식 보편복지주의 사상에 익숙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기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1990년대부터 유럽연합의 선구자적 사상가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퍼졌다. 앙드레 고르, 필리페 반 빠레이스, 브루스 에커만, 앤 알스톳 등 유럽 선진 복지국가 출신의 기본소득 주창자들의 사상이 약 20여 년 전부터 국내 진보사상가들에게 유입되었고, 국민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시장이나 선진 복지체제도 하층 국민의 빈곤화를 막을 길이 없다는 근본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국민의 소득박탈, 무산자화는 국가를 통제할 민주시민들의 결사체인 공화국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본다. 

그들은 국민 기본소득이 단지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시장거래, 부동산, 이자 및 임대노동, 투자금, 임노동 등으로 얻어지는 소득 외에 국가가 공화국적 정체를 지키기 위하여 국민들에게 줘야하는 국민배당금이라고 주장한다. 반 빠레이스, 브루스 애커만, 앤 알스톳 등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이 종래의 사회복지제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재산이나 건강, 취업 여부 혹은 장차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등, 일절 자격심사를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사회성원에게 일정한 돈을 주기적으로 평생 지급한다는 데 있다. 

브루스 애커만과 반 빠레이스 등이 쓴 <분배의 재구성>에서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본소득사상의 맹아단계를 추적할 수 있지만 유럽역사에서 이 기본소득론이 진지한 주목을 받으면서 등장한 지는 200년이 되었다고 본다. ‘지역수당(territorial dividend)’, ‘국가보너스(state bonus)’, ‘데모그란트(demogrant)’, ‘시민급여(citizen’s wage)’, ‘보편수당(universal benefit)’, ‘기본소득(basic income)’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이 기본소득 사상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도 인기를 누리며 대선후보들이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곧 잊혀져 갔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이 사상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유럽연합 전역에 걸쳐 대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기본소득 제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급진적인 보편적 복지의 전형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나라도 기초노령연금, 65세 이상 노인지하철 무료승차권, 장애인수당, 무상보육, 무상급식 등이 이미 시행 중인 보편복지시대에 돌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빈부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법적·사상적·제도적 안전장치가 전무해 사회구성원의 공화국에 대한 충실한 유대감이 와해되고 있다. 주권의식을 갖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공화국의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중 아무도 국부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열외자 취급받는 무산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장치가 국민기본소득이다. 

작년 1월부터 세계화된 코비드19 팬데믹은 ‘대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영업자들과 대면접촉형 노동자들의 경제적 호흡활동을 마비시키고 있다. 그 결과 코로나19 팬데믹은 그동안 우리나라 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정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외친 경제정책들을 좌초시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일자리 창출과 민간기업 고용 노동자들의 임금소득 상승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이루려고 했으나, 코로나 때문에 기업 자체의 고용창출 능력이 소멸되어 이 정책이 아무 소용없음이 드러났다. 반면 각종 규제완화를 통해 민간기업들의 부단한 성장을 통해 고용창출을 늘려 경제적 약자용 복지를 확충하려는 보수정파들의 ‘기업의존형 복지확장론’ 또한 코로나로 인한 세계 소비시장 동결로 그 의미를 잃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의 두 보수정당들 모두 ‘전례 없는 현금형 기본소득’ 정책을 시행하는 데 한목소리를 내었다. 

코로나 재난이 기본소득을 그토록 반대하던 완고한 기업-시장주의자들마저 설복시켜 기본소득을 시행하는 데 동의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코로나19 팬데믹 경제민주화를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을 소환하고 있다. 헌법 제1조, 23조, 그리고 119조 1항과 2항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적 신분을 강요당해서는 안 되는 자유시민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제119조 2항이 특별히 중요하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국가는 적정한 소득분배를 유지하면서 경제주체인 가계·기업·정부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이룰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주전 3세기의 로마 공화주의자였던 스키피오는 ‘공화국은 자유시민들의 상호부조와 상호결속으로 성립되며, 시민들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줄 진정한 공의가 없는 곳에서는 공화국이 있을 수 없다’라고 갈파했다. 경제적 재화와 용역을 배분하고 사용함에서 있어서 “정의가 없는 곳에는 공화국도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레위기 25:23(모든 재부의 원천인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과 신명기 15:11(땅에서 나는 모든 소출을 누림에 있어서 어떤 사람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도 우리나라 헌법 119조와 스키피오의 공화국론을 지지한다. 이 두 성경 구절은 “땅의 만민귀속”과 “땅 소출 만민향유권”을 주장함으로써 기본소득론을 지지한다. 장차 제정될 헌법은 대한민국에 속한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만드는 “국민기본소득 향유권” 조항을 품어야 한다. 


김회권 숭실대·성서신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며, 서울 가향교회 신학지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김회권 목사 청년 설교 1·2·3·4』,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2』, 『하나님의 도성, 그 빛과 그림자』,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성서주석 이사야 I』, 『현대인과 성서』(공저), 『하나님 나라 복음』(공저) 등이 있으며, 『현대성서주석 시리즈』 중 『신명기』, 『열왕기상·하』, 『예레미야』, 『아가』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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