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인문학, 무거운 인문학 그리고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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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인문학, 무거운 인문학 그리고 움직임
  •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 승인 2021.05.0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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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준 칼럼]_ 사인사색

인문학 위기 담론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인문학자들은 내일도 그 노래를 부를 것이다. 엄숙하게, 때에 따라서는 직업적 의무감에서 나오는 건조한 목소리로 암송하듯이. 동기는 하나지만 음색과 톤은 제각각으로 노래는 계속된다. 2006년 9월의 어느 날에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위기선언이 있었다. 그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명맥만 유지하는 학문 후속 세대, 입학자원들의 인문학 외면, 이어지는 폐과 사태들. 어제처럼 인문학 위기선언은 오늘도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다. 조금 더 무겁고 어두운 목소리로. 사태를 더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인문학의 죽음 테제를 내세우고픈 유혹에 빠지고 싶은 인문학자들이 있으나,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이 사회가, 한국 대학이, 인문학자들이 정녕 어느 만큼 인문학을 사랑했고 인문학적 정신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왔는지를. 느닷없이 과장된 몸짓과 애도는 드라마의 몫이어야 하지 인문정신 있는 인문학자의 일이 아니다.

선언과 애도 속에서 일군의 인문학자들은 ‘그사이 할 만큼 했다’라고 자위한다. 그들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문화콘텐츠학과 등의 사례를 들며 인문학의 콘텐츠화를 통한 생존 시도를 언급한다. 그러한 논조는 인문학 기반의 융복합 교육, 디지털 인문학의 구축시도 등이 골방 인문학의 연명치료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주장을 수반하며 고지식한 인문학자들과 이론생산 능력의 상관성 결여를 지적한다. ‘누구나 자존심’이란 손쉬운 선택 뒤의 자기기만적 고매함을 고발하고 싶어 한다. 이들이 비판하는 인문학자 그룹은 애초에 인문학이란 무거운 옷을 입고 타협할 수 없는 자유 정신을 머리와 가슴에 담그고 사는 자의 자화상을 눈앞에 두고 산다. 이 무거운 인문학 수행자들은 ‘가벼운 인문학’ 행위자들을 냉소한다. ‘구름’ 위에서 읊조리는 무거운 인문학자들의 레퍼토리: ‘너희들의 대응이 간판만 달랐지, 똑같은 메뉴 파는 신장개업 가게와 뭐가 다르냐’, ‘자본 논리에 의해 야기된 인문학 위기에 대응하는 너희들의 방식이 인문정신 없는 인문교육 아니냐’, ‘인문학이 무슨 기생식물도 아니고. 신학에 봉사하고 과학에 봉사하더니 이제 산업의 봉사자로 자처해야 하나’, ‘언젠가는 다시 인문학의 시대가 오지 않겠나. 장렬한 전사도 거쳐야 할 운명이라면…. 받자, 그 운명.’ 

인문학 위기선언 이전에도 가벼운 인문학과 무거운 인문학은 있었으며 두 그룹은 각각의 독백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인문학의 위기가 이들을 조우하게 만들며 서로의 시선을 의식하게 한다. 이 시선의 정체는 게으른 자를 보는 시선과 가벼운 자를 보는 시선의 교차이다. 시선의 교차는 뜨겁고 불꽃을 피우기도 하며 혐오와 냉소의 내재화를 강화시킨다. 그런데 이것도 그들 중 소수의 문제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인문학 직업 교수는 평화의 시대를 살아간다. 인문정신 없는 논문제작 기술자로, 상황주의에 매몰된 도덕주의적 경세가로, 그것도 아니면 자유와 개인의 이름으로 포장된 남의 별에 거주하는 미니멀리스트로. 이러한 풍경은 어제, 오늘처럼 내일도 반복될 것이다. 

가벼운 인문학과 무거운 인문학 모두가 위기와 죽음을 말하는 지금, 인문학자인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지금처럼 각자의 길을 가야 하나? 예정조화를 믿으며? 인문교육 당위론 제단 위에 협력만능이란 향을 피워야 하나? 학부 인문학의 초경량화와 더 무거운 대학원 인문학이란 미심쩍은 이원전략을? 많은 대학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수 있는 교양대학과 인문대학 통합의 선제적 조치? 학과 벽 허물기를 통한 자력갱생? 인문대학 간 학점인정과 교환학생 제도 실질화? 제도적 보완책은 생명 연장 장치 효과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답이 없다. 상황과 문제의 성격상 누구도 답을 쉽게 제시할 수 없다. 위기선언 이후 15년의 세월이 그것을 말해준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2006년 당시 통용된 ‘위기의 항시성 속의 생명력 예찬’과 같은 한가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분명한 것은 각자 하든 그룹 내 협력하든, 그룹 간 적대와 협력을 하든 가벼운 인문학과 무거운 인문학은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움직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인문학자 각자의 과제이며 두 그룹의 과제이다. 이 움직임은 이전보다 더 격렬하고 더 과격해야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입학자원의 거대한 감소라는 쓰나미를 피해 살아남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다. 움직임은 애초에 인문학자의 자기 정체성이다. 사유가 ‘최고의 활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사유가 가장 생산적인 인문학적 행위라는 말과 같다. 실천적 지혜 타령 이전에 움직여야 한다. 그럴 때 문제해결의 실천적 지혜가 사유를 뚫고 나와 ‘~ 대한 가능성’이란 돗자리를 만든다.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철학교수로 베를린 자유대에서 아도르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동서철학회 부회장, 현대유럽철학 편집위원,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대전인문예술포럼 부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사회철학, 사회이론, 문화예술철학, 고전교육 등이다. 저서로는 『부정과 유토피아』,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 『아도르노의 문화철학』,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 『역사철학, 21세기와 대화하다』(공저) 등이 있으며, 그 외 고전교육 및 예술 관련 책도 다수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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