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학문이란 실제로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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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학문이란 실제로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1.05.03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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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어보(초판본) | 정약전 지음 | 권경순·김광년 옮김 | 더스토리 | 356쪽

《자산어보》는 1801년(순조1) 신유박해 때 천주쟁이로 모함을 받아서 흑산도로 유배된 손암 정약전이,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섬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우리 바다의 우리 물고기 226종’의 정보들을 4종(55류)으로 분류해서 3권으로 묶은 책이다. 

“오징어 먹물로 쓴 글자는, 흔적이 사라져도 바닷물에 담그면 또렷이 살아난다.”, “영남산 청어의 등골뼈는 74마디고, 호남산 청어의 등골뼈는 53마디다.”, “아귀는 입술의 낚싯대로 먹잇감을 잡아먹으니 조사어(낚싯줄 물고기)라 부르겠다.” 이처럼 우리 바다의 우리 물고기 226종을 시시콜콜한 쓰임새까지 총망라해서 정리했다.

1권은 ‘비늘이 있는 종류(鱗類:민어·숭어·날치·상어 등)’, 2권은 ‘비늘이 없는 종류(無鱗類 :복어·오징어·해삼·고래 등)’와 ‘껍데기가 있는 종류(介類:거북·게·조개·불가사리 등)’, 3권은 ‘기타 바다 생물(雜類:지렁이·갈매기·물범·미역·톳·파래 등)’을 적었다. 본서는 번역문과 함께 뒷부분에 한자어 원문도 수록했다.

자산(玆山)어보란 곧 ‘흑산(黑山)도의 물고기 사전’이라는 뜻이다. ‘검을 흑(黑)’ 자에서 캄캄한 앞날이 연상될뿐더러 당시 흑산도는 살아 나오기 힘든 유배지로 악명이 높으니, 걱정할 가족들을 위해 편지에 ‘자(玆)’로 고쳐쓰면서 붙은 이름이다. 1814년 흑산도의 어부 장창대(이름은 덕순)와의 협업으로 완성되었으나 2년 후 손암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원고가 유실될 뻔했는데, 형의 집필 작업을 편지로 꾸준히 응원해왔던 동생 다산 정약용이 급히 제자 이청을 보내서 원고들을 수습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결국 다산이 책으로 엮었는데, 이때 이청이 전체 글의 40%가 넘는 분량을 첨언했다. 요컨대 이 책은 정약전-정약용 형제간의 우애와 정약전-장창대 두 사람간의 우정에 제자 이청의 노력까지 더해진, 여러 인연들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기존에 이 책은 손암의 학문적 관심의 결과물로, 또 조선 후기 해양 생물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놓은 백과사전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이 책에 담기 여러 사람들의 인연은 별로 주목되지 못했다. 마침 근래에 손암과 장덕순의 인연에 주목한 영화 <자산어보>가 제작되어 이 책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자산어보》를 읽어 보면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것의 정체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정약전은 ‘양반다움(예법)’만 주장하는 경직된 성리학 사회에서 과감히 ‘실생활에의 유용성’을 택한 실학자로서, 중국 서책 속에서 읽은 어류가 아니라 ‘우리 바다에서 우리 어부들이 잡는 물고기들’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후세인들이 보완하여 병을 치료하고 재화에 이롭게 활용하여’ 어떻게든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애민정신이 책 전체에 가득하다.

중국 책을 본뜨지 않고 흑산도의 뱃사람들과 함께 물고기를 채집해서 관찰하고 그들의 상스러운 표현까지도 경청해 옮겨 적었기에, ‘한자’라는 한계만 조금 극복하면 무척 흥미진진한 책이다. 오징어 먹물로 비밀편지를 쓸 수 있다거나 청어의 등뼈 개수가 영호남에 따라 다르다는 내용은 흡사 셜록 홈즈 같은 탐구정신이 연상되고, 짱뚱어와 말미잘의 이름 유래나 날치와 고등어 낚시법에서는 민간의 재기발랄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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