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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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벌금
  • 신중섭 강원대·철학
  • 승인 2021.05.0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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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공정은 정의와 함께 좋은 사회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긴 하지만, 정의와 공정을 이론적으로 따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대학 입시에서 농어촌 특별전형을 하는 것은 공정하지만, 교직원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국립사범대학교 졸업생을 국공립 중고등학교에 우선 발령을 내고, 사립사범대학교 졸업생에게만 임용시험을 치르게 한다면 그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90년도 이전에는 그렇게 하였다. 공정과 불공정, 정의와 부정의, 합법과 불법에 대한 보편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최근에 정치권에서 벌금과 공정 사이의 관계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한 정치인이 ‘재산비례벌금제’가 공정하다고 주장하자, 다른 정치인이 이를 비판하고 나왔다. ‘재산비례벌금제’를 주장한 이 정치인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액수의 돈을 주자는 기본소득을 주장해 왔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면서 동일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이 정치인은 아예 ‘재산비례벌금제’를 ‘공정벌금제’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의 재산 정도에 따라 벌금을 달리 부과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다.

이에 다른 정치인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주장하시는 분이 벌금은 차등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벌금을 소득, 재산에 따라 차등을 둔다면, 똑같은 이치로 정부가 돈을 줄 때는 당연히 가난한 서민에게 더 주어야 한다.”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재산비례벌금’과 기본소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벌금을 재산에 따라 차등으로 해야 한다면 선별적 복지를 하는 것이 논리에 맞다는 것이다. 
 
이에 또 다른 정치인은 “저는 분명히 저소득층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저소득층 대상으로 벌금액을 감경하는 것에 찬성하나, 소득이나 재산에 비례시키는 것은 사회적 수용성을 고려해 (지금으로서)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핀란드를 비롯해 몇몇 국가에서 사용하는 일수벌금제(day-fine)의 다른 명칭이 엄연히 소득기반벌금제(income based fine)인데도 굳이 '재산비례'라 왜곡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소득 대신에 재산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차등 벌금제를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차등으로 하는 것이 공정한지, 동등하게 하는 것이 공정한지는 사안에 따라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소득세, 법인세, 재산세, 종부세, 상속세의 경우에는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 차등을 둔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세는 동등하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소주 한 병을 마실 때는 동일한 세금을 낸다. 물론 고급술에는 높은 세율을 적용하지만, 재산에 따라 고급술의 값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 공납금은 재산에 관계없이 동일하지만, 국가장학금은 부모의 소득 구간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철학적 관점에서 ‘세금과 벌금이, 복지와 벌금이 동일한 범주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세금과 벌금, 복지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면 소득이나 재산의 정도에 따라 모두 차등으로 하거나 모두 동일하게 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는 동일하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차등으로 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이런 논의는 바로 세금과 벌금, 복지의 본질이 무엇인가와 연결된다. 우리는 무슨 근거에서 세금과 복지를 차등적으로 하는가? 벌금은 왜 부과하는가? 

세금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담세자의 능력을 고려해서 차등적으로 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재산이 많은 사람은 많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힘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벌금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벌금은 법규를 어긴 것에 대한 처벌의 성격이 강하다. 나아가 예방적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 벌금을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한다면 동일한 죄에 대한 벌도 차등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 법을 어긴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는 법 규정은 폐기되고, 재산에 따라 징역이나 벌금의 정도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벌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이 철학적 논쟁으로 옮겨가면 정답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논쟁이 철학적으로 심화되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지성적으로 되고, 정치가 성숙하게 될 것이다. 


신중섭 강원대·철학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한국과학철학회 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포퍼의 현대의 과학철학』,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현대철학의 흐름』(공저), 『철학과 논쟁』(공저),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공저), 옮긴 책으로는 『새로운 과학철학』, 『치명적 자만』, 『무한한 다양성을 위하여』, 『상상의 세계』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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