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찬란한 고대문화를 파괴한 ‘암흑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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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찬란한 고대문화를 파괴한 ‘암흑기’인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4.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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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이야기: 신들과 전쟁, 기사들의 시대 | 안인희 지음 | 지식서재 | 400쪽

오늘날의 유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세 이야기 36편을 역사순으로 소개해 주는 책이다. 중세는 흔히 암흑시대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매우 역동적으로 발전하던 중요한 시대였다. 이 시대에 현대 유럽을 위한 수많은 것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중세는 역사의 무대가 유럽 대륙 전체로 확대된 “진정한 유럽 역사의 시작”이자, 이교 신들과의 싸움, 기독교 내분, 교황과 황제, 교황과 교황의 싸움이 펼쳐진 “종교 전쟁의 시대”이며, 종교적 전설과 기적, 기사들의 모험을 둘러싼 “환상의 시대”였다. 또한 중세 말기에는 이성과 인간 중심 사유로 돌아오는 “르네상스” 현상이 나타나고, 중세 끄트머리에 지중해 중심 사유에서 벗어나 대서양을 토대로 세계로 나아간 “제국주의”가 출발하기도 했다. 

중세는 흔히 ‘위대한 고대’와 ‘위대한 근현대’의 중간에 낀 “별 볼 일 없는” 시대로 여겨져 왔다. 이 시대에 과거의 찬란했던 고대 문화가 북방 야만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동시에 현대 유럽을 위한 수많은 사회적 장치와 사유, 가치관 등이 형성되기도 했다. 암흑시대처럼 보이는 중세는 사실 매우 역동적으로 발전하던 놀랍고 중요한 시대였다.

중세 초에 유럽의 새 주인공으로 등장한 야만적인 북방 게르만 사람들이 따뜻한 남부 유럽으로 내려와 과거의 로마 제국 영토를 제멋대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그리스 로마 정신을 계승했으며, 기독교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유럽 정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계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정신과 기독교, 이 두 가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유럽 문화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중세는 또한 진짜 유럽의 역사가 시작된 시기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주요 무대는 유럽의 남부, 소아시아반도, 레반트 지역(아시아), 북부 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중세가 시작되면서 북쪽과 동쪽에서 게르만족들이 몰려와 서로마 제국 영토에 프랑크 왕국 등을 세우고,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 세력들도 밀려 들어온다. 유럽 대륙 전체가 역사의 무대가 되고 남유럽 사람들만이 아닌 북유럽 사람들, 곧 게르만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제야 본격적인 전체 유럽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을 세운 게르만족(프랑크족) 수장 클로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크 왕국의 궁내대신이던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아무것도 안 하는 (메로빙) 왕들”의 왕좌를 빼앗아 새 왕조인 카롤링 왕조를 세우고, 약탈자 바이킹이 해적질을 일삼다가 프랑스 북부 해안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노르만 기사가 되는 등 흥미진진한 일화가 전개된다.

고대와 중세를 이어준 핵심 이념인 기독교는 7세기 아랍 세계에서 출발한 이슬람교와 충돌했다. 양측 사이의 갈등은 11세기 말의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다. 싸움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동로마 제국의 동방 기독교(=그리스정교)와 서로마 제국의 서방 기독교(=로마가톨릭) 사이에는 정통성 논쟁이 벌어졌다. 

11~13세기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온갖 모험 이야기를 낳았는데,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서 12세기 중반부터 기사(knight)문학이 꽃피게 된다. 신앙의 시대인 중세에는 수많은 종교적 전설들과 성인(聖人) 열전, 기적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이런 미신과 상상력이 문학작품에 반영되면서 판타지(환상) 특성을 갖게 되었다.

중세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단인 성전기사단은 성지를 방어하고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거기에 순례자들을 위한 은행 업무, 대부업까지 손대면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심지어 무슬림들도 성전기사단의 은행 서비스를 이용할 정도였다. 재력과 은행에 군사력까지 갖춘 기사단은 각 나라 왕들의 위협이 되었고, 결국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해체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성전기사단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영화화됨) 등 대중문화에서 음모론과 관련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성전기사단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또 볼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페스트(흑사병)의 확산, 콘스탄티노플의 몰락 등 말기적 증상들이 나타난다. 동시에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들도 엿보이는데, 대표적인 예가 르네상스 현상이다. 사람들은 환상과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과 현실로 돌아와서 합리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합리화 과정), 그 과정에서 안내자 역할을 한 것이 고대의 사유와 유산이다.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르네상스와 그 직후에는 수많은 발명과 기술적 혁신과 과학적 사유들이 나타났다. 15세기 중엽에 등장한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성서를 널리 보급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유럽은 중세가 끝나는 시점에서 이러한 성과들을 기반으로 지중해에서 벗어나 대서양을 토대로 세계로 눈길을 돌렸다. 제국주의가 출발한 것이다. 이후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전 세계의 변화는 엄청나게 빠르고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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