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 - 헤겔의 역사 정신이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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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 - 헤겔의 역사 정신이 전하는 메시지
  • 고현석기자
  • 승인 2021.04.2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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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1강〉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1강〉 _ 유헌식 단국대학교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법철학> <역사철학 강의>」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41강 유헌식 교수(단국대 철학과)의 강연 중 서론과 결론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 - 헤겔의 역사 정신이 전하는 메시지

유헌식 교수는 “서양 고전 철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 『법철학』 그리고 『역사철학 강의』를 소개한다. 물론 방대한 것을 다 다룰 수는 없어서 “정신(이성/개념), 현실 그리고 역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루겠다고 제한을 둔 채. 그렇게 볼 때 헤겔의 세 저술이 “모두 경험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철학의 1차 언어 곧 ‘개념’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정신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를 통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를 통해 헤겔이 “철학이 전통적으로 의지해왔던 ‘실체’와 칸트의 ‘물자체’를 ‘공허한 추상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킨바 “천상에 있던 철학의 개념”이 지상에 발을 붙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즉 철학과 현실의 통일로 인해 “직접성과 매개의 통일 그리고 초월과 내재의 통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3월 27일, 유헌식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br>
지난 3월 27일, 유헌식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들어가는 말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헤겔 철학은 ‘고전 철학의 정점’이라 일컬어진다. 그 이유는 플라톤의 이성 철학과 기독교의 정신 철학 그리고 데카르트 이후 칸트 류의 주체성 철학이 헤겔 철학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강연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 세 요소가 헤겔의 『정신현상학』, 『법철학』 그리고 『역사철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피는 데 있다. 그런데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정신(이성/개념), 현실 그리고 역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1. 정신과 현실의 통일

‘학문’으로서 철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철학은 다른 개별 학문들과 어떻게 다른가?’ 헤겔은 ‘학문으로서 철학’의 특징을 체계(System)와 개념(Begriff)에서 찾는다. 그러면 ‘체계’의 출발점은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그는 피히테의 절대 자아와 셸링의 무차별적 동일자에 눈을 돌려 ‘총체성’ 곧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준거점’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이 준거점이 ‘고정된 점’일 경우 체계는 전체를 포괄하지 못할뿐더러 ‘살아 있는 전체’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체계는 ‘과정을 포함한 전체’여야 하며, 그런 한에서 ‘체계성을 띤 개념의 학’으로서 철학은 지적 직관이나 경험적 일반화에 근거할 수 없다.

이렇게 헤겔은 잠정적으로 전체를 품으면서도 전체 자체가 스스로 운동하여 자기를 전개할 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자기를 알고 완성할 수 있는 존재를 구상한다. 이 존재는 철학의 개념을 매개로 원환 운동하여 수미상관(首尾相關)하는 정합성을 띨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개념의 운동을 매개로 하여 자기를 완결할 수 있는 주체를 헤겔은 ‘정신(Geist)’으로 규정한다.

정신은 즉자존재, 즉 자기 자신에 붙어 있어(an sich) 자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존재에서 출발해, 자기를 알기 위해 자기를 이분하여 타자로 만들어 대면하여(für sich) 바라본 뒤, 이 분열을 지양하여 자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an und für sich). ‘즉자 → 대자 → 즉자대자’의 과정은 정신의 기본적인 운동 구조로서 헤겔 변증법을 가장 단순화한 도식이다.

그런데 이 도식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이보다 상위에서 정신의 운동을 표현하는 용어는 직접성(Unmittelbarkeit)과 매개(Vermittlung)다. ‘직접성’으로 번역하는 독일어 ‘Un-mittelbarkeit’는 본래 ‘매개할 수 없는 성질’을 뜻하며, 어떤 수단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성질이라는 의미에서 헤겔은 이를 ‘절대적 단순성’이라고 표현한다. 개념으로 매개되지 않아야 절대적이고 전체를 포괄할 수 있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철학의 출발선에 있는 정신은 직접적인 것이어야 한다. 직접성은 즉자 상태에 있는 정신의 성질이다.

즉자적인 정신은 이제 매개되어야 한다. 매개되지 않으면 정신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매개는 크게 두 차례의 부정으로 진행된다.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즉자 단계에서 정신은 자기를 알기 위해 자기를 분열/구별(1차 부정)하는 대자 단계를 거친 뒤 양자의 대립/모순을 지양(2차 부정)하여 자기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즉자대자 단계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중 부정이 곧 ‘매개’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 변증법은 ‘직접성과 매개의 변증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직접성과 매개의 관계는 개념의 활동으로 진행되며, 이를 통하여 최초의 비매개적이고 무규정적인 정신은 ‘내용’을 갖고 복귀한다. 자기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빈곤한 정신이 풍요롭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헤겔은 ‘사변적(spekulativ)’이라 부른다. 

헤겔이 ‘사변’에 착상하는 데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이 컸다. 헤겔의 ‘사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셸링으로, 그에 따르면 “표상과 대상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知) 자체 안에 양자가 근원적으로 하나가 되는 점(點), 또는 존재와 표상의 완벽한 동일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없으면 전적으로 해명이 불가능하다.” 이 점은 존재와 표상의 무차별적/무관심한 절대적 동일점으로서 이를 셸링은 ‘사변의 점(spekulativer Punkt)’이라 부른다. 하지만 헤겔은 셸링의 사변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개념이 매개자로 활동하지 않는 한 우리는 표상과 대상의 동일성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헤겔의 매개 철학이 등장한다. 헤겔은 매개를 개입시킴으로써 정신의 운동과정을 ‘(추상적) 직접성→매개→(구체적) 직접성’이라는 원환 구조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 구조는 정신(주체)의 자기 관계적 구별(der sich auf sich beziehende Unterschied)로서 여기서 정신은 동일적이면서 동시에 비동일적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신이 자기관계를 통하여 자기(동일성)와 타자(비동일성)를 함께 정립한다는 사실은 다음의 의문을 남긴다. 최초의 직접적인 것은 왜/어떻게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헤겔은 피히테의 ‘자아의 자기동일적 반성활동’, 즉 자기동일적인 명제는 자체적으로 이미 구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끌어낸다. 하지만 자아의 정립 활동에는 동일성과 차이성이 모두 작동하고 있는 데서 헤겔은 ‘사변적 문장’의 전형을 본다. 여기서 헤겔은 직접적인 것이 지닌 절대적 구별성의 근거를 그것의 절대적 부정성으로 파악하고 직접적인 것의 이러한 자기 매개(부정)적인 운동 구조를 자기 관계적 부정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최초의 존재(정신)가 스스로 운동해야 할 이유는 이 설명만으로 충분치 않다. 정신의 자기 구별(자기 부정)은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자기 완결’에 이르기 위해서 내용을 지녀야 하는데 내용은 특정한 목적을 지향할 때만 산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개 단계에서 출현하는 대립태(부정태)는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왜/어떻게 새로운 긍정(종합)을 낳는가? 여기서 직접적인 정신이 지향하는 방향(목적)과 자기 부정의 생산성이 초점이 된다. 우선 운동의 목적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되기(das zu sich selbst Werden)’이다. 직접적인 전체는 자기 매개(부정)를 거쳐 내용을 지닌 채 다시 최초의 자기로 복귀(생성)해야 한다. 정신의 자기 매개는 정신의 타자(他者)화를 수반하는데, 이때 타자는 특정한 형태를 지닌 어떤 것(현존재)으로 나타난다. 이 현존재는 정신의 ‘직접적 현존재’라는 점에서 겉으로는 자기동일적으로 보이지만, 정신의 ‘절대적 부정성’의 산물인 한에서 속으로는 이미 ‘분열’되어 있다. 매개는 바로 이렇게 ‘내적으로 분열된 현존재(주체)’의 자기 극복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하여 정신은 내용을 갖게 된다.

‘내적으로 분열된 현존재’는 스스로 ‘부정’해야 한다. 분열은 정신의 뜻/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부정’은 정신의 자기 매개에 필수적이다. 매개는 부정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수반해야 한다. 정신의 현존재가 행하는 부정을 통하여 생산적인 결과가 산출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정을 헤겔은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이라 부른다. 규정적 부정은 보통 ‘지양(Aufheben)’으로 알려져 있다. 규정적 부정에서 ‘규정적’은 ‘한정적’과 ‘긍정적’이라는 두 의미를 지닌다. 부정은 특정한 내용의 부정과 긍정이라는 양면성을 띤다. 규정적 부정은 주체가 ‘자기되기’라는 생성 목적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규정적 부정은 직접성의 자기 매개를 추진하여 부정이 긍정적인 내용을 산출하게 함으로써 ‘사변’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구현한다. ‘사변’은 일반적으로 정신의 진리가 드러나는 전(全) 과정을 뜻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립과 모순이 지양되는 종합(통일)의 단계만을 지시하기도 한다. 헤겔 철학의 특징이 이원적 대립의 극복(사변)에 있다고 할 때, 규정적 부정의 생산적 기능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의 자기관계성은 정신의 현실성(역사성)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다. 헤겔이 ‘정신’을 최상위 주체로 설정한 이유는 정신만이 ‘자기 관계적’이라는 데 있다. ‘자기 관계하는 존재’는 자기 원인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로서 무한자(절대자) 곧 실체이다. 여기서 헤겔은 독일 관념론의 자아 개념과 기독교의 정신 개념을 접목하여, 스스로 활동함으로써 자기를 완결하는 실체를 설정한다. ‘실체는 또한 주체이다’라는 『정신현상학』의 명제는 실체의 자기 운동성뿐만 아니라 자기 부정성을 포함한다. 활동하는 실체로서 정신은 추상적인 자기를 부정해야만 구체적인 자기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자기 대상화, 자기 타자화, 자기 외화는 정신의 ‘자기되기’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정신의 대상화 또는 타자화는 초월적인 자기 부정으로서, 곧 경험적인 자기의 정립을 뜻한다. 형이상학적(초월적) 주체로서 정신은 이제 스스로 경험적 현실(역사)로 드러나야 한다. 공허한 이념으로만 존재하던 주체(형식)는 경험적 현실을 통하여 자신의 내용을 채워야 한다. 정신의 자기관계성은 그 자체로는 ‘나=나’라는 공허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아 글자 그대로 ‘절대적’일 수 없다. ‘절대적’이기 위해서 정신은 (추상적) 이념이라는 명(名)과 (구체적) 내용이라는 실(實)을 겸비해야 한다. 정신의 이념(이성)이 현실의 경험으로 드러나고, 그 경험을 자기로 인식할 때 비로소 정신은 참된 자기에 이르러 자유로워진다. 

헤겔은 이성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철학’은 현실(역사)을 떠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게 ‘철학’은 곧 ‘현실 철학’이고 ‘역사 철학’이다. 헤겔 철학에 붙이는 다양한 명칭 가운데 ‘객관적 관념론’이 가장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철학의 현장주의자이다. 헤겔의 철학은 현장을 벗어나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지 않는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사실 관계는 현장에서 입증하라는 말이다. 현실은 진리의 심판대이다.

헤겔은 “현실에 대한 철학의 위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이성적인 것의 근원적 탐구라는 점에서 현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활동이지, 신이나 알 법하거나 누군가 일면적이고 공허한 추론의 오류를 저지르며 안다고 말하는 피안의 것을 파악하는 활동이 아니다.” 이 대목 조금 뒤에 『법철학』의 유명한 명구 “이성적인 것, 그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 그것은 이성적이다”가 이어진다. 결국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을 벗어나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의미 없고 우연으로 보이는 현실 배후에는 현실을 지탱하는 이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점에서 헤겔의 ‘현실’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이성은 어떤 근거에서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들어오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칸트의 경험 개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초월적) 연역을 통하여 ‘경험은 경험 이상이다’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현상계에 국한하여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구상력(상상력)의 도식과 오성(지성)의 원칙들을 제시함으로써 결국 ‘개념(범주)’이 경험에 이미 항상 선행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런데 여기서 오성의 개념화 활동을 오성이 직관된 잡다(雜多)에 개념을 부과하는 ‘주관적’ 활동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적어도 현상계에는 개념에 상응하는 사태(객관)가 존재해야만 현상계에 대한 학적 인식은 보편타당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오성의 개념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다. 이 사실을 경험 세계 일반에 대한 지(知)의 문제로 전환시킨 인물이 헤겔이다. 그리하여 헤겔의 ‘개념’은 칸트의 의미에서 현상계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 배후에서 현상을 촉발하는 진리로서 기능한다. 칸트의 전범에 따라 개념은 경험을 경험 이상으로 만들어 현상을 객관적으로 지탱하며 이 개념을 발견하는 일이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의 과제가 된다. 이 과제를 본격적으로 수행한 작업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맺는 말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이렇게 맺고 있다. “양자(자유로운 현존재의 ‘역사’와 ‘현상하는 지의 학문’: 필자)가 합쳐져 결국 ‘개념으로 파악된 역사’가 되는데, 이는 절대정신의 기억이며 골고다의 형장으로서 … 절대정신의 왕좌의 현실이고 진리이며 확신이다. 이 정신의 왕국에서 정신의 무한성이 거품처럼 뿜어 오른다.”

다음으로, 『법철학』은 이렇게 맺는다. “여기서 정신적인 것은 자신의 천상의 존재를 … 통속적인 세속으로 격하시키는 반면, 세속적인 것은 자신의 추상적인 대자존재를 이성적 존재와 지의 사상과 원리로 격상시킴으로써 양자의 대립은 즉자적으로 힘없이 사라져버린다.”

또한 『역사철학』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전개과정의 세계사와 정신의 현실적인 생성이야말로 … 진정한 변신론(Theodizee), 즉 역사 안에서 신을 정당화하는 일이다. 이러한 통찰만이 정신을 세계사 그리고 현실과 화해시킬 수 있으니, 역사에서 발생하는 것은 … 신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 자신의 작품이다.”

이상의 세 인용문에서 헤겔의 사유 체계에서 절대정신으로서 신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주관정신과 객관정신(세계정신도 포함)의 활동 배후에는 항상 절대정신이 동행한다. 하지만 헤겔이 절대정신의 분류에서 ‘철학’을 ‘종교’ 뒤에 배치하여 절대정신의 최종주자로 설정함으로써, 기독교의 말씀(logos)을 철학의 이성(nous)으로 지양한 점을 고려할 때, 이 맥락에서 절대정신은 철학적 성격을 띤 초월자, 즉 ‘철학의 개념으로 활동하는 절대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절대정신으로서 철학의 ‘개념’은 주관정신과 객관정신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한 준거점이다. 이렇게 볼 때 개인(주관정신)의 지는 단순히 ‘주관적인 지’가 아니며, 공동체(객관정신)의 규범 체계는 유한한 인간의 자의적인 고안물이 아니고, 세계사(세계정신)의 진행은 우발적인 사건들의 집적물이 아니다. 이 모든 사항의 배후에는 절대자의 이성 또는 의지가 동행하고 있다. 그래서 헤겔 『논리의 학』의 ‘진무한(眞無限)’ 개념은 유한자와 무한자(절대자)의 이러한 상호 유대 또는 동일성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절대정신으로서 철학의 개념이 1차 언어라면, 경험 세계의 언어는 2차 언어이다. 이 강의에서 다룬 세 저술은 모두 경험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철학의 1차 언어 곧 ‘개념’으로 서술한다. 정신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를 통일시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통일’이 중요하다. ‘통일’은 1차 언어로 2차 언어를 덮어씌우는 활동이 아니다. ‘통일’은 결과적인 것이다. 헤겔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의지해왔던 ‘실체’와 칸트의 ‘물자체’를 ‘공허한 추상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천상에 있던 철학의 개념이 이제 지상에 발을 붙인다. 무시간적 이념이 시간성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의 뼈대는 피를 얻고, 현실의 피는 뼈대를 얻는다. 절대자란 그 자체로는 추상적 이념에 지나지 않아서 구체적 형태는 인간의 사유와 행위를 통해 갖춘다.

철학과 현실의 통일은 직접성과 매개의 통일 그리고 초월과 내재의 통일로 옮겨도 무방하다. 철학의 개념은 그 자체로는 공허하다. ‘경험(직관)으로 매개되지 않은 개념은 공허하다’는 칸트의 명제가 여기서 다시 효력을 얻는다. 헤겔은 칸트의 기획을 완결하고자 한 인물이다. 개념과 경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 『법철학』의 ‘추상법’ 그리고 『역사철학』의 ‘동양 세계’는 모두 정신의 ‘직접적’ 현존재이다. 정신이 내적으로 분리되어 현실에서 추상성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다. 추상적 존재는 구체성을 띠기 위해 매개되어야 한다. 매개를 추진하는 논리적인 힘은 지양, 곧 규정적 부정이다.

세 저술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서술상의 특징은 내재적 운동 또는 내재적 초출(超出)이다. 운동의 과정에 외부에서 아무것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철학(절대정신)은 ‘뜻밖의 해결사(deus ex machina)’가 아니다. 외부의 힘이 작동할 경우 범주적 이행의 내적 필연성이 보장되지 않을 뿐더러 학문으로서 철학의 논리적 정합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에서 참여자와 관찰자의 관점을 구별하여 의식의 경험에 외부의 압력을 차단하며, 『법철학』과 『역사철학』에서도 순전히 내적 원리, 즉 내적인 모순에 준거하여 새로운 범주로 이행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내적 필연성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과정과 그 결과를 통하여 비로소 주관정신은 자기를 인식하고 객관정신(세계정신)은 자유를 의식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개념과 현실의 경험은 하나가 된다.

철학의 1차 언어(개념)와 현실의 2차 언어(경험)가 동행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함축한다. 동일한 사태의 진행을 서술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관점의 차이에 따라 운동의 양상이 다르게 서술된다는 점이다. 칸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간적으로는 경험의 2차 언어가 개념의 1차 언어에 선행하지만 논리적으로는 후자가 전자에 선행하여 후자를 근거 짓는다. 그래서 개념이 시간적으로는 경험 뒤에 오지만 결과적으로 경험은 개념에 의해 주도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기 시작한다’는 『법철학』 서문의 명구가 바로 이런 상황을 일컫는다. 개념은 이미 항상 현실에 와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다. “알려진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bekannt)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인식되지(erkannt) 않고 있다.” 알려진 것을 알게 하는 일이 철학의 임무이다. 현실의 표면은 경험 언어로 뒤덮여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개념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 개념이 없으면 현실은 작동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개념을 포착하는 활동이 철학이다. 내가 헤겔을 ‘객관적 해석학자(objektiver Hermeneutiker)’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항상 현실의 뒤만 따라다니는 비겁자인가? 세상의 일이 다 벌어지고 난 다음에 뒷정리만 하는 무기력자인가? ‘미네르바의 올빼미’ 비유는 헤겔을 “고서 수집가(Antiquar)”로 평가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하지만 헤겔의 ‘기억(회상)’을 '회고적(retrospektiv)'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그의 철학에는 전망적(prospektiv) 요소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을 뿐더러, 회고적 태도는 오히려 전망적 태도를 뒷받침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헤겔에게서 정신과 시간의 관계 설정과 관련된다.

정신은 시간을 통해서만 자기의 개념에 이를 수 있다. 시간을 매개로 하여 정신은 자기구별과 자기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간은 정신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시간은 현존하는 개념으로서 의식에 공허한 직관으로 나타나는 개념 자체이다. 그래서 정신은 시간을 없애지 않는 한 시간 안에서 현상한다.” 시간은 정신에 필요악인 셈이다. “이 직관된 개념은 자기를 파악함으로써 자기의 시간 형식을 지양하고, 직관하는 것을 파악하여, 개념화되면서 동시에 개념화하는 직관이 된다.” 경험적 시간을 매개로 정신은 자기의 외관을 유지하지만 정신의 내면 또는 목적은 시간을 지양하여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은 경험적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사태의 표면을 관찰하는 일에서 벗어나 표면을 지탱하고 있는 이면 또는 심층을 파악한다는 일이다. 아직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읽어내는 일이다. 헤겔의 ‘기억/회상’은 이렇게 미래 전망적이다.

이 강연에서 다룬 세 저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저술이 한결같이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은 소위 ‘반성 철학’ 또는 ‘오성 철학’이다. 이 철학은 사태를 현상적으로 관찰하여 현실에서 분열과 대립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하지만 헤겔은 겉으로 드러난 분열과 대립의 이면을 살피라고 주문한다. 헤겔에게서 “분열은 철학의 욕구의 근원이며 또한 시대의 도야라는 면에서 볼 때 특정 형태의 부자유한 측면이다.” 분열은 정신이 시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시간적’은 헤겔에게 ‘오성적’과 동격이다. 칸트가 무제약적인 것(초시간적인 것)을 오성적으로(시간적으로) 판단할 때 이율배반(모순)에 빠진다는 지적은 옳았다. 다만 그는 현실 속의 개념이 시간 밖으로 얽히며, 그런 한에서 이 개념은 오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통찰에 이르지는 못했다. 분열은 불가피하지만 끝이 아니다. 정신의 절대적 자기관계에서 볼 때 현상의 분열은 상대적이다. 분열의 지양은 경험적(표면적) 현실이 아니라 이성적(이면적) 현실에서 온다. 현실에 이미 와 있는데도 알지 못하고 있는 이성(개념)을 깨닫게 하여 경험적 현실의 분열에서 벗어나 통일의 방향으로 현재를 가속화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이다.

그래서 헤겔은 앞서 인용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에서 뛰어라!”를 조금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춰라!” ‘장미’ 메타포를 통하여 헤겔은 ‘로도스’가 단순히 ‘현실’이 아니라 ‘이성적 현실’이라는 점을 적시한다. “이성을 현재라는 십자가에 핀 장미로 인식하여 이 현재에 기뻐하는 이성적인 통찰이야 말로 철학이 보장하는 현실과의 화해이다.” ‘십자가의 장미’는 기독교적으로 구원의 상징이지만 철학의 현실성에서 볼 때,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희망’으로서 결국 ‘사변’을 의미한다. 경험적 현실은 분열되어 있지만 통일과 화해의 꽃은 현실 속에 이미 피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척후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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