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융합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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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융합교육
  • 김광석 부산대·물리학
  • 승인 2021.04.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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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비대면 방식의 수업은 대학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식습득이 목적이라면 이제는 집에서도 녹화된 강의를 반복해서 볼 수 있고 Google은 이미 체계적인 온라인 전문 강좌들에 대한 수료증도 발급하고 있다. 비용을 지불한다면 수강 강좌들에 대한 개인교습도 받을 수도 있다. 만약 전 세계 석학들의 온라인 강좌를 선택 수강해 학점까지 부여받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지금의 대학이라는 울타리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아마도 졸업생이 제출한 성적표에는 다양한 국가의 교육기관에서 취득한 성적이 기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잠을 포기하고 다녀야 하는 대학 캠퍼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기승전 입시로 수렴하는 한국 교육현실에서 대입은 여전히 사회적 신분 결정의 중요한 관문으로 여겨진다. 재학생들은 ‘과잠’이라 불리는 점퍼에 새겨진 글자들을 통해 소속 대학과 학과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수능 등급처럼 세분화된 수직적 차이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차이’와 ‘다름’을 구분하려는 이런 성향은 수평적 위치에 놓인 타 전공 분야에 대한 시선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문·이과 통합교육은 입시를 위한 전략적 변형일 뿐 ‘이알못’과 ‘문알못’이라는 표현처럼 ‘차이’와 ‘다름’은 여전히 포용이 아닌 경계와 벽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세상은 광활한 초원의 열린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벽으로 단절되어 쌓아 올려진 원룸촌의 풍경을 닮은 것은 아닐까? 

많은 대학들이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시대를 대비한다며 다양한 융합/혁신 교육과정을 기획하고 있지만 어쩌면 ‘융합’과 ‘혁신’은 신입생들의 관심을 끄는 단어가 아닐지 모른다. 세상 이치를 일찌감치 알아버린 그들의 관심은 그런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용어들이 아니라 그저 ‘치열하게 살아남기’ 같다. 그래서 요즘 학생들은 1학년 첫 학기부터도 한눈팔지 않는다. 입시준비 때의 습관처럼 졸업 후의 목표를 향해 촘촘하고 치밀한 스펙 쌓기와 학점관리를 시작한다. 학자금 대출이라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행복할까? 우리의 교육은 스무 살을 갓 넘긴 그들에게 인생의 가장 눈부신 순간이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준 적이 있을까? 

끊임없이 바뀌는 입시제도에 대한 정답이 없다면 대학 신입생들을 위한 치유와 변화의 기회라도 줬으면 좋겠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청춘은 밀폐된 고시원 안에서도 에메랄드빛 지중해 바다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빠듯한 형편에도 일주일 치 식비보다 비싼 문화공연을 보며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시험이 코앞이라도 멈출 수 없는 엉뚱한 호기심에 시험 범위와 상관없는 책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 한 번쯤은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강의를 빼먹고 바다로 달려가야 한다. 20대의 삶은 그렇게 출렁거려야 한다. 이제 막 긴 입시의 터널을 빠져나온 신입생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또 다른 터널과 좁은 문이 아니라 영혼을 관통하는 것 같은 가슴 떨림의 경험이다. 

다양한 분야의 통합교육을 추구한 독일의 Bauhaus 정신은 대학교육의 중심에 예술이 위치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John Andrew Rice를 만나 학부중심 대학 Black Mountain College를 탄생시켰다. 1933년 개교 후 30년도 유지하지 못하고 폐교해 버렸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 출신 학생들은 훗날 미국 전위예술의 거장으로 자라났다. 시인, 철학자,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무용수들을 초빙해 다양한 인문, 예술 분야를 넘나들고 심지어 수학과 공학조차 가르쳤던 진정한 융합과 자유의 공간. 학생들은 마치 어린이집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해 보이며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 항상 무언가를 만들거나 심지어 춤을 추고 있다. 함께 어우러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체화된 지식을 얻었던 그들의 대학생활은 어쩌면 삶, 예술, 축제,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원시 부족의 행복한 일상을 닮아있다.

학부생들에게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수개월 동안 다양한 전공 학생들과 뒤섞여 함께 먹고 자며 생활하는 통합교양프로그램을 제공하면 어떨까? 대신 기존의 지루한 이론 수강에 머무는 방식이 아니라 표현하고 만들어내는 창작활동이 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씨앗 같은 학부생들에게 당장의 결실을 기대하기보다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기다리는 대학의 뚝심도 필요할 것 같다. 예술은 입시로 찌든 상처를 치유하고 고전인문학은 어른들의 욕망으로 왜곡된 가치관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첨단 과학기술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고 동료들과 몸을 부대끼는 협력의 과정은 공동체의 가치를 깨닫게 할 것이다. 미학과 문학적 감성을 지닌 이과생, 수학과 현대과학기술에 감동한 미대생, 집단 무용과 건축이론을 경험한 정치학과 학생들은 적어도 지금의 기존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라날 것이다.   


김광석 부산대·물리학

영국 옥스퍼드대학 물리학 박사, 일본 NEC기초과학연구소 연구원, 프랑스 CNRS 초빙연구원을 거쳐 현재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양자점이나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을 주로 연구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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