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 근대화의 성공에는 가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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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근대화의 성공에는 가족이 있었다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1.04.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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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근대성 | 권용혁 지음 | 이학사 | 331쪽

한국의 근대화는 왜 한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서구 문명이 이식된 비서구 국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일까? 한국의 상대적인 성공은 연속된 우연의 결과물일까, 아니면 한국의 독특한 수용·적응 능력과 능동적인 재해석 능력이 함께 작용한 결과물일까?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20세기 한국 근대화의 성공에는 (개인과 개인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가족주의가 있었음을 주장하며, ‘가족’과 ‘근대성’을 엮어 한국 근대의 독특한 모습을 개념화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가족주의가 21세기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한다.

‘가족’과 ‘근대성’의 결합은 얼핏 어색해 보일 것이다. “근대는 가족이 아니라, 모든 신분적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이 성취한 결과물이지 않은가?”라는 문제 제기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반론이 근대화를 서구화로, 근대성을 서구 근대성으로 파악해온 서구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하며 서구 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한국 가족의 변화상을 고찰하면서 서구 중심적인 학문의 질서를 깨트리고 한국의 근대화를 바라보는 한국적 이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현실을 서구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문제를 비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가족과 근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세계사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대안 모델이 될 가능성을 제안한다. 한국 근대의 가족 모델은 한국적 상황에서만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비서구에서의 근대의 전개 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모델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 가족은 서구의 근대적 가족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독특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해방 후에는 유교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이 일어나 전통 유교적 가족제도가 일시에 폐기되었고, 70년대 이후에는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중심의 공동체적 가족 문화가 도시 중심의 핵가족 문화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가족 단위의 결속이 강화되고, 한국의 도시형 핵가족은 부계 혈연 중심의 직계가족 이념(전근대)과 부부 중심의 낭만적 사랑과 민주적 소통 방식(근대)이 혼합된 복합적인 양상을 보인다. 

가족 내에서의 가장의 역할도 복합적이다. 가장이 친척들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 가족 질서에 따르지만, 가족 내에서는 약화된 부권을 유지하면서도 가족 간의 민주적인 대화와 가족 사랑을 중시하는 복합적인 태도를 취한다. 서구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이렇듯 상호 이질적인 것들, 배타적인 것들이 한국 근대 가족에서는 함께 작동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에는 도시형 핵가족 외에 1인 가구, 다문화가족, 비혈연가족 등 새로운 가족 유형이 부상하는 한편 기러기 가족, 캥거루족, 연어족 등 독특한 형태로 가족주의가 유지되는 것이 확인된다.

이 책은 이러한 한국 가족의 변화상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유추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그 특징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해나가면서 핵심적인 몇 가지 개념을 한국 가족을 매개로 분석한다. 그 개념들은 ‘복합적 사태(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의 중층화, 중첩화,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족 형태의 혼성화)’, ‘복합 성찰성(한국의 가족 구성원들이 복합적 사태에 직면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원한 사유 유형)’, ‘복합 근대(유교적 근대와 식민지 근대 그리고 미국적 근대가 중층·중첩·혼성적으로 섞여 있는 한국의 근대)’, 생존과 번영의 기초 결속 단위로서의 ‘일차적, 기초적 물질 중심 가족주의에서 이차적, 비물질적, 수평적 네트워크형 가치 중심 가족주의로의 이동’, ‘친밀성과 연대성의 호혜적 조합’, 외환 위기와 금 모으기 운동, 촛불시위, 촛불혁명 등으로 나타난 ‘따뜻한 민주주의의 구상’,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친밀성과 연대성이 동심원적으로 선순환되는 ‘열린 공동체주의’ 등이다. 이 개념들은 전근대와 근대를 직선적으로 파악하는 단순한 서구식 이분법적 구도로는 파악되지 않는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 사회의 독특한 모습을 해석하는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식 근대의 철저한 수용과 이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통 속에도 근대화의 자양분이 충분히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세기 후반기의 세계 가치 사슬의 변화와 그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성공 신화 등이 어우러진 하나의 역동적인 드라마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있다. 이 책은 한국인들이 걸어온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가 헤쳐온 길과 나아가야 할 길을 버무려 한 장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으며, 그 상상의 집을 짓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개념 틀과 논점들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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