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늘 그 자리에 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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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늘 그 자리에 깨어 있다
  • 한자경 이화여대·철학과
  • 승인 2021.04.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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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한자경의 일체유심조 강의』 (한자경 지음, 김영사, 240쪽, 2021.03)

 

이 책은 BBS 불교방송 TV에서 <불교를 다시 묻다: 불교의 세계관과 인간관>이라는 주제 아래 다섯 차례에 걸쳐 강연했던 원고를 다듬어서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래서 책은 모두 5강으로 되어있다. 각 강의에서는 불교의 핵심개념인 공, 연기, 수행, 일체유심조, 공적영지를 가능한 알기 쉽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였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유의 논리법칙과 개념틀을 따라 ‘이것’과 ‘저것’, ‘인 것’과 ‘아닌 것’,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며 살아간다. 반면 불교는 우리에게 개념적인 이원적 분별작용을 멈추라고 말한다. 이원적 시비분별을 멈추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게 될까? 일상의 논리 너머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제1강 <공(空)의 세계>에서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루빈의 꽃병>, 에셔의 <천국과 지옥> 등의 그림을 예로 들어가면서 그러한 이원적 분별 너머의 것을 ‘이것’과 ‘저것’ 사이, ‘인 것’과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경계선으로 밝혀보았다. 그것이 곧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바로 그렇기에 다시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공이다. 

공의 관점에 서지 않는 한, 우리는 이것 또는 저것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기동일적 실체라고 여긴다. 이런저런 물리적 속성을 갖는 것을 물리적 실체(물체)로, 이런저런 심리적 속성을 갖는 것을 심리적 실체(영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불교는 일체가 모두 자기 자성이 없는 이른바 무자성이고 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으로부터 이 현상세계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2강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찾아보았다. 석가의 근본 깨달음인 연기론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 아닌 것을 인연으로 해서 생겨난 연기의 산물이다. ‘이것’은 ‘이것 아닌 것’을 인연으로 해서 ‘이것’이 된 것이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 천사와 악마, 즐거움과 고통, 밝음과 어둠, 여자와 남자는 서로 모순이지만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서로가 서로를 성립시키는 상즉(相卽)의 존재이며, 나아가 서로가 자기 아닌 것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상입(相入)의 존재이다. 

불교 연기론에서의 12지연기는 생사의 12가지 요소가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순환고리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수행하지 않는 한 그 안에 갇혀 끝없는 생사윤회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한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 12지연기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는 방식은 무엇일까? 제3강 <수행의 세계>에서는 12지연기의 순환고리를 벗어나는 두 가지 수행(修行)의 길을 논하였다. 하나는 느낌(수)에서 애착(애)으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순환고리를 끊는 길인 알아차림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무명을 벗어나 명(明)의 본성을 자각하는 길인 견성(見性)수행 내지 선(禪)수행이다. 전자는 유전문을 넘어 환멸문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앞의 두 가지(유전문+환멸문)를 포함하는 생멸문을 넘어 불생불멸의 진여문(眞如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수행과 대승불교의 선수행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으로 회통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확인되는 진여문의 마음, 생멸하는 연기적 현상 너머의 불생멸의 부처의 마음을 확보해야 비로소 ‘일체는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식 바깥에 대상(경)이 따로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나 유식무경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그 일체 또는 대상(경)을 각자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인 심리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그 일체는 심리세계뿐 아니라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인 물리적 대상세계를 포함한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현상세계가 모두 우리의 마음 내지 식이 만든 가유(假有)이고 가상(假相)인 것이다. 일종의 매트릭스 또는 홀로그램 우주와 같다. 물론 이때의 마음 또는 식은 우리의 일상적 표층의식, 제6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심층마음, 제8아뢰야식이다. 그렇다면 제8아뢰야식은 어떤 식이며,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제4강 <일체유심조의 마음>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거나 업을 지으면, 그렇게 경험된 내용(정보), 업력(종자)이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보(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심층마음인 제8아뢰야식이다. 마치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에 나무의 정보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가 때가 되면 그 씨앗으로부터 다시 나무가 자라나게 되는 것처럼, 아뢰야식 안에 축적되어 있던 종자는 때가 되면 다시 구체적 현상인 물리세계(유근신과 기세간)로 현행화한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심층마음 안의 종자가 구체화되어 드러난 가상세계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일체유심조’와 ‘유식무경’이 성립한다.

아뢰야식 안의 종자는 경험 내지 업을 통해 축적되어 그 안에 머물다가 다시 개별 신체를 포함하는 대상세계를 형성한다. 업은 번뇌 있는 행위를 말하며, 따라서 그렇게 남겨지는 종자 또한 번뇌 있는 종자, 곧 유루(有漏)종자이다. 그렇다면 그런 종자를 보관하는 아뢰야식 자체도 번뇌에 물든 식, 염오식(染汚識)인 것일까? 제5강 <공적영지의 마음>에서는 종자를 함장하는 아뢰야식 자체는 그 안에 함장되는 종자와 달리 일체 번뇌를 떠난 깨끗하고 맑은 마음, 본래 청정한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는 누구나 수시로 마음속에 욕망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번뇌에 물들어 있어도 그 번뇌 있음을 아는 그 마음 자체는 번뇌를 떠나 있다. 마음이 자기 자신 및 대상세계를 아는 것은 마음 자체의 자기지, 마음의 본래적 각성, 본각(本覺)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의 자기지를 원효는 ‘본성이 스스로를 신묘하게 안다’는 의미에서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부르고, 지눌은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이 신령하게 자신을 안다’는 의미에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부른다. 이 공적영지의 마음에 기반해서 우리는 우리가 표층에서는 서로 달라도 심층에서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안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포용하는 열린 마음, 어느 누구와도 하나로 공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위와 같이 공(空)과 연기(緣起)를 통해 불교의 세계관을 밝히고, 불교 수행(修行)이 지향하는 해탈한 마음, 부처의 마음을 살펴본 후, 모든 인간에 내재된 그 마음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마음,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공과 연기는 무아를 설하는 초기불교의 핵심개념이고, 일체유심조와 공적영지는 일심과 본각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핵심개념이다. 이로써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무아와 일심이 수행을 매개로 하나의 불교를 이루고 있음을 밝혀보았다. 


한자경 이화여대·철학과

이화여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서양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 《심층마음의 연구》(반야학술상), 《대승기신론 강해》(불교출판문화상대상),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원효학술상), 《불교의 무아론》(청송학술상), 《칸트와 초월철학》(서우철학상)을 비롯해, 《자아의 연구》, 《유식무경》, 《불교철학의 전개》, 《칸트 철학에의 초대》, 《명상의 철학적 기초》,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 《화두》, 《성유식론 강해》, 《실체의 연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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