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영화,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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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영화,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단상
  • 이선우 성신여대·영화이론
  • 승인 2021.04.18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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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영화로 읽는 프랑스 문화』 (이선우 지음, 지성공간, 308쪽, 2021.03)

 

‘영화’와 ‘프랑스’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얼핏 낭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조금 냉정하게 본다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인상을 주거나 거리감을 갖게 만들기도 쉽다. 이 책의 주제에 대한 반응이 딱 그랬다.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라는 응원도 있었지만, 폭넓게 어필하지 못하는 공허한 책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또한 있었다. 부정적인 의견들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차피 누가 알아봐 주는 유명 작가나 명망 높은 학자도 아니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족하다는 고집으로 꿋꿋하게 썼다.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프랑스 문화를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영화 공부를 하고 싶어서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으니 영화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보편화되면서 오늘날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가 절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관을 찾아가 어둠 속에 반듯이 앉아 오롯이 스크린의 이미지에만 집중하는 의식적 행위의 굴레가 풀리자 영화는 유튜브에 올라오는 5분짜리 영상들과 다를 바 없는 킬링 타임용 소비물로 전락해 버렸다. 원할 때 간편하게 재생하고 정지하는 일이 쉬워지다 보니 심심한 시간을 때우기 좋은 오락거리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리, 지난 세기 영화가 품고 있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두 시간 동안의 짜릿한 재미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읽는 중요한 프리즘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과거에는 연극, 문학, 미술 등의 전통적인 장르들이 그 역할을 해 왔다면 20세기에는 영화가 그 바톤을 이어받았고 분명 지금도 충실하게 그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관객들은 영화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 되었지만, 기생충 신드롬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을 때 <기생충>이 깐과 아카데미를 휩쓸었다는 사실에 두 손 들어 열광했던 관객들은 정작 <기생충>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일상의 담론으로 만드는 작업에는 그만큼 열정적이지 않았다. 영화라는 텍스트가 갖고 있는 가치를 되새기는 작업이 동반되지 않은 채 그저 상품으로 소비하기에만 급급한 느낌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영화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증명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고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연구 영역인 프랑스 문화로 연결되었다. 

지난 3년 동안 서울대학교에서 ‘프랑스어권 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은 영화들이 참 많았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보고 싶던 작품들도 있었지만 75분이라는 수업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발췌된 영상과 요약 정도로만 넘어가야 했던 작품들을 마음먹고 선정했다. 미처 수업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품들, 개인적으로 마음속 깊이 애정을 품고 있던 작품들도 슬쩍 꺼내 놓았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으로만 목록을 선정한 것은 아니다. 크게 취향을 타지 않는 작품들을 고르려다 보니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영화도 많고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도 많다. 무엇보다도 프랑스라는 나라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았다. 프랑스인의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에서 시작해 프랑스 역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들, (이미 옛말이 되어 버렸지만)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작품들도 고민했고, 마지막으로는 일종의 보너스 코너로 파리에 대한 추억과 환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들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선별했다. 프랑스는 잘 알지만 영화에 대한 지식이 약한 독자들을 배려한 부분도 있고, 반대로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시네필이지만 프랑스 문화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독자들을 배려한 부분도 있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과 <신과 인간> 포스터

사회 참여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으로 책의 첫 페이지를 연 것은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솔리다리테의 정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암묵적 약속인 연대의 가치를 일상에서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어서, 종교의 차이 속에서 인내와 믿음을 실천하는 수도사들의 실화를 담은 <신과 인간>을 통해 톨레랑스의 무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피상적 이미지를 넘어 프랑스인의 멘탈리티, 그중에서도 우리에겐 조금 부족하게 여겨지는 모습을 가장 먼저 제시하고 싶었기에 다소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연대와 관용의 정신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역사적 사건이나 동시대의 현상을 다룬 영화들에서도 단순히 팩트에 대한 소개를 넘어 그 안에 자리 잡은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광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변화 중인 현재의 프랑스일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진입한 프랑스의 모습은 지금껏 쌓여 있던 긍정적인 이미지에 급작스러운 균열을 일으켰다. 우리가 오랫동안 부러워하고 칭송해 왔던 프랑스의 가치들이 갑작스럽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고 생각지 못했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재기로 텅텅 비어 버린 마트의 풍경, 고령자의 사망자 수는 매일 갱신하고 있는데 마스크는 고사하고 여럿이 모여 술판을 벌이면서 에디트 피아프의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Je ne regrette rien’을 부르는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모습은 솔리다리테라는 말을 감히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아시아인에 대한 적대감과 크고 작은 혐오 범죄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톨레랑스는 어디로 갔을까 다시금 묻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던 남편을 통해 이 모든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계속해서 충격을 받고 혀를 찼지만, 그럼에도 오랜 역사를 통해 단단하게 만들어진 본질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원고를 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프랑스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와 찝찝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는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양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현상에 대해서 지금 당장 판단하는 것은 경솔하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는 작업은 분명 필요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알던 프랑스적 가치는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코로나로 인한 봉쇄 조치에 반발하면서 “마트를 여는 대신 영화관을 열어 달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있는 시위대의 사진을 보면 걱정스럽다가도 ‘내가 알던 프랑스가 맞네’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문화의 향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프랑스인들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그런 나라다. 지금 이 풍경들은 누군가에 의해 열심히 시나리오로 옮겨지거나 카메라에 담기고 있을 것이며 머지않아 스크린에 펼쳐질 것이다. 언젠가 이 영화들에 담긴 프랑스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위기에 저항한 프랑스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이선우 성신여대·영화이론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프랑수아 오종 영화에 재현된 섹슈얼리티 연구로 영화이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도불하여 파리3대학에서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의 영화에 드러난 욕망의 양상을 비교한 논문으로 영화영상이론 석사 학위를, 파리10대학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작품에 드러난 현실과 상상의 교차에 관한 연구로 영화이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프랑스 문화 및 영화에 대한 연구와 강의 활동을 지속해 왔으며, 2021년 3월부터 성신여자대학교 프랑스어문·문화학과 조교수로 다시 한 번 인생의 시동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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