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선험 철학과 철학의 역설 - 『순수이성비판』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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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선험 철학과 철학의 역설 - 『순수이성비판』 중심으로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4.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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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40강>_ 김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칸트 〈순수이성비판〉」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40강 김혜숙 명예교수(이화여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칸트의 선험 철학과 철학의 역설 - 『순수이성비판』 중심으로

김혜숙 교수는 “철학에는 반드시 문제의 맥락이 있다”는 것을 대전제 아래, “칸트의 ‘비판 철학’의 문제들과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칸트가 제시하는 방법들이 복잡한 문명적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도록 칸트 철학을 재구성”하는 일을 시도한다. 이는 칸트 철학에 접근하는 무수한 방식이 있겠으나 “칸트의 철학적 체계에 대한 관심, 칸트가 이전 서양 철학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새로운 철학적 방법을 엶으로써 어떤 문제 상황들이 초래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길이기도 함을 밝힌다. 결과적으로 칸트의 선험 철학 덕에 “서양 철학은 그 이전과는 다른 철학의 개념”, 즉 “특정 대상의 성질을 밝히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거를 묻는 학문, 즉 메타 학문 또는 2차 담론”으로서 철학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때문에 “비판을 하는 바로 그 대상을 여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비판해야 하는 데서 발생”하는 역설이 생겨나지만 그 같은 “철학적 사유에 깊이 개입된 역설의 문제는 사실상 인간 삶 어디에서든 발견”되는 만큼 오늘의 현실을 두고 곱씹어봐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지난 3월 20일, 김혜숙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서양의 철학사를 들여다보면 매우 역동적이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자기가 물려받은 지적 전통을 깨고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는 변증적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칸트는 자기 시대의 형이상학을 ‘하나의 싸움터’라 보았다. 형이상학의 명제들은 경험으로 검증되거나 반증되지 않기에 그 싸움은 애초에 승부를 가를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철학에는 반드시 문제의 맥락이 있다. 철학은 경험적 검증이나 반증이 가능한 경험 과학이 아니고, 추상적 개념들로 집을 짓는 사유 실험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들의 맥락 안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고민과 문제 상황 안에서 과거의 철학자들을 해석해야 하고, 그들이 제시했던 개념들과 답은 우리가 길을 찾아가는 데 지팡이 정도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 글에서 시도하는 것은 칸트의 ‘비판 철학’의 문제들과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칸트가 제시하는 방법들이 복잡한 문명적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도록 칸트 철학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1. 전통 형이상학의 종언

우리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 외의 어떤 학문도 학문 연구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끊임없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철학적 진리나 지식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진리에 이르는 철학적 방법이 무엇인지, 철학적 사유의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지를 학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철학의 자기규정 자체가 철학적 논의의 중요한 어젠다로 설정된다. 

경험 과학이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탐구 대상을 갖는 반면 철학은 자기 스스로 설정한 문제들로 자기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그 문제들은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경험적 학문과 구분하면서 구체적 존재자들을 다루는 경험 학문과 달리 제1철학으로서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를 다룬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존재 자체는 과연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가? 철학이 스스로 설정한 문제들은 과연 참으로 문제로 성립하는 것들이며 그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또 타당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립에 관한 질문이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나(철학)는 누구인가”의 질문과 처절하게 싸워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철학은 참된 앎 자체를 지향하고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니는 지식을 추구한다. 철학이 이런 특성을 갖는 지식, 혹은 엄밀한 학의 지위를 과연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데카르트 이후, 특히 뉴턴 물리학의 출현 이후 심각한 것이 되었다. 진리의 표징으로 보편성, 필연성, 의심 불가능성과 같은 것이 제시되었지만, 진리에 관한 최종 권위를 확보한 학문은 공히 수학(유클리드 기하학), 논리학, 자연학(물리학)이었다. ‘학’으로서의 철학(형이상학)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임의적 지식이 아니라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 제1철학(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철학이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과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대결은 진리를 확정 짓는 방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칸트는 이런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상황에서 자신의 시대가 남겨놓은 철학적 의제들을 갖게 되었다.

철학은 “어떻게 엄밀한 학으로서의 안전한 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칸트가 찾은 길은 수학도 논리학도 물리학도 전통 형이상학도 아닌 선험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줄 알면서도, 또 답이 없는 문제인 줄 알면서도 물음을 멈추지 못하는 문제들로 괴로워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삶의 의미나, 자기 존재의 의미, 세계 전체 또는 전체 역사의 목적이나 의미, 신의 존재 또는 부재, 이런 문제들은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민을 하는 것들이다. 이성의 힘만으로, 지적 직관 능력을 발휘하여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철학자들도 있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답을 만들어보려 한 철학자들도 있었으나 칸트는 순수 사변에 바탕한 이런 시도를 독단적 형이상학으로서 일종의 사이비 학문, 보편적 지식을 가장한 사이비 지식이라 생각했다. 이런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직면하면 인간 이성은 언제나 양립 불가능한 두 입장으로 나뉘게 되고(dialectical) 형이상학은 승부를 결정할 수 없는 싸움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순수 사유 능력으로서의 순수이성을 크게 확장하여 이 둘을 구분하거나 아니면 순수이성에 한계를 설정해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체 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칸트의 선택은 이성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능력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까지 알아내는 신통한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적 직관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이성을 확장, 활용하여 기껏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 활동, 사유 활동 전체에 대한 비판(성찰)이지 경험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것들에 대한 앎이 아니다. 학적 인식이란 비판으로서의 앎이다. 

이성의 이성 비판의 목적은 알 수 없는 것(하나님, 세계/자유, 마음의 불멸성과 같은 것)의 영역은 믿음, (도덕적) 신앙의 문제로 두고 지식의 한계를 정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 수 있는 것 (경험적 대상)과 관련하여 ‘나는 도대체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인가?’ 이때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철학적 앎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의적이고 우연적 앎이 아니라 학적 인식으로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니는 철학적 앎이다. “도대체 어떻게 앎이, 인식이 가능한 것인가?”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의 이성 비판으로서 지식, 인식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주려는 목적을 지닌다. 궁극적 존재 자체 또는 사물 일반에 관한 지식을 밝히고자 했던 제1철학으로서의 전통 형이상학은 이제 비판 철학으로서의 선험 철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선험 철학은 궁극적 존재나 절대적인 것에 대한 앎이 아니라, 앎의 경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비판 철학의 과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초판의 머리말에서 이성이 하는 모든 일 중에서 ‘자기 인식’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칸트가 이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다. 칸트에 있어 넓은 의미의 ‘이성’은 주관적 사유 능력, 원칙을 따르는 능력,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하는 사변 능력으로 규정된다. 이성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으로 나뉘는데, 이론이성은 주관 밖의 대상에 관한 인식 능력이고 실천이성은 행위를 만들어내는 의지 능력이다. 칸트는 인간의 심의 능력을 세 종류로 보아 인식 능력, 의지 능력, 그리고 쾌-불쾌의 감정 능력으로 보았다. 이 중 앞의 둘은 선험 철학적 접근이 가능한 데 반해 맨 마지막 심의 기능은 처음에는 선험 철학적 접근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으나 나중에는 가능한 것으로 보아 『판단력비판』을 1790년 출판하였다. 

칸트가 인식, 도덕적 행위, 미적 판단을 비판적으로 다룬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인식, 도덕, 심미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을 탐색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경험들 전체를 괄호 안에 넣고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선천적(aprior) 원리를 통해 설명할 수 있을 때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무엇이 선천적이라 함은 필연성과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특성을 가질 때 그것은 철학적 기초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철학적 기초 혹은 정초를 마련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흄과 같은 회의주의 철학자는 그러한 선천적인 철학적 정초 마련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회의주의의 귀결은 개념적 사고 체계로서 철학의 불능이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한갓 우연적이며 불안정한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라 칸트는 보았다. 실체나 인과 등에 대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또는 원리를 천착하고자 했던 전통 형이상학이 회의주의 극복의 열쇠를 제공하지 못한 채 독단론으로 빠지게 된다고 생각했던 칸트가 이른 곳은 인간 경험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전제들이었고 이를 기초 내지 정초(Grundlegung, foundation)라는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칸트가 자신의 비판 철학이 기존 형이상학과 구분된다고 한 것은 비판 철학은 논리적 근거 지음, 철학적 설명과 정당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판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앎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방법론일 뿐 학(앎)의 체계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의 전 개략도를 그 한계와 그 내적 구조 전부에 관해서 그려낸 것이다”(BⅩⅩⅢ).

1) 『순수이성비판』의 기획

인식 경험은 인간 삶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 경험의 목표는 진리에 이르는 것이다. 즉 대상 세계를 있는 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다. “진리란 인식과 대상과의 일치”(B82)라는 것은 그러나 명목상의 정의일 뿐 ‘있는 바 그대로의 대상’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이 정의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식의 진리에 관한 보편적이고 확실한 기준을 정하는 일은 사태에 대한 후천적, 경험적 검증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가 취한 길은 인식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조건들을 밝히는 것이었다.

통상 우리는 인식이 대상에 준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경우 대상 자체를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인식의 진리에 관하여 아포리아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거꾸로 대상이 인식에 준거를 두고 있다고 하면 대상에 관한 보편적이고 확실한 진리 기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이것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일컬어지는 관념론적 전회이다. 이 전회에 의거하여 객관적 대상 또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 사물 중에 집어넣은 것”(B XⅧ)은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탐구를 통해 밝힐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선천적 인식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칸트는 보았다.

대상 자체의 차원을 드러낼 확실한 방법이 없다면 대상을 경험하는 우리 인식의 주관적 조건들을 살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즉 선천적인, 또는 아프리오리한) 조건들을 밝혀냄으로써 대상과 관련하여 확실한 학적 인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인식의 근거를 경험에서 찾는 것은 논리적 순환의 문제를 안고 있다. 또 인간적 한계로 인해 신적 이성에 의존해서 경험의 선천적 근거를 찾아낼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논리적 분석과 반성에 의해 대상 경험의 전제 조건들을 찾아낸다면 그 조건들은 경험에 논리적으로 앞서 있다는 의미에서 선천적이며 경험을 조각하고 구성한다는 점에서 종합적인 것이 될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이론적 부분에서 하고 있는 일은 이 선행 조건들을 탐색하는 일이다.

칸트 이론 철학의 출발점은 감성과 개념(오성, 넓은 의미의 이성)의 이분법적 구분이다. 감성적 경험은 개념적 사고로 절대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역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감성과 개념 작용은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식 능력들로 서로 치환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감성은 “여기, 지금”의 개별성을 포착하는 경험의 단위이며, 개념은 직관적 감성 경험을 언어적, 보편적, 범주적 규범으로 통합하여 대상에 관한 판단을 산출하는 능력이다.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생긴다 하더라도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발현하는 것은 아니고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관한 인식은 경험에서 독립된 선천적 인식이다. 지금, 여기의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경험적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에 대상 경험의 필요조건으로서 시간과 공간은 선천적이다. 칸트에게 “순수”란 언제나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뜻을 가지며 “선천적”이라 함은 생래적이라거나 본유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느 경우에나(보편적) 반드시 성립한다(필연적)는 의미를 갖는다. ‘선험적’(transcendental)이라 함은 우리의 경험과 관련해서 선천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 능력을 칸트는 오성(悟性, Verstand, understanding)이라 하는데 이는 자발적 사유 능력, 판단 능력으로서 감성에 의해 갖게 된 잡다한 경험적 자료들을 종합, 분석하여 대상을 판단의 형식 안에서 규정한다. 이러한 개념 작용은 사고의 자발성에 기인하되 그 자체로 종합, 분석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대상과 간접적 방식으로만 만나게 된다. 개념들 중에는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는 순수 개념들이 있는데 이 개념들은 오성의 범주(category)가 된다. 범주들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에 따라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의 차원으로 나누어지며 각 차원에서 3개의 범주들이 성립한다. 분량의 범주에는 단일성, 수다성, 전체성, 성질의 범주에는 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관계의 범주에는 속성과 자존성, 인과성과 의존성, 상호성, 양상의 범주에는 가능성/불가능성, 현존성/비존재성, 필연성/우연성이 있다. 모든 개념들은 잡다를 하나로 통합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개념은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물들 안에서 사과들을 모아 묶어내는 기능이다. 

개념 능력인 오성의 범주들은 선천적(apriori)인 것으로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는 것으로서 대상과 직접적 연관을 갖고 있지 않은 주관적 인식의 능력이기 때문에 이 주관성을 통해 객관성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해야 한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의 이론 철학에서 선험 철학의 목표는 대상 인식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조건들(감성과 오성)을 밝히고 그 주관적 조건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님을 논변함과 동시에 이 조건들에 의거하지 않는 모든 사변적 주장들의 허구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객관, 객관 자체에 도달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범주 개념 사용의 정당성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떤 대상도 생각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고유한 입장인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원리론과 방법론으로 나뉘고 주요 철학적 논의를 이루는 원리론은 인식의 원천인 감성과 개념 능력의 이분법에 상응하여 선험적 감성론과 선험적 논리학으로, 개념적 판단의 조건을 다루는 선험적 논리학은 지적 능력인 개념 작용을 통해 경험적 진리를 포착하는 과정을 다루는 분석론과 지적 개념들을 경험을 넘어 사용할 때 생기게 되는 가상(illusion)을 다루는 변증론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트는 인식의 두 원천으로 감성과 넓은 의미의 이성을 구분하였고 이성이 철저하게 감성적 조건 하에서 움직여 인식을 산출할 때 그 지성적 작용을 오성이라 하였다. 분석론이 ‘진리의 논리학’이라는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경험적 대상 인식에 개입되는 선천적 조건들(형식, 개념, 원리)을 밝히고자 하는 반면 변증론은 이성이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 그 제약을 받지 않고 순수 사변적으로 활동할 때 빠지게 되는 오류와 가상의 문제를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이름 하에 다루고 있다. 경험의 제한을 벗어났을 때 인간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에 개념 확장을 통해 궁극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런데 경험적 검증이 되지 않는 명제들과 관련해서 인간 이성은 오류에 빠지거나, 변증적(dialectical)이 되고 만다. 변증적이란 두 가지 반대되는 주장들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진리를 확정 짓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들은 지식을 가장하지만 사이비 지식일 뿐이다. 이성의 이념이라 칸트가 내세우는 하나님, 자아, 세계에 관한 어떤 주장도 그 객관성을 검증할 수 없는 사이비 지식일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철저하게 전통 형이상학적 지식이 사이비 지식임을 주장한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자연적 경향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자체 지식의 체계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비판의 정당성

칸트가 선험 철학으로써 의도한 것은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에 대한 믿음들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객관성을 지니는 것들로서 그런 객관적 토대 구축이야말로 엄밀한 ‘학’으로서 철학이 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흄은 우리의 일상적 믿음에 대해 그런 철학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칸트는 선험 철학의 이름으로 철학적 근거를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근거 설정은 철학적 정당화 작업이다. 일상 믿음들의 굳건한 정초는 믿음들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의 선험 철학은 전통 형이상학의 불임성을 보이는 한편 일상의 경험을 근거 짓는 선험적 관점을 구축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선험적 관점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봉착한다. 즉 우리의 일상 믿음에 대한 철학적 근거로서 칸트는 인식의 선험적 조건(시간과 공간, 오성의 개념과 원칙)을 제시하였으나, 이러한 선험적 조건들에 대한 정당화에 있어서는 “이 조건 없이는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는 어찌 보면 동어 반복적 정당화만 보여주고 있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가 전체 인간의 인식 경험을 놓고 그 조건을 묻는 지점은 경험 바깥일 것이다. 이를 선험적 관점이라고 하였을 때 이런 선험적 관점이 임의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임을 과연 칸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가 남겨놓은 문제들에 매이게 되는데 어떤 접근을 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철학적 입장이 나오게 된다. 2차 담론으로서의 철학이 가능하다고 칸트가 생각했던 것은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혹은 그 궁극적 전제가 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선험적인) 영역, 즉 의미 있는 철학적 반성의 영역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반성 철학, 비판 철학, 선험 철학 자체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칸트 스스로 신적 직관을 가진 것이 아닌 바에야 우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 구조가 우리를 진리로 이르게 하는지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인식을 비판하는 인식도 인식이라고 한다면 비판 철학은 인식 중에 인식을 비판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이 문제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철학적 동기를 구성하고 있는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칸트의 선험 철학으로 인해 서양 철학은 그 이전과는 다른 철학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철학이 ‘대상으로서의 그 무엇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은 특정 대상의 성질을 밝히는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거를 묻는 학문, 즉 메타 학문 또는 2차 담론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따라 제1철학으로서 자연학 또는 물리학과는 그 주제에 있어 구분되는 근본학으로 간주되었다. 칸트 이전까지 철학은 보이는 세계 이면의 실재 세계에 관한 학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칸트에게 있어 철학은 그 자체로 세계 너머에 관한 학문도 아니고 세계를 직접 대면하는 학문도 아니다. 즉 철학은 궁극적인 것에 관한 1차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학문이다. 이론적 선험 철학은 우리의 인식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인식 전체를 문제 삼아 그것의 보편적, 필연적 조건을 탐색한다. 인식의 최고 원리는 “나는 생각한다”는 표현으로 지시되는 바 선험적 자의식의 종합 작용에 원천을 두고 있다. 이 선험적 자아는 세계 안에도 있지 않고 세계 밖에도 있지 않은 오히려 세계에 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따라서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는 한계 조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상황을 ‘형이상학적 자아’란 표현으로 집약하면서 이 세상 끝에 있는 어떤 것으로 포착했다. 그러나 엄밀히는 “있다”고도 표현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실천적 선험 철학은 도덕의 구체적 규범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자체를 문제 삼아 그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한다. 규범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규범의 가능성을 묻는다. 칸트의 도덕 철학은 규범에 대한 1차 담론이 아니라 도덕 행위라는 1차적 대상에 대한 메타적 2차 담론을 지향한다. 앎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도덕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미적 경험(쾌)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의 질문은 어떤 구체적 믿음이 참인지,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 어떤 미적 판단이 객관성을 갖는 것인지의 질문과는 구분된다. 전자는 현상 전체에 관한 질문이다. 칸트는 전체에 관한 이런 질문이 지니는 역설을 첨예하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역설은 비판의 역설이며, 반성의 역설이며, 철학의 역설이다.

3. 비판의 역설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이 앎의 불가능성을 말하며 모든 정당화 작업이 결국은 순환이나 문제에 빠지게 됨을 주장한 이후 서양 철학은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확실한 앎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을 처절하게 수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 제1철학의 바탕으로 데카르트가 발견한 코기토(Cogito)는 그러나 의식 밖의 세계와 실재를 영원한 아포리아로 만들어놓았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 철학은 300년도 넘게 ‘자아와 의식을 뚫고 밖의 실재를 만나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의 물음에 집중돼왔다는 것이 미국 신실용주의 철학자 로티의 고찰이다. 감각이나 지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또한 의식의 일부인 한 의식의 주관적 산물일 뿐이다. 객관성을 담보해줄 근거로서 아무리 경험적 증거를 추적해간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거로 만드는 증거의 원리를 매개로 하는 것이다. “A는 B의 증거가 된다”는 증거의 원리는 그 자체로 대상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원리로서 정신의 산물이다. 칸트는 이 문제를 첨예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경험은 경험을 정당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이미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 철학적 방법은 우리의 경험 전체를 묶어놓고 그것들의 선행적 전제조건들을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 조건들이 보편적으로, 필연적으로 경험에 대해 타당하다면 우리의 대상 인식은 정당성을 얻은 것이고 객관성을 확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특별한 통찰력으로서의 지적 직관이라기보다 선험적 반성이라고 보는데 이를 논리적, 분석적 반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칸트의 철학적 방법은 수학의 공리 체계를 비유적으로 놓고 생각해보면 조금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리들은 공리 체계 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그 객관적 타당성은 공리 아니면 공리 체계가 성립할 수 없다는 데서 확보된다. 수학적 공리 체계와 선험 철학의 체계를 비교하는 것은 철학적 방법론 연구 차원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비판과 반성은 특정한 관점 또는 좀 더 중립적 표현을 쓰자면 지점을 필요로 한다. 비판은 규범적 활동이기 때문에 기준의 문제가 반드시 개입된다. 모든 비판, 반성은 이성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성 비판의 경우가 되면 어려움이 발생하고 만다. 철학이란 학문 자체가 앞서 말했던 예술 작업처럼 자신(이성)을 문제 삼는 작업으로서 본질적으로 이러한 역설을 안고 있다. 나 자신을 비판한다, 또는 반성한다고 했을 때 비판 대상인 나와 비판 주체인 나는 다른가, 같은가? 비판의 역설은 비판을 하는 바로 그 대상을 여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비판해야 하는 데서 발생하는 역설이다. 철학적 사유에 깊이 개입된 역설의 문제는 사실상 인간 삶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인간 삶에 내재된 가장 큰 역설은 아마도 살면서 죽어가는 인간 실존의 양상이겠지만, 인간이 반성적 존재로서 삶을 이어가는 한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칸트는 그 역설을 잠시 선험 철학이라는 고정된 지점에서 극복해보려는 영웅적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인간과 인간 삶이 지니는 근본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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