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면책 체계: 프로이트와 함께 루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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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면책 체계: 프로이트와 함께 루소를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4.1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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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39강>_ 김영욱 서울대학교 교수의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외」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39강 김영욱 교수(서울대 불어불문학과)의 강연 중 본론부 3장과 결론부 5장을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루소의 면책 체계: 프로이트와 함께 루소를

김영욱 교수는 “루소의 면책 체계: 프로이트와 함께 루소를”이라는 제하에서 근대 사상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색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를 위해서 “루소 사유의 비교항으로 소환하는 텍스트는 1930년 발표된 프로이트의 후기작 『문명 속의 불만』”으로, 그 “텍스트 제목이 루소 전공자에게 일으키는 연상에 따라 프로이트와 루소”의 비교를 시도해 보인다. 요컨대 프로이트와 달리 루소가 “언제나 현재 상태 너머에 있는, 현재 상태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현재 상태를 이론적이고 심정적으로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비교항들”, 이른바 “문명 이전의 자연상태, 내면적 통일과 자유가 집단적으로 복구된 일반의지, 농촌에서 가능한 정념의 공동체, 사회 속에서도 자유로운 단 하나의 개인, 사회에서 쫓겨난 개인의 희미한 몽상” 등을 고안해냈다는 특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한편으로 역사의 실패를 더 비관적으로 인식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실패가 필연은 아니었다는 이론적 가능성을, 그러한 위로를, 사회 안에 있는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개인에게도 준다”라고 평가를 내린다. 

지난 3월 13일, 김영욱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3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비교의 요구

2. “문명 속의 불만” 

3. 책임 경감의 인간학

루소와 프로이트의 공통의 출발점을 표시해보자. 두 사상가는 문명을 개인과 사회의 대립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회는 개인을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개인은 사회에 들어오길 두려워하며 들어왔다 해도 불만을 느껴 빠져나가려고 한다. 사회를 더 단단하게 묶는 것은 두 이론가 모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차이는 『문명 속의 불만』이 개인들을 묶는 힘으로 에로스를 상정하는 반면, 『사회계약론』은 이 힘을 이익과 의지의 결합 즉 “공동선”과 “일반의지”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소 정치철학의 피상적 이해에 근거하는 이 차이는 『사회계약론』 전반부에서만 유효하다. 후반부의 풍속론에서 국가의 건강함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전제하며, 이 사랑이 약화되는 것이 사회의 가장 큰 위협처럼 묘사된다. 국가가 일종의 사랑의 사회라는 것은 루소가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을 위해 쓴 『정치경제』 항목, 그리고 『사회계약론』 초고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텍스트들에서 공동선과 일반의지 이론은 자신의 정념론적 차원을 숨기지 않는다. 『정치경제』 항목에서 공화국의 필수 요소인 미덕, 즉 자신의 개별 의지를 일반의지에 종속시키는 힘은 조국애에 의해 보장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원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루소는 조국애를 마련하기 위해 더 보편적인 사랑인 인류애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모든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 사랑인 인류애와 세계시민주의는 특수한 전체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정치에 이롭지 않다. 『사회계약론』 초고에서 그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정당화하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소위 세계시민을 비난한다. 즉 루소에게도 사회는 개인의 더 직접적인 사랑과 더 간접적인 사랑 사이의 배분의 문제다.

차이는 좀 더 미묘한 지점에 있다. 루소는 사랑이 더 작은 대상을 향하는 경향과 함께 더 큰 대상을 향하는 경향도 알고 있다. 인간 일반을 향하는 인류애는 물론이고, 동물을 포함한 생명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연민은 루소의 오랜 분석 대상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선한 인간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루소에게 문제는 더 어려운 것이 된다. 단지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제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과 인류의 차원에서는 꼭 필요한 일반화되는 사랑을 정치의 차원에서는 통제해야 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에로스의 모든 힘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새지 않고 동료 시민과 조국에 대한 사랑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사적인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 혹은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은 풍속이 타락하고 정치가 변질되는 두 가지 길을 지시한다. 문명의 차원에서 사랑은 너무 적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많이 하는 것도 문제다.

중요한 두 번째 차이를 곧장 말해보자. 프로이트는 생명에서 문명에 이르는 발생 과정에서 가족이 핵심적인 단계라고 말한다. 직접적인 사랑과 간접적인 사랑의 배분, 그리고 죄책감의 발생에서, 가족은 이미 문명의 구조를 선점하고 있다. 이에 반해 루소는 강박적일만큼 정치 이론에서 가족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여기에는 정치철학사의 맥락이 있다. 필머 등 왕권신수설 옹호론자 일부는 군주의 제도적 지위가 가족 안에서 가부장의 자연적 지위에 토대를 둔다고 생각했다. 인민주권의 수호자 루소에게 가족과 정치체의 동형성은 받아들일 수 없는 가설이다. 『사회계약론』 1권 2장 「초기 사회에 대해」의 한 문장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모든 차이는 다음 사실에 있다. 가족의 경우 아버지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으로 기꺼이 그들을 돌보지만, 국가의 경우 지도자는 인민을 사랑하지 않기에 명령을 내리는 쾌락이 그것을 대체한다.” 가족과 달리 국가에서 사랑은 정부 혹은 군주와 시민들 사이의 원리가 아니다. 사랑은 오직 시민들 사이의, 그리고 시민과 조국 사이의 연결 원리다. 군주의 원리는 오로지 권력욕이며, 반면 가족은 부부 사이건 부모와 아이들 사이건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다.

가족과 국가의 분리는 인민주권 원리를 정초하려는 정치에 대한 냉정하고 분석적인 관점을 전제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서 가족에 대한 절박한 이상화가 감지된다. 루소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아홉 살 땐 아버지마저 제네바를 떠나 고아처럼 살았다. 그는 열여섯 살에 제네바를 탈출해 그가 “엄마”라고 부르는 연상의 여성과 짧고 행복한 사랑을 했다. 그 후 허드렛일을 하는 평민 여성과 사실혼 관계에서 다섯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루소에게 가족은 너무 빨리 상실되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거부된다. 루소의 체험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떠난다. 그에게 공화국이란 부재하는 아버지와 이상화된 어머니-자연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다.

루소는 가족에 대해 사회와 분리되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에밀』의 사례를 첨부할 수 있다. 물론 교육론은 성장한 아이가 짝을 만나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전에 아이는 한 번도 가족에 속하지 않으며 가족을 통해 교육되는 일도 없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유사-아버지와 순수한 아이의 상상적 관계만이 상정되고, 에밀이 꾸리는 가정은 그가 속하게 될 정치체의 원리와 연결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작가보다 정신분석의 관심을 끌면서도 정신분석의 발생과 원리를 논할 때 거의 언급되지 않는 루소의 특이성은 일부분 이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당연히 참조해야 할 것 같은 제네바 시민의 사유를 모르는 척하다가, 죄책감의 불안을 다루는 대목의 한 주석에서 루소의 이름을 단편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루소가 가족을 통해 겪은 실존적 체험과 그의 사유 구조를 연결하는 스타로뱅스키나 데리다와 같은 루소 연구사의 거장들이 정신분석과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치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루소의 가족이 마냥 행복한 사랑의 공동체라는 뜻은 아니다. 루소의 가족은 정신분석이 말하는 직접적인 사랑과 간접적인 사랑의 결합 혹은 죄책감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소설인 『신 엘로이즈』를 읽어야 한다. 평민 출신 가정교사 생-프뢰는 귀족 집안의 독신자 딸 쥘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의 격차는 극복되지 못한다. 쥘리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늙은 무신론자 귀족 볼마르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절망한 생-프뢰는 방랑의 길을 떠나고, 시간이 흘러 생-프뢰의 귀환과 함께 소설 후반부가 시작된다. 인간의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볼마르는 놀랍게도 젊은 부인과 부인의 옛 애인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생-프뢰를 집으로 초대한다. 이 유명한 “3인 가족”은 생-프뢰와 쥘리 사이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우정으로 변환시켜 안정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기획이다.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분석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 여기에는 직접적 사랑의 실패와 함께 그것을 간접적이고 안전한 사랑으로 바꿔야 하는 요구가 다루어지고 있고, 이런 공동체 기획에 함축된 정념론, 정치학, 인류학의 문제가 각기 다른 이념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의해 조망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기획의 결론은 성공보다는 실패 쪽으로 기운다. 쥘리는 실패를 정당화하면서 이후의 성공을 도모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다. “저는 오랫동안 착각에 빠져 있었어요. 그 착각은 제게 유익했고, 제가 더 이상 그 착각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사라졌어요. […] 당신이 쥘리에 대해 잃는 것은, 오래전에 이미 잃은 것밖에 없어요. 그녀의 가장 훌륭한 것은 모두 당신에게 남아 있어요. 그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세요. 그녀의 마음이 당신들 가운데 머물게 하세요.” 이 죽음이 거의 자살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가 죽음을 통해 승화될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해서 남겨진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서 이상화되어 그녀의 빈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쥘리의 진심은 생-프뢰와 볼마르는 물론이고, 전원 마을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숭고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생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모호한 결말은 나머지 사람들이 미래의 공동체에 대해 품은 회의 혹은 머뭇거림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프로이트의 가족과 여러 요소를 공유하지만, 모든 곳에서 프로이트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쥘리의, 쥘리에 대한 숭고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배분과 죄책감을 통한 공동체의 안정화는 요원하다. 우정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사랑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공동체의 이상적인 어머니를 자처하는 쥘리는 그녀의 선량함과 순수함 때문에 초자아의 자리에 안착하지 못한다. 루소에게 가족은 프로이트가 그곳에서 구성된다고 말했던 것이 실패하거나 거부되는 장소이며, 바로 그런 한에서 혹은 그럴 정도까지 이상화된다. 『사회계약론』이 자신의 정치학적 목적을 위해 선언하는 가족의 한계가 이런 이상화의 한 효과처럼 보일 지경이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면 자연적 유대는 즉시 소멸한다.” 가족의 기능은 한정적이고 짧은 동안만 지속된다.

쥘리의 마지막 시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루소에게 초자아의 억압에 대한 거부, 죄책감에 대한 반발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루소에게 초자아에 대한 거부가 있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양심의 자연성과 신성함을 누구보다 더 크게 외치기 때문이다. “양심이여! 양심이여! 신성한 본능, 불멸하는 천상의 목소리여, 무지하고 유한하지만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의 확실한 안내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선악의 심판자, 인간을 신과 같이 만드는 그대 […]” 이때 양심이 일종의 “본능”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양심은 본능이기 때문에, 나와 거리를 두지 않으며 그 목소리는 엄하지 않고 부드럽다. 루소의 양심 개념이 너무 순진한 도덕론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루소에게는 이 근원적 자기 관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관계를 지키거나 회복하는 것이 문명의 임무로 설정된다. 루소는 양심의 자연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교육”과 “편견”의 효과로 환원하려고 하는 당대 유물론에 극렬하게 저항한다.

루소의 윤리학을 상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어도, 무엇으로도 매개되지 않은 이 자기 관계가 바로 정치학에서 일반의지 개념의 모델이라는 것은 말해두어야 한다. 루소의 공화국에서 시민은 법을 통해 집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법은 정신분석에서 전형적인 초자아의 형식이지만, 루소의 이상적인 국가에서 그것은 시민 각자와 어떤 거리도 갖지 않는다. 일반의지와 법이 항상 정당하고 바른 것은, 법이란 시민이 자신에 대해 갖는 의지를 표현하고 기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위 직접 민주주의의 이념, 그러니까 입법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표도 거부하는 완강한 이론적 입장이 도출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흔히 양심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무시하며, 법이 마치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는 듯 행동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루소에게는 논리적으로 하나의 설명만이 남는다. 양심, 법과의 격차는 내부가 아닌 외부의 어떤 영향과 힘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초점은 사랑의 배분 문제에서 죄책감의 문제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루소는 모든 책임을 외부로 떠넘김으로써 문명 속 인간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길 원한다고.

세상의 고통과 악의 책임을 찾는 변신론 전통의 사유가 루소를 종합하는 한 가지 틀을 제공한다는 것은 1932년 카시러의 고찰이다. 루소는 근대적 변신론의 한 모델을 제시한 라이프니츠를 잘 알고 있었으며, 리스본 지진을 화두로 1756년 쓴 『볼테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테르의 비판에 맞서 라이프니츠와 포프의 변신론적 낙관주의를 옹호했다. 세상의 악을 부정하지 않는 최소한의 현실주의를 유지할 때, 전능하고 선한 신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개인을 비난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소는 신도 개인도 비난하지 않는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새로운 책임의 주체로서 사회를 지목하는 것이다. 가톨릭 명절인 만성절에 일어난 리스본 지진의 책임을 두고 그것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는 교회와 더 이상 신에 의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볼테르 양측에 맞서, 루소는 지진이 우리에게 악이 되는 것은 신의 잘못이나 인간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의 특정한 집단적 존재 방식인 도시화 그리고 정치적 도시 중심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양심의 목소리에 저항하는 육체의 정념 또한 사회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평등 기원론』 1부의 한 가지 주요 주장은 자연적이고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육체의 정념과 작용이 대부분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루소는 자연법 전통의 사상가들 모두에게 비사회적 자연상태의 기본 요소로 인정되는 자기애조차 최소한의 동물적 기능 이외에는 사회적 생산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기 위해 사회를 주체화 혹은 주제화한다.

인간을 죄책감에서 구하고 모든 책임을 문명에 전가하려는 루소의 의도는, 심지어 “진정한 기독교”의 옹호자로 하여금 원죄론을 부정하게 한다. 개신교도 루소의 원죄론 비판은, 『에밀』의 저자를 맹비난한 파리 주교를 향한 반박문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서술되어 있다. “당신은 악마의 수중에 있는 인간밖에 볼 줄 모르시지만, 저는 인간이 어떻게 악마의 손에 떨어졌는지를 봅니다.” 악은 본성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론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본질적 죄책감의 부정은 악을 사유하는 철학자의 대전제다. 이런 철학자의 체계 안에서 죄책감의 부정은 단지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경험과 감정의 대상이어야 한다. 『불평등 기원론』이 추론하는 자연인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묘사하는 장-자크는 각기 다른 차원의 담론에서 선과 악의 판단이 사라지고 죄책감이 소거된 세계를 산다. 루소에게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동기인지 확인해야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중 아홉 번째 「산책」에서 그가 아이들을 버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궤변을 이해할 수 있다.

어느 곳에서든, 심지어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주체 바깥으로, “그들”에게로, 사회로 전가된다. 그리고 이런 죄책감의 거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루소의 가장 건설적인 이론적 개입에서는 더 적극적인 기능을 갖는다. 『에밀』의 소위 “소극적 교육”에서, 아이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도록 오랫동안 선과 악의 도덕적 세계로부터 보호되고 통상적인 기독교 교육을 받지 않음으로써 자유와 행복에 대한 건강한 관념을 준비한다.

한편 『사회계약론』 1, 2권이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자기 관계의 정치적 고안을 다룬다면, 3, 4권이 근심하는 것은 이 순수하고 무고한 상태를 위협하는 인민 외부의 영향력이다. 정부는 법의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인민의 지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력을 가지려는 정부의 타락 경향을 막긴 어렵다. 인민이 자신의 육체, 물질계와 맺는 관계인 풍속은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기에 인민의 통제 바깥에 있다. 더 나아가 국제 관계와 전쟁은 루소 정치철학에서 해결되지 않는 난제이고, 『사회계약론』의 마지막 챕터는 이 사실을 소심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이 불가피한 위험들은 아무리 치명적이어도 인민의 결백을 해치지 않는다. “인민은 부패하는 법은 없어도 자주 속긴 한다. 바로 이때에만 인민은 나쁜 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민은 주권자의 다른 이름이고, 주권자란 간단히 말해 책임지지 않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자가 자기 자신에게 법을 부과한다는 것은 정치체의 본성에 어긋난다. 이때 주권자는 유일하고 동일한 관계 속에서만 고려되기에, 자기 자신과 계약하는 개별자의 경우와 같게 된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인민 단체에게는 어떤 종류의 기본법도 의무가 되지 않으며 의무가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명제는 근대 정치학의 전제 하나를 왕 한 사람이 아니라 인민 전체에 적용한 결과일 뿐이지만, 한 사람만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과 모든 사람이 벗어나는 것은 결코 같은 사태가 아니다. 인민주권의 원리란 패망하더라도 인민의 잘못은 아니라는 보장이다.

4. 위로의 사유

5. 두 비관주의

“문명 속의 불만”은 프로이트의 공식이자 루소의 공식이다. 이 공식은 개인과 사회의 양립 가능성을 회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속한 문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문명에서 겪는 불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프로이트는 문명이 본질상 개인에게 불행을 내면화시키는 작용이라고 말한다. 개인에게 행복을 주어야 할 문명은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개인을 불행하게 한다. 그리고 역사는, 특히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을 쓰던 때의 역사는 문명의 이런 역설을 더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명의 건설과 새로운 인간의 교육을 기획하며 인간에게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루소가 언뜻 봐서는 프로이트보다 더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루소와 프로이트를 비교할 때 더 적절한 항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아니라, 차라리 두 개의 비관주의다.

실제로 루소의 역사적 인식은 비관적이었다. 『사회계약론』 후반부에서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정치를 다루는 『산에서 쓴 편지』나 『폴란드 정부론』에서 그는 유럽과 심지어 제네바조차 일반의지의 실현 조건을 이미 상실했음을 확인한다. 정치는 루소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소설 『신 엘로이즈』는 국가와는 다른 방식의 공동체인 인위적인 가족이 실험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실험은 많은 것을 밝혀주었음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루소를 읽는 독자들의 편견과 달리, 『에밀』은 『사회계약론』의 부록이 아니다. 에밀은 능동적 시민이라기보다는 실패한 문명 속에서도 나름의 행복과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이다. 그 속편인 『에밀과 소피』는 그렇게 교육된 인간마저 사회의 불행 앞에서는 무기력할 것이라는 직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루소를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목적론적 해석이 추정하는 것과 달리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일종의 자연상태를 되찾은 개인은 예술가도 시인도 아니다. 그는 그저 죽음을 앞두고 절망에 빠져서 할 일이라고는 산책과 몽상뿐인 노인이다. 이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내면의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현실에 대해 한 번도 긍정적이지 않았다.

프로이트와 루소는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통찰한 사상가들이었다. 다만 프로이트와 달리 루소는 언제나 현재 상태 너머에 있는, 현재 상태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현재 상태를 이론적이고 심정적으로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비교항들을 고안했다. 문명 이전의 자연상태, 내면적 통일과 자유가 집단적으로 복구된 일반의지, 농촌에서 가능한 정념의 공동체, 사회 속에서도 자유로운 단 하나의 개인, 사회에서 쫓겨난 개인의 희미한 몽상… 이런 비교항들은 한편으로 역사의 실패를 더 비관적으로 인식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실패가 필연은 아니었다는 이론적 가능성을, 그러한 위로를, 사회 안에 있는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개인에게도 준다.

나는 프로이트의 후기 텍스트 제목이 루소 전공자에게 일으키는 연상에 따라 프로이트와 루소를 비교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애호가들에게는 부당한 비교일 것이다. 또한 나는 일일이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루소 연구사의 공인된 성과들에 의지했고, 그것과 내 박사 논문 주장 일부를 뒤섞었다. 그 자체로 독창적인 요소는 드물고, 비교라는 진술의 독창성은 편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독창적이지도 않고 엄밀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 루소의 텍스트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여러 측면을 이 정도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훌륭한 연구자들의 작업을 가능하게 하고 후대 먼 곳에서 그것을 참조할 수 있도록 한 특수한 문명 덕분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내가 속한 이 문명에 불만이 없지 않아도 이탈이나 파괴의 충동까지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전공자로서 루소의 시선을 느낀다. 사실 “불만”은 루소의 감정이 아니다. 루소는 충분히 분노하든지 아니면 충분히 절망하라고 말하며, 오직 이 두 가지 감정 사이를 오간다. 더 정확히 말해, 진정한 분노와 진정한 절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든 그 아래에는 어떤 불평등과 죄책감도 없는 상태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루소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만족과 불만의 계산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 사랑이다.

따라서 이런 비교를 한 후에 루소 전공자는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죄책감을 거부하라는 루소를 초자아의 자리에 두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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