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나의 문제가 될 때, 우생주의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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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나의 문제가 될 때, 우생주의 권하는 사회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1.04.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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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와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 앤 커·톰 셰익스피어 지음 | 김도현 옮김 | 그린비 | 480쪽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 앨라배마주는 인공호흡기 지원 시 중증장애인과 인지적 장애인을 후순위로 할 수 있다는 지침을 발표했고, 이탈리아의 의료 지침 역시 단기간에 치료 가능한 건강한 환자를 우선순위에 두고 장애를 고려해 의료 자원을 할당할 것을 주문했다. 독일 나치 정권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후 전후에 종료되었다고 생각한 우생학, 그것은 과연 과거의 일이기만 할까?

이 책은 우생학이 첨단 유전 기술과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념과 만나 더욱 세련되고 암묵적인 시스템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고 폭로한다. 유전질환에 대한 치료법은 부재한 상태면서 사전 판별을 권유하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맞춤 아기’ 등의 ‘더 나은 육종’을 위한 기술은 장애인을 어떤 사회적 위치에 점찍을 것인가? ‘장애’가 그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유전자’ 탓인가? 이 책은 이 모든 성찰을 담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미국과 이탈리아가 장애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보이듯, 사회는 선택의 기로가 명확한 현상을 다룰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에서도 소록도 강제수용소의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단종수술이 시행된 바 있고, 「모자보건법」을 통해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해 왔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도 발달장애인들에게 불임수술이 암묵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이 같은 몇 가지 단편적 사례만 보더라도 우생학은 결코 반세기 이전 과거에 속하는 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우생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생학이라는 용어가 더 이상 쓰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욱 세련되고 시스템화된 형태로, 개인의 선택을 가장한 ‘소비자 우생학’ 내지 ‘뒷문으로 이루어지는 우생학’의 형태로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같은 현대적 우생학이 “현재 널리 퍼져 있는 재생산 구조의 발현적 속성”이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이는 뇌와 의식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의식이 뇌의 어느 곳에서 생성되는지 그 부위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복잡한 인간 뇌의 여러 요소들의 결합이 의식을 하나의 결과물로 생산”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통치 시스템과 재생산 시스템 속에서 우생주의가 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첨단 유전학 기술이 대중에게 익숙해진 이후 ‘우월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 “유전자가 좋네”, “유전자 잘 물려받았네” 등의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한다. 이때 장애인은 암묵적으로 ‘나쁜 유전자’의 산물 정도로 취급되며,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에 장애인이 된다는 인식을 희석하고 만다.

원서

이 책은 ‘유전자 정치’라는 개념 아래 장애와 우생학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우선 국제적 우생학 연구의 풍부한 성과와 문헌들을 바탕으로 영국, 미국, 독일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우생학까지도 매우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해 내고 있다. 예컨대 스웨덴은 1922년 전 세계 최초의 국립 우생학 연구기관인 국가인종생물학연구소를 설립한 나라였고, 1935년 단종법 제정 이후 1975년까지 약 6만 3000건의 단종수술이 이루어졌다. 이는 미국에서 1907년부터 1974년까지 시행된 6만 5000건과 맞먹는 수치로, 나치 독일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인구당 가장 많은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나라가 스웨덴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까지의 이 같은 우생학 역사가 이 책의 전반부를 구성한다.

7장 이후의 후반부에서는 20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한 인간게놈학(human genomic)의 성장과 그 영향을 고찰하고 있다. 게놈학은 흔히 ‘유전 암호’라고 불리는, 게놈의 염기서열과 그 특징을 밝혀내는 작업을 기본으로 한다. 진단 검사나 대규모의 선별 검사 프로그램을 통해 질병과 연관된 유전자를 발견하는 작업이 핵심이지만, 유전자 치료 및 약물 치료의 발전 또한 큰 중요성을 갖는다. 저자들은 이러한 발전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사회적 결과, 그리고 그런 발전이 수반하는 유전학, 장애, 질병에 대한 문화적 이해 및 표상을 고찰하면서 매우 통찰적인 논의들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우생학의 시대에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저자들은 결론에서 유전 정보에 근거한 차별 및 프라이버시와 관련하여 좀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규제를 제창하고, 경미한 유전질환이나 행동 형질에 대한 산전 검사의 개발을 중단하고, 그와 관련된 정보가 간접적으로 입수 가능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냥 무시하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윤리적으로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우리는 장애가 남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가 될 때 어느새 우생학자가 되어 버리곤 한다. 내 아이가 장애인이 될 것임을 미리 알아 버렸다면, 우리 소위 정상인들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장애인을 안 보이게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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