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革新) 당위론 뒤에 숨은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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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革新) 당위론 뒤에 숨은 지식인들
  • 최기련 논설고문/아주대학교 명예교수·에너지경제학
  • 승인 2021.04.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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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련 칼럼]_ 논설고문 칼럼

요즘 신문 칼럼이나 논설을 읽기가 싫은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괜히 읽었다고 후회하거나 심한 비판의 소리가 무심결에 나오기도 한다. 일찍 일어나서 신문 논설과 칼럼을 아침식사 전에 읽는 습관이 나름 오래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전과 같지 않다. 제목만 대강 보고는 덮는다. 마음의 양식을 채우는 즐거움이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아예 없는 날도 있다. 이때는 차라리 CNN, BBC 등 외국 방송을 본다. 물론 이 모든 행태는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자 일상사이다. 절대로 일반화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지식의 지나친 정치화에 대한 개인적 견해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 ‘Post COVID19’ 시대 새로운 사회이념체계(New Normal)의 모호함과 불안정성에 따른 것이라고 변명도 한다. 

사실 ‘코로나’ 이후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비-논리적 미래예측이 양산되고 있다.  틀릴 수밖에 없는 미래예측이라도 우선은 믿고 싶은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럴 때에는 불확실한 미래 예측을 ‘혁신’으로 포장하고, 혁신의 어려움을 구실로 허황한 미래예측을 합리화하고 수용한다. 예컨대 지난 몇 년 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언론 등을 통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단어이다. 만약 4차 혁명이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지적 수준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몰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문명사나 기술혁신경제학 관점에서 냉정히 따지고 보면 미흡한 과학적 논리가 많다. 4차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차이도 모호하고, 우리 미래가치가 4차 산업혁명 논리에 따라 구획될 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에 일부 양식 있는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시대 대신 화폐 자본시대, 기술 자본시대, 신뢰 자본시대 등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저명 칼럼리스트이자 언론인인 Rifkin의 동명 저서와 그에 앞선 ‘엔트로피’ 등 미래교양서적의 영향력에 압도되어 검증논리를 들이댈 엄두를 못 내었다. 이 결과 4차 산업혁명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애매모호한 면이 많다. 이래서 필자는 현안 시대특징을 ‘무질서한 사회(Anarchical Society)’로 규정하고 싶다. 

사실 ‘코로나’ 사태는 원치 않는 모두에게 치명적인 감염 피해를 줄 수 있다. 유례없는 부정적 외부효과(Externality)를 동반한다. 그래서 시급성과 민감성 차원에서 다른 모든 이슈를 압도한다. 따라서 ‘코로나’ 사태 이후에 기존 가치체계를 대신할 속칭 ‘뉴-노멀(Normal)이 정착되기까지는 또 다른 많은 변화를 거칠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감염방지를 위한 경제와 개인의 이동제한일 것이다. 사회적 부가가치 창출방식이 ‘비(非)접촉 - 온라인(On Line)’으로 변화된다. 재택근무가 대표적이다. 출퇴근이 줄고, 수송수요가 크게 줄었다. 여기에다 국가 간 수송수요 감소는 2차 대전 이후 구축된 ‘세계화’ 과정과 국가 간 분업체계의 붕괴를 유발하였다. 부가가치 생산과정의 글로벌 분업체계가 붕괴되고, 호혜성장체제가 약화 내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악순환의 끝은 교역감소와 국가이기주의 고조로 귀결될 것 같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 재선 실패와 ‘바이든’ 정부 취임 이후에도 세계화 추세 약화와 미국 국익우선 경향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트럼프’ 정부의 ‘무작정’ 미국우선주의는 ‘바이든’ 시대에는 ‘동맹 중시“로 변화할 것 같았으나 인권과 환경중시 이념강화를 통한 ‘바이든 류’의 미국우선주의는 트럼프 시대와 거의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국제 분업강화는 원론에 그치고. 현실에서는 환경과 인권측면의 강조에 따라, 국제협력과 분업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중국, 러시아 등과의 갈등도 봉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한 시대에 흥미로운 것은 신문칼럼이나 논설에서 근본적인 인권문제나 장기-글로벌 지구환경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외곽의 그린뉴딜, 탄소중립, 대체에너지와 같은 에너지-환경문제를 많이 언급한다는 점이다. 이들 외곽 문제들은 기술혁신, 경제체질 개선 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해결과제이다. 그리고 그 실현과 책임소재가 불명확하다. 이에 인권이나 지구환경개선을 위해 당장 행동이 필요한 절차시행은 뒤로 미룬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국가/지역별 탄소중립, 그린뉴딜 등을 우선 거론한다. 예컨대, 당장 개선이 필요한 중국의 ‘신장-위구르’ 인권문제는 모든 국가들이 말로만 한다. 구체적 행동이나 조치는 없다. 선진국들 간 실질적인 이해충돌 문제는 아예 회피한다. 이에 반해 장기과제인 중국 신재생 확대의 한계는 크게 부각시킨다. 미얀마 군부독재의 인권탄압도 모든 국가들이 말로만 규탄한다. 실질행동을 제약할 UN 안전보장 상임이사국들의 권한은 적극 존중한다. 

환경정의에 관해서도 에너지소비 감축 등 특정국가 내부의 근본 해결책은 피하는 가운데, 부수적인 저소득층/지역의 환경재해 증가 등만을 다룬다. 사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 에너지 대책으로서는 에너지이용 합리화/소비감축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금 당장 생산과 소비행태 변화를 요구하는 막대한 사전투자와 장기간의 투자 선행기간도 요구된다. 이에 세대 간 성장이나 부가가치 창출의 근원적 정책변화를 다루어야 하는 본원적 환경정의에 대한 언급은 회피되고, 기술혁신 수준에 따라 그 미래가 불투명한 대체에너지만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어느 나라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이다. 정치적 이념이 논리적 추론을 압도하는 수준이 세계 최고라는 의견도 일부 있다. 촛불민심이 이 시대의 최고 가치를 반영한다는 정책당국의 믿음이 문제의 과학적 분석과 비교평가, 그리고 연역적 해결책과 가치평가라는 전통적 가치평가 체계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한다. 정교한 논리분석보다 새로운 이념체계 정착을 우선시하는 것이 현임 정부의 정책논리이다. 겨우 취임 한 달 만에 제시된 탈(脫)원전 정책이 대표적 사례이다. 지진재해 회피를 위한 것이라는 탈(脫)원전 정책은 국가 에너지 수급 안정화 목표를 변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계량적인 정책목표 제시가 불가능할 정도의 초보 수준의 전문성만을 가진 환경론자들의 정치적 논리를 무조건 수용하였다. 

원론적으로 기후변화 문제는 지구탄생 이래 오래 축적된 풀리기 힘든 외부효과(Externality)이다. 따라서 기후변화 파급효과 평가와 해결논리 체계와 그 결론은 아직 ‘완전한’ 진리라 할 수 없다. 예컨대, UN도 산업화 이후 지난 200여 년만을 최근의 기후변화 문제 분석과 해결대상 기간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로 UN은 아직도 기후변화는 인간 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수준의 잠정결론에 그치고 있다. 이런데도 많은 환경론자들은 온갖 인류 현안문제들의 ‘완전한 궁극’ 원인을 기후변화로 간주한다.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친 과학적 접근이 ‘아직은’ 아니다. 사실 환경이나 에너지 문제와 같은 복합과학적(Multi-Disciplinary) 문제는 자칫하면 단일 학문의 정교함과 엄격한 검증과 예측 과정이 손상되기 마련이다. 특히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 해결 목표를 정치이념 차원에서 강조할 경우 학문의 엄정성과 논리성은 무시되기 쉽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환경론자들이 환경문제 해결 수단으로 너무 단정적으로, 그리고 쉽게,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의 ‘전환’과 융합, 그리고 에너지-환경기술 복합화 추세를 강조하는 것은 환경-에너지 기술 문제와 배출권 거래 등 새로운 사회경제 과제(환경론자들의 이해가 걸린)들과의 연계강화를 의미한다. 이런 과정에서 복합화 과정이 심화되고 다양한 가치체계가 중합되고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에 전문성보다 정부정책 부합도가 더욱 중시되기 마련이다. 

결국 우리나라 에너지 부문의 ‘정치화’ 열풍은 이제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관련 학자들의 신뢰는 저하되고 복합과학으로서의 에너지 학(學)의 질적 제고는 정체되었다. 그 결과로 정부정책 논리성 검증에 긴 시간이 소요되고 복잡한 이해충돌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불확실성에 질린 ‘진짜’ 전문가들일수록 자신의 견해 노출을 꺼린다. 그 대신 정치화된 ‘복합문제 전문가’들의 참여 열기는 더욱 고조된다. 예전에는 의견 제시 자격조차 없었던 그들은 정부정책에 적극호응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면 정부정책 형성과 집행과정 참여 확대의 이득뿐 아니라 에너지 전문가로의 ‘공공연한’ 신분전환이 가능하다. 이러니 그들은 정부정책 호응수준을 경쟁적으로 높인다. 정부실패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들은 갈수록 정부정책 합리화 경쟁을 벌일 뿐 아니라 정통 에너지 전문가들의 진입 봉쇄작전마저 벌인다. 

여기에다 일부 언론기관의 부정적 역할도 보인다. 정부 선호 전문가 활용을 통한 관-언 협력체계 강화가 커진다. 코로나사태 이후 언론시장의 한계(수익성 차원)보완 시도일 수 있다. 물론 일부 소수 언론은 무조건 정부반대 의견 강화로 존재가치를 높인다. 여기다 기자 등 관련 종사자들이 전문가 대신 자신들의 직접 의견표명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언론 과-부장급 기명 칼럼이나 연재기사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개별 언론인들의 정치적 욕구를 반영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러니 정부시책에 따라 친환경, 저탄소 시대로 빨리 전환되면 기후변화 문제와 에너지문제가 다 같이 해결된다는 식의 공허한 신문사설과 전문가 기고문만을 날마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언론 등에서 진짜 전문가 의견 접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정치화 열풍은 반드시 시장 실패를 유발하고, 결국은 국민 부담으로 귀결된다. 관련자들이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자성의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결론 밖에 못 내는 요즘 시대가 너무나 하수상한가? 


최기련 논설고문/아주대학교 명예교수·에너지경제학

아주대 에너지학과 명예교수로 서울대학교 자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Grenoble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너지자원기술개발지원센터 소장,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단장, 고등기술연구원장, 한국 에너지공학회 회장, 차세대 성장 동력 포럼 회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종합조정 실무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에너지와 기후변화>, <파워 플레이>, <에너지경제학>,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에너지와 환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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