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반란과 카이사르의 등장
상태바
노예반란과 카이사르의 등장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4.04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7)_ 노예 이야기 3: 노예반란과 카이사르의 등장

자기연민(Self-pity)
               ---  로렌스(by D. H. Lawrence)

나는 스스로를 동정하는 야생동물을 I never saw a wild thing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sorry for itself.
얼어 죽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새조차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기지 않는다.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로마 콜로세움과 검투사 모자이크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

전쟁의 승자는 패자에 대해 생사여탈권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취할 권리를 갖는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원시사회이든 현대사회이든, 이는 불변의 가치이다. 로마는 무수한 전쟁을 치뤘다. 승자가 될 경우에는 엄청난 재화로 자신의 창고를 채울 수 있고, 획득한 적병을 얼마든지 노예로 부릴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 모인 관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갈 스릴 넘치는 경기는 노예와 검투사들의 몫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노예는 경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예의 수는 대략 자유민의 30~45%를 차지했고, 이들은 그리스어나 수사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에서부터, 회화, 조각 등의 장인, 검투사, 집안일을 담당하는 노예, 라티푼디움(Latifundium, 광대한 토지)의 농장노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한편 일정 조건을 갖춘 해방 노예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정의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세 차례의 노예반란이 일어났다. 제1차 반란은 기원전 135년부터 132년까지, 제2차 노예반란은 기원전 104년에 일어났다. 두 차례 모두 시칠리아에서 발발했는데 시칠리아가 전통적으로 로마의 곡창지대로 대규모 농장에서 노예를 많이 부렸고 그 과정에서 학대도 극심했기 때문이다. 두 반란 모두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제3차 노예반란은 사정이 달랐다.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74명의 검투사들이 집단 탈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험준한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쳤다. 주동자인 스파르타쿠스(기원전 111년 경~기원전 71년)는 트라키아, 크릭수스는 갈리아 출신이었다. 

영웅전을 쓴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크는 스파르타쿠스가 유목민의 혈통을 지닌 트라키아인이라고 했다. 로마인 플로루스는 그가 트라키아인 용병으로 로마병사가 되었다가 탈영을 했고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가 힘이 좋아 검투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당국은 반란노예들을 막으려고 처음에는 정규 로마 군단이 아닌 3,000명의 토벌군을 보냈으나 검투사들에 의해 맥없이 제압당했다. 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주변 농장의 노예들이 집단 탈출하여 베수비오 산으로 몰려들었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은 대규모 농장이 많았고 부유한 로마 귀족들의 별장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어서 노예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검투사 군단에 합세한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의 지휘 아래 2개 정규 군단이 파견되었으나 이들 또한 반란군에 격파당하고 만다. 반란군은 로마군의 장비로 무력을 보강했고, 이 소식을 들은 노예들이 속속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병력이 점점 늘어났다. 그 해 겨울 스파르타쿠스는 급격히 늘어난 반란군을 조직화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스파르타쿠스 상과 스파르타쿠스의 몰락(헤르만 포겔, 1882),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그러나 사정이 달라져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 반란군은 크라수스가 지휘하는 로마군단병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전사하고 괴멸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끝내 찾아낼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속주 히스파니아에서 귀환한 폼페이우스는 이 전쟁에서 직접적으로 스파르타쿠스와 대적하지는 않았지만 반란군 잔당을 소탕하는 데 협력했다. 크라수스는 직접적인 전쟁의 승리자로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고 대부분의 노예군을 학살했다. 살아남은 노예군 6,000여 명도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카푸아와 로마 사이의 아피아 가도변에서 모두 십자가형을 당했다. 길가에 늘어선 십자가는 수십 km에 달했다고 한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카이사르 루비콘 강을 건너다(Caesar crossed the Rubicon)

카이사르 조각상

기원전 59년 42세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집정관이 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킨다. 사위가 장인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카이사르의 딸의 이름은 율리아(Julia). 당시 로마의 작명 관습은 여자는 누구든 씨족 이름에 여성 어미 –a를 붙여 불렀다. 지금도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성들의 이름은 –a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Maria, Lucia, Julia, Sophia, Johanna, Anna, Eva,... 

카이사르 아버지의 이름도 똑같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루시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딸이다. 그리고 그의 누이 두 명은 큰 율리아, 작은 율리아라고 불리었다. 

보통 로마 남성 시민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프라이노멘(개인 이름), 노멘(씨족 이름), 코그노멘(별명이거나 가문 이름)이 그것으로 카이사르의 경우, 친구나 가족들은 그를 가이우스라는 개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개인 이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이우스, 티베리우스, 그나이우스, 아피우스, 루키우스, 푸블리우스, 마르쿠스 정도가 당시 통용되던 이름들로, 예수라는 이름이 동네마다, 한 동네에도 여럿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해방 노예는 옛 주인의 개인 이름과 옛 주인의 씨족 이름, 그리고 노예 시절의 개인 이름,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을 사용했다.

Gaius는 라틴어에 기원을 둔 말로, 그 뜻은 ‘행복한, 근심걱정 없는, 즐거운’이다. Julius는 ‘솜털로 덮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ioulos이거나 ‘주피터 신을 숭배하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Jovilius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그노멘 Caesar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당시 정치적 의결권이라거나 로마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오직 백인 남자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다. 여자와 노예는 여전히 사람이 아니었다. 라틴어에서 유입된 testimony(법정 증언)이라는 말이 남성의 고환을 가리키는 testicles와 어원이 같다는 것만 보아도 여성이 민주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그러하므로 율리아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혼인동맹을 거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라는 정치적 야욕이 남달랐던 세 명의 사내들에 의한 제1차 삼두정치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 의리, 우정이 결여된 억지 혼인동맹으로 유지되었던 관계는 5년 뒤인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음으로서 파국을 맞는다. 

그렇게 해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간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고, 크라수스가 동방의 강적 파르티아(페르시아) 왕국과의 전쟁 중에 사망하면서 카이사르의 인기가 높아진다. 파르티아(Parthia)는 기원전 3세기 중반 카스피해 동남쪽 테젠강 유역에서 히르카니아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유목생활을 하던 파르니(Parni)족의 족장 아르사케스(Arsaces) 형제가 주축이 되어 수립한 국가다. 기원 후 226년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 이 나라를 중국사서는 안식(安息)으로 기록하고 있다. 족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국명으로 파악된다.
 
기원전 1세기 그 시절 로마의 결혼 풍습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카이사르는 또 한 번 혼인동맹의 카드를 내민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둘은 결국 적대자가 된다. 카이사르가 속주인 갈리아에서 바바리언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제거할 작업을 진행한다.

기원전 49년 마침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진군한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뜻한다. 권력욕에 불타는 남자들의 용쟁호투가 시작된 것이다. 불리하다고 판단되던 전세를 뒤집고 최후의 승자가 된 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