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심볼리쿠스…기호적 경험의 체험주의적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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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심볼리쿠스…기호적 경험의 체험주의적 해명
  • 노양진 전남대·철학
  • 승인 2021.04.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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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기호적 인간: 기호적 경험의 체험주의적 해명』 (노양진 지음, 서광사, 253쪽, 2021.02)

『기호적 인간』은 매우 낯설고 새로운 기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이 새로운 기호 이론을 ‘체험주의 기호 이론’(experientialist theory of signs)이라고 부른다. 이 기호 이론은 ‘신체화된 경험’(embodied experience)의 본성과 구조에 대한 체험주의적 해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체험주의는 1980년대 언어학자인 레이코프(G. Lakoff)와 언어철학자인 존슨(M. Johnson)이 창도한 신생 철학이다. 체험주의는 새로운 은유 이론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논의의 폭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시각으로 등장했다. 체험주의는 20세기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경험적 지식, 특히 인지과학의 성과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사변적 전통을 비켜서서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안한다. 나아가 체험주의는 전통인 객관주의 철학은 물론 이를 비판하는 급진적 해체론을 넘어서는 ‘제3의 시각’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체험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경험은 몸을 중심으로 한 신체적/물리적 층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점차 추상적/정신적 층위로 확장되어 간다. 여기에서 경험 확장의 핵심적 기제로 제시되는 것이 ‘은유적 사상’(metaphorical mapping)이다. 필자는 은유적 사상이라는 기제가 단순히 은유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경험을 물리적 층위에서 기호적(추상적/정신적) 층위로 확장해 가는 핵심적 기제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때문에 필자는 ‘은유적 사상’ 개념을 ‘기호적 사상’(symbolic mapping)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함으로써 그것을 기호적 경험 전반을 특징짓는 핵심적 기제로 규정했다. 즉 우리는 ‘기호적 사상’을 통해 물리적 경험을 넘어서서 기호적 층위로 우리의 경험을 확장해 가는 것이다.

새로운 기호 이론은 기호의 문제가 우리 밖의 사물이나 사건,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적 경험’의 문제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기호적 경험은 기호의 산출과 해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두 과정 모두 ‘기호적 사상’이라는 인지적 기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호적 사상이란 나에게 이미 주어진 경험내용의 일부를 다른 물리적 대상에 사상하고, 그 사상된 경험내용의 ‘관점에서’(in terms of) 그 대상을 새롭게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물리적 대상이 스스로 ‘기표’(signifier)가 되는 일은 없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의 기호적 사상을 거쳐서만 비로소 기호적 해석의 대상, 즉 기표가 된다. 한편 어떤 대상에 어떤 경험내용을 사상할 것인지를 결정해 주는 선결적 원리는 없다. 기호적 경험은 그만큼 개방적이다. 기호적 사상은 우리의 자연적·사회적·문화적 조건에 영향 받으며, 따라서 그만큼 불투명한 동시에 불안정하다. 이러한 불투명성/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호적 경험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경우 물리적 경험 안에 갇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적 경험은 물리적 경험을 넘어서는 ‘확장’이라는 본성을 통해 가장 적절하게 정의될 수 있다. 먼저, 기호적 경험은 내재적 확장의 통로다. 우리 경험은 물리적 층위에서 출발한다. 우리 경험은 두뇌와 몸,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복잡한 국면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확장되어 드러나는 새로운 창발적 국면이 바로 기호적 국면이다. 이 확장은 선결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유, 환유, 심적 영상, 원형효과 등 다양한 비법칙적 기제들이 개입되며, 따라서 확장된 국면에 대한 법칙적 분석이나 환원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둘째, 기호적 경험은 외재적 확장의 통로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 안에 유폐된 존재다. 나는 타자의 경험내용, 즉 타자의 지각, 의식, 기억, 상상, 의도, 욕구 등에 직접 접속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유폐성의 벽을 비켜서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기호적 통로다. 우리는 서로의 경험내용에 직접 접속할 수 없는 대신 제3의 매개물을 통해 그 경험내용을 교호하려고 한다. 표정이나 몸짓, 언어, 소리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물리적 대상이 그 매개물이 될 수 있으며, 그 매개물이 바로 기호적 해석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 기호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기표’(signifier)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 기표에 대한 기호적 해석을 통해 타자의 경험내용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기호적 해석은 본성상 ‘불투명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사변적 철학이 꿈꾸었던 ‘확실성’은 우리 경험의 사실이 아니라 철학적 열망의 산물일 뿐이다. 

필자는 새롭게 해명된 기호적 경험의 본성을 ‘탈유폐적 자기 창발의 과정’(ex-carcerating process of self-emergence)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새로운 정의와 함께 체험주의 기호 이론은 기호가 ‘누구인가에게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어떤 것’이라는 전통적 기호학의 느슨하고 피상적인 정의로부터 벗어나 기호적 경험의 훨씬 더 깊은 심층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체험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전통적인 기호학적 논의들은 대부분 실재론적 가정에 묶여 있었으며, 이 때문에 기호에 관한 논의는 ‘기호현상’이라는 표피적 층위에서 멈추고 말았다. 소쉬르(F. de Saussure)에서 출발한 구조주의 기호학이 그렇고, 퍼스(C. S. Peirce)에서 출발한 화용론적 기호학이 그렇다. 한편 카시러(E. Cassirer)는 실재론적 기호 개념을 벗어나 처음으로 기호의 문제를 우리 인식의 문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상징형식을 ‘객관적/선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호적 경험’의 비법칙적 본성에 대한 경험적 해명을 스스로 봉쇄하고 말았다. 

체험주의 기호 이론에 따르면 철학, 문화, 예술, 종교, 신화 등 우리의 정신활동이 개입하는 모든 영역의 문제들은 기호적으로 구성되고, 기호적으로 유포된다. 따라서 이 모든 분야에서 모든 문제들은 체험주의 기호 이론을 따라 새롭게 분석되고 논의되고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은 아마 필자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책에서 체험주의 기호 이론의 이론적 골격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것은 앞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구체적 적용을 통해 필자가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도전과 시험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 도전과 시험의 귀결이 무엇일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분명하고도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기호 이론이 전통적 기호 이론들이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들을 넘어서서 기호적 경험에 대한 경험적 해명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노양진 전남대·철학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서던일리노이대학교(Southern Illinois University at Carbondale)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다. 주로 언어철학과 윤리학, 철학방법론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 『상대주의의 두 얼굴』, 『몸·언어·철학』, 『몸이 철학을 말하다』, 『나쁜 것의 윤리학』, 『철학적 사유의 갈래』가 있으며, 역서로 『마음 속의 몸』, 『몸의 철학』(공역), 『삶으로서의 은유』(공역), 『도덕적 상상력』,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의 도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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