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답변을 통해 다시 만나는 명저, 『일반언어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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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과 답변을 통해 다시 만나는 명저, 『일반언어학 강의』
  • 김성도 고려대·언어학
  • 승인 2021.04.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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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읽기』 (김성도 지음, 세창미디어, 368쪽, 2021.03)

올해 2021년 초에 출간된 졸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읽기』의 잉태는 세창출판사의 명저 산책 기획의 일환으로 2016년 필자에게 집필을 제안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필자의 게으름으로 몇 년을 미루다가, 밀린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작년 봄에 집중적으로 써 내려갔다. 고백건대, 수십 년간 소쉬르의 언어 사상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연구하는 노력을 경주해 왔으나, 여전히 그 심오함의 정수는 신기루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경험의 반복이었고, 근자에는 권태기에 접어든 기분이었다. 특히,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참신한 내용을 기술하는 것이 어렵고, 기존의 알려진 내용을 반복해서 서술하는 것은 따분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서술형의 건조함과 따분함을 덜고자, 대화 형식의 글을 편집자에게 제안했고 흔쾌히 수용되어 겨우 숙제를 끝낼 수 있었다. 더 이상적인 상황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이가 직접 묻고, 답하는 형식이었겠으나, 아쉽게도, 필자 스스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쨌건, 대화는 인문학은 물론, 공부와 지식 연마에서 여전히 본질적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제목도 <일반언어학 강의 100문 100답> 정도로 제안하고, 다소 작위적으로 100개의 물음으로 틀을 짜려고 했으나, 스스로 묻고 답하는, 생각보다 흥이 나는 작업에 몰입하다 보니, 질문의 숫자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이 원고를 준비하려고, 본서에서 필자가 마련한 물음의 숫자를 세어보니 대략 110여 개에 이르러 얼추 100문 100답이라는 제목을 달아도 무방할 듯하다.

본서는 기존의 소쉬르 연구에 견주어 새로운 해석이나 관점을 제시한 것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다만, 이 책을 완독한 어느 독자가 필자에게 들려준 소감처럼, 내용을 떠나 필자가 위대한 소쉬르 선생에 대해 갖고 있는 정신적 흠모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최소한 절반은 성공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자축했다.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br>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그렇다. 필자가 이 작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궁극적 메시지는 100년 전 타계한 한 위대한 언어학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헌정이다. 그리고 스위스 즈네브 대학의 한 작은 강의실에서 열 명 안팎의 제자들에게 들려준, 창조성으로 번득이는 가르침이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탄생한 과정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소쉬르 선생이 30년 동안 파리와 즈네브에서 강의했던 주제들 가운데, 특히, 일반언어학은 당시에는 그 내용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5년 동안 그의 강의를 경청했던 언어학의 초심자 제자들은 사실 내용보다는 그들의 스승이자 한 천재적 학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그저 감상하고, 찬탄하면서 탁월한 천부적 교육자로서의 재능을 지닌 스승의 지적 마력과 시적 상상력에 몰입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필자가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은 소쉬르 선생 자신조차도 자신의 언어학 사상이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사후에 현대 언어학의 정초를 놓을 혁명적 언어 이론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생전에 소쉬르 선생은 19세기에 언어연구의 헤게모니를 석권한 비교역사언어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언어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했으나, 그 같은 작업의 방대함에 대한 절망감을 자신의 직계 제자이자 당시 프랑스 언어학계의 태두였던 메이예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따금 피력하고 있었다. 

소쉬르의 언어사상이 현대 언어학을 비롯해 그 외연을 확장하여 20세기의 여러 인간과학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깊고 드넓은 항적을 남겨, ‘소쉬르와 20세기 인문학’이라는 백과사전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일반언어학의 수용과정과 현대 인문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제3장은 이 같은 방대한 문제의 거친 소묘에 불과하다. 

소쉬르의 삶과 <일반언어학 강의>의 탄생을 다룬 제1장의 핵심 메시지는 세 개로 압축된다.

1916년에 로잔과 파리에서 최초로 출판된 [일반언어학강의]의 프랑스어 원본의 표지<br>
1916년에 로잔과 파리에서 최초로 출판된 [일반언어학강의]의 프랑스어 원본의 표지

첫째, 현대 언어학을 창조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소명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준 소쉬르의 천재성이며, 둘째, 소쉬르가 30년 동안 교수로서 제공했던 다양한 주제들의 강의를 비롯해 특히 그가 말년에 공력을 기울인 <일반언어학 강의>는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창조적 교육이었다. 창조성이라는 단어는 이제 다소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데, 근대 대학이라는 제도 기관에서 탄생한 소쉬르 선생의 강의가 바로 대학 강의의 창조적 잠재력을 보여준 전범이라고 말하고 싶다. 셋째, <일반언어학 강의>와 관련해,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개의 목소리와 언어가 있고, 특히 소쉬르 선생이 언어학의 문외한인 제자들을 위해 사용한 언어와 대비되는 또 다른 자신의 내밀한 언어 또는 전혀 다른 주파수의 ‘레지스터’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비록 분량이 소수이나 언어의 본질, 언어학의 이론적 얼개, 기본 개념들에 대해 소쉬르 선생이 거의 독백처럼 적어놓은 자필 수고에는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판, 회의, 그리고 거의 불교적 명상이나 선문답과 흡사한 형이상학의 파편적 성찰들이 산포되어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자 했다. 앞서 언급한 소쉬르 사상의 두 개의 핵심 열쇠, 천재성과 창조성에 견주어 이 세 번째 특징을 소쉬르 사상의 다성성(polyphony) 또는 다원성이라 말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해체성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필자는 아직 확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이 책의 중심에 해당되는 제2장인 ‘<일반언어학 강의>의 이론적 얼개와 핵심 개념’을 다시 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있다면, 단 하나의 개념이라도 안일한 해설이 아닌, 직접 자기 것으로 체화시킬 동기 부여를 마련하는 데 있었다.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제시된 중추적 개념들은 거의 모든 소쉬르 연구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제시된 개념들의 제시 순서, 중요성의 정도, 개념들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치열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기호 개념, 랑그와 파롤, 가치론, 공시태와 통시태, 통합체와 연합체 등 모두 현대 언어학과 현대 기호학의 요소들을 형성하는 보석 같은 이론과 개념이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귀띔해 주고 싶은 당부사항이 있었다. 필자는 이 같은 인류학과 정신분석학을 비롯해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된 이 같은 혁신적 개념들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다룬 다소 고전적인 주제들을 싣고 있는 중반부 이후에 대한 독서를 누락시켜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역발상으로 이 책의 중반부부터 독서를 시작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언어와 지리, 언어와 민족 등의 주제에 대한 소쉬르의 해박함과 통찰을 비롯해 그의 문자 이론 등은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내심을 발휘해 이 불후의 고전에 대한 완결된 독서를 주문하고 싶다. 끝으로, 책에서 시사한 것처럼 소쉬르가 사용한 은유와 그래픽 이미지와 다이어그램에 주목해서 독서를 하면 소쉬르 언어 자체의 독창성을 음미할 수 있는 색다른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도 고려대·언어학

고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파리 10대학에서 언어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기호학회와 한국영상문화학회 회장, 고려대 영재교육원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세계 기호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세계기호학회 공식 학술지 『세미오티카』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논문상(Mouton d’Or)과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 『구조에서 감성으로』, 『도시 인간학』, 역서로는 『그라마톨로지』, 『퍼스의 기호사상』,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언어학자와 무의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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