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격사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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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사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 이재국 성균관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1.03.28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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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얼마 전 미국 애틀란타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의 한국계 피해자들이 누구인지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매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오고 있지만, 영국 BBC는 이들이 현정 그랜트, 순 C 박, 순자 김, 용 A 유 등 4명이라고 보도했다. 이들 중 현정 그랜트는 아들이 딱한 사정을 호소해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가 한국에 있을 때 교사로 일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희생자들의 미국식 이름을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다 이들이 이국땅에서 살았을 신산한 삶이 함께 읽힌다. 현재 또는 예전 배우자의 성으로 보이는 그랜트, 국문 이름 첫 글자가 자기도 모르게 영문 이름(first name)이 되어 미국에서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불렸을 순, 용에서 이들의 과거가 들려온다.

20년 전 필자가 미국 시카고의 한 신문사에서 일할 때도 한국계 여성들은 스파 또는 마사지 팔러로 불리는 곳에서 일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날 시카고 교외의 한 지역 경찰이 이들 업소를 단속해 영업정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위를 듣고자 업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편 낙담하고 또 한편 흥분한 목소리의 중년 여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알고 싶으면 전화하지 말고 직접 오세요.” 1시간 정도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칸막이 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마사지 업소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업주는 단속의 부당함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자신의 힘든 인생사를 풀어 놓았다. 한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해 태평양을 건넌 뒤 얼마 못 가 이혼하고 혼자 힘으로 생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이렇게 단속을 당하면 어떻게 사느냐는 항의였고 한탄이었다. 이혼 뒤 재산은 한 줌뿐이고 써먹을 학력은 없는데 영어까지 부족한 여성이 미국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그래도 정부 복지에 손 벌리지 않고 세금 내며 영업한다고 소리쳤다. 현정 그랜트, 순 C 박, 순자 김, 용 A 유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이국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노력이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다.

한국인이 희생당한 총격 사건은 마사지 팔러 단속 얼마 전 시카고와 가까운 인디애나 주에서도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이 있는 작은 소도시 블루밍턴의 한인 교회 주차장에서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던 범인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유학생 윤원준 씨가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시카고로 달아난 범인이 북부 교외에서 또다시 총을 난사해 흑인 1명이 숨졌다. 이번 희생자는 부근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의 풋볼 코치였던 까닭에 총격 사건은 미국 사회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백인을 겨냥한 백인의 인종혐오 사건으로 규정됐고 범인이 속한 종교단체까지 수사를 받기도 했다. 사건 발생 10년 후 공교롭게도 인디애나대학에서 일하게 된 필자는 윤원준 씨의 이름을 딴 장학금이 생긴 사실을 알게 됐다. 외국인 또는 외국계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이름이 이렇게나마 기억되고 있었다.

이번 애틀란타 총격 사건이 처음 보도될 무렵 그 옆에 이상한 기사가 하나 걸렸다. 서울시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코로나바이러스 진단 검사를 의무화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었다. 17일부터 31일까지 보름 동안으로 기간까지 정해져 있어 받지 않을 경우 200만 원 이하의 벌금까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사고수습본부의 요청으로 행정명령은 철회되고 권고사항으로 바뀌었지만, 이 소동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소수의 집단을 특정해 검사를 강요하는 것이 차별 논란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에서 식당에 들어갈 때 손님의 99%를 차지하는 백인들이 신기한 듯 쳐다볼 때, 보도를 걷던 중 지나가는 차에서 욕설이 들려올 때 느꼈던 그 숨 막히는 고립감을 이 땅에서도 재현하는 것이다. 지난겨울 비닐하우스에서 잠자던 외국인 노동자들 여럿이 숨지거나 다쳤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차별과 혐오로 더욱 힘들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수치일 뿐이다. 현정 그랜트와 함께 숨진 모든 이들, 비닐하우스에서 목숨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명복을 빈다.


이재국 성균관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성균관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전)
. 중앙일보 기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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