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의 치명적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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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의 치명적 오류
  •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경제철학
  • 승인 2021.03.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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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국 칼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즉 인간본성을 중심에 두고 정치·사회적 논쟁에서 전자의 손을 들어 준 책이 최근 발간되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한글판 『휴먼카인드』다. “우리의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이 사회를 재조직하는 근본 원리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끝을 맺는다. 사회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등의 추선사는 칭찬 일색이다. 한국사회에서 도킨스의 한국판 『이기적 유전자』이래 사회생물학의 지적 횡포가 지나치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냐(홉스) 이타적이냐(루소)는 중요한 게 아니다. 행동동기는 변동하기 때문에 사회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건 인간이 지닌 지식과 관심은 구조적으로 제한이 되어 있다는 점,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성의 구조적 한계라는 불변적인 사실이다. 

인간이 알 수 있는 인적 장소적 범위는 사회 전체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가족 친구 정도나 잘 알고 있을 뿐인 건 인간이성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친숙한 사람들을 향한 인간행동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행동과 전혀 다른 이유도 그런 한계 때문이다(애덤 스미스).

친숙한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들과 나누고 그들을 배려하거나 그들을 위해 희생할 각오도 되어 있다. 성선설이 옳은 이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주의자다. 유대감이 최고의 덕목이다. 이런 도덕은 가족, 친구 등 아주 은밀하고 친숙한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이다.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편협한 이기심을 특징으로 한다는 홉스의 성악설을 따르는 사회생물학(리처드 도킨스)도 비록 표현형이기는 하지만 가족·혈연관계에서 자발적 자기희생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범위를 넘어서면 이기심이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판을 친다고 한다. 자본주의는 혈연관계도 친구관계도 아닌, 익명의 사람들이 만나는 사회체제다. 무자비한 사리사욕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체제라는 것이 홉스적인 사회생물학의 인식이다. 

왜 인간 본성이 이타적인가?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능과 심리적 구조가 형성되던 원시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진화심리학). 원시사회는 인간이 30~150명으로 그룹을 지어 추장이나 지도자의 명령과 지시를 쫓아서 수렵·채집으로 삶을 아주 힘들게 살아가던 제로섬 사회였다. 그런 척박한 상황에서 그룹이 생존할 수 있으려면 유대감을 갖고 그룹구성원들이 똘똘 뭉처야 했다. 

인류 역사를 24시간으로 본다면 그런 삶은 23시간 56분 동안 지속되었다. 나눔, 배려 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우리의 본능 속에 자리 잡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유전적으로 전수된 이유다. 

그런데 루소 전통의 사회생물학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본능적 유대감을 이웃에서부터 전체 사회에 이르기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입장이다. 홉스 전통의 사회생물학도 인간이 다윈적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비(非) 다윈적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 자격이 있다"(도킨스)고 한다. 양측 입장의 바탕에는 인간은 전체 사회에 관해서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 말하자면 인간이성에 대한 낙관주의가 깔려 있다. 

그러나 수십만 또는 수백만 명 아니 수천만 명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기껏해야 150명이 함께 살았던 원시사회와는 그 성격에서 전혀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을 마주하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익명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인간들 각자 추구하는 목표와 투입하는 지식은 이질적·다원적이다. 

어떤 행동이 그런 사회 전체를 위해서 바람직한 행동인가를 상세히 아는 게 개인은 물론 정부차원에서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개인들로부터 사회 전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을 기대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정부가 그런 희생을 법을 통해서 강요한들 성공할 수 없다. 

사회주의나 복지국가가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가 홉스처럼 인간본성이 사악하여 타인들을 배려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루소처럼 우리가 우리 삶의 바깥에 있는 ‘그들’을 배려하고 싶어도 배려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범위에 있는 사람들의 불행을 느끼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것은 알지만, 개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수천, 수백만의 불행을 뼈저리게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익명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지식과 관심의 불가피한 제한 때문에 타인들의 이타심 또는 유대감에 의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각자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는 최재천 교수를 비롯한 사회생물학자가 대답하기는 고사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제기다. 사회생물학은 인간행동의 원천을 본능과 이성으로만 구분하는 이분법적 틀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이게 사회생물학의 치명적 오류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본능적인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 이성에 의해서 계획해서 만든 것도 아닌 문화라고 부르는 제3의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는 소유·인격존중, 정직성, 약속이행, 법 앞의 평등과 같은 도덕적 기본원칙이다. 사회질서가 폐쇄된 원시사회에서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사회로 확장된 건 사람들이 그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지켰기 때문이다. 문화를 구성하는 그런 가치들은 본능의 소산도 아니요 이성의 산물도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본능을 억압하거나 또는 이성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흥미롭게도 문화는 언어와 똑같이 장구한 역사 속에서 후천적 학습을 통한 진화의 결과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설사 거대사회에서 인간들이 낯선 사람들에 향해서 이기적이라고 해도 이것이 홉스와 같이 반(反)사회적이 아니라 친 사회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후천적으로 배워 습득한 자유의 도덕을 자발적으로 지키기 때문이다. 이런 도덕을 지키기 때문에 자유시장은 혼란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질서가 형성된다. 자유의 질서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이래 스스로 유지되는 질서 또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고 부르는 이유다. 

사회생물학이 반(反) 시장정서 또는 반 자유주의정서를 조장하는 일을 멈추고 인류가 여타의 영장동물에서 보기 어려운 초 사회성(ultra sociality)을 가질 수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고 사회생물학이 사회주의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건 거대한 열린사회를 폐쇄된 소규모의 원시사회로 되돌리는 시도이며 이는 실패할 운명에 처한 치명적인 지적 자만이다. 

이타심과 유대감을 법으로 정하여 전체사회로 확대하는 건 이성의 극히 위험한 장난일 뿐이다. 본능적 도덕은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에 맡기는 게 합리적인 이유다. 사회주의 체제나 그 밖의 어떤 체제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런 본능의 도덕적 욕구가  토크빌 이래 “제3섹터”의 자발적 형성을 통해서 훨씬 더 잘 충족될 수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민경국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경제철학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이다.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과 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사)자유주의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하이에크, 자유의 길』, 『국가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국가철학』, 『자유주의의 도덕관과 법사상』,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 연구』, 『경제사상사 여행』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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