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과연 기초가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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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과연 기초가 중요할까?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1.03.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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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 에세이]
고흐가 테오와 고갱에 보낸 편지에 그려진 '아를의 침실' 스케치

그림을 그리다 보니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과연 그림 그리기에 ‘기초’라는 것이 중요할까 하는 점이다. 무슨 분야이든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상급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일까? 미술에도 분명히 그런 점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그림 그리기의 기초는 무엇일까? 선과 면 그리기, 구도 잡기, 색칠하기 등등일 것이다. 드로잉, 스케치, 물감 섞기, 빛깔 만들기, 붓질하기 등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기초를 튼튼히 잘 닦으면 그림을 잘 그리게 될까?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데에는 당연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초 쌓기가 처음부터 계단 밟듯이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그림을 그리면서 필요한 부분을 보충하고 배워나가도 된다. 물론 학교나 학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초 교육이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할 수도 있다. 대학 입시 미술을 보면 천편일률적인 붕어빵 그림들이다. 그림 ‘기술’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초’ 교육을 벗어난 튀는 그림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 대단히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나 대학교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도, 내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세련성을 갖추었으나 뭔가 갇힌 듯한 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 많다. 역시 예술은 제도권 교육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인가?

십 몇 년 전에 고흐 특별전이 있어서 보러 갔는데 고흐의 소묘 작품을 보고 놀랐다. 책상과 걸상 따위를 그린 것인데 비율도 맞지 않고 정말 못 그렸다고 느꼈다. 해설사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의 초창기 그림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천하의 고흐가, 한국 국민의 최고 사랑 화가, 세계에서도 일 이등에 꼽히는 인기 화가 고흐의 소묘 실력이 저 정도라니... 나중에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알게 되었다. 그 소묘 실력은 이른바 기초에 해당하는 것인데, 좋은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기초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고흐의 위대함은 소묘 실력이 아니라 뛰어난 색감과 독창적인 붓 터치, 그리고 정신세계의 표현 능력에 있다. 이런 능력은 학교 교육이 제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할 때가 많다. 

살바도르 달리의 사인이 든 스케치북

살바도르 달리는 10대 시절에 미술 학교 교수들에게 당신들은 나보다 못하다고 외쳤다가 바로 퇴학당하였다. 물론 그와 달리(달리?)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린 유명 화가들도 많기는 하겠지만, 역사상 위대한 화가나 작품들은 대부분 학교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술학교는 기본적으로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며 시대를 거스르는 정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학교의 미술 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인맥을 쌓기 위해서는 필요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분야가 문학이다. 세상의 위대한 문인들 중에 문예창작과 출신이 있던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모르겠다. 문예창작과에서는 문장 쓰기와 소설·시·수필 등의 작법을 가르치지 그 안에 들어갈 내용은 가르칠 수가 없다. 그 내용은 각자가 채워 넣을 수밖에 없다. 주식 교재를 달달 외어서 주식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연애하는 법을 책대로 실행하면 연애가 정말 잘 될까? 아니 그런 책을 봐야 할 사람이라면 이미 연애 잘 하기는 글렀다. 정치인 가운데 내 전공인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쓸모없는 학문이 아닌가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 “... 하는 법”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그냥 훑어본 적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문장 작법이라는 책도 본 적이 없지만 글은 제법 잘 쓴다. “그림 그리는 법” 책은 좀 보았다. 기초 드로잉 뭐 이런 거. 그것도 처음 그림 시작했을 때 좀 봐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보았을 뿐,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음악이나 운동은 좀 다르지 않나 싶다. 기악의 경우 악기 다루는 기술이 워낙 중요하여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운동의 경우도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림의 경우는 이와 달리 기술보다는 창의성이 두드러지게 더 중요하다. 악기 연주에서도 창의성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덜할 것이고, 운동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림 또는 미술은 이런 점에서 문학과 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채울 내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독창적인 표현 없이는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는 점에서 말이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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