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산수유 꽃천지 ‘띠띠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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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산수유 꽃천지 ‘띠띠미 마을’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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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경북 봉화 띠띠미 마을
400년 전 형성된 봉화의 띠띠미 마을. 두곡 홍우정이 산수유 묘목 몇 그루를 들고 이 골짜기로 들어왔다. 마을에는 고택이 4채 남아 있다. 

“띠띠미 갈라꼬? 조 앞에 삼거리서 우회전해가 쭉-- 올라가. 크다-란 나무가 나오면 쪼매-난 다리가 놓인 옆길이 있어. 글로 새면 안 돼. 그냥 계속 쭉-- 바로 가. 길 끝까지.” 두동 삼거리에서 길 끝을 향해 달린다. 커다란 나무와 샛길을 지나치고 도로의 한가운데를 막아선 작은 금강소나무 숲을 에돌고 거대한 느티나무도 지난다. 쭉- 시나브로 오르던 길이 굽이지며 상승하다 우뚝 마을에 닿는다. 여기가 길의 끝, 띠띠미 마을이다. 

마을 뒤에서 물이 흐른다고 ‘뒤뜨물’이라고도 불렀다. 

띠띠미 마을의 행정명은 봉성면 동양리 두동마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의 진산’이라 기록되어 있는 문수산 자락의 마지막 동네다. 마을은 가운데가 옴폭 패인 바구니 같은 땅에 좁은 들머리길만 열려있다. 꽉 막힌 산으로 둘러싸였다고 마을은 ‘막힐 두(杜)’다. 옛 민초들은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뒷듬’이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마을 뒤에서 물이 흐른다고  뒤뜨물(後谷)이라고도 불렀다.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뒷듬마, 뒷드물, 뒤뜨미, 디뜨미 등으로 변해 띠띠미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순정한 직관이지 않나. 둘러싼 봉우리들이 연꽃 모양이라고 누군가는 이 땅을 어여삐 설명하였다는데, 그렇다면 연두라고 멋을 부렸던들 누가 뭐라 했을까.

마을 고샅길에도 온통 노란 산수유 꽃이다.

봄꽃의 북상 속도는 하루 20km. 구례에서 의성으로, 서둘러 달음 치던 꽃의 걸음은 이 골짜기에 들면서 느려졌다. 깊고 높은 골까지, 꽃은 걸음마다 할 일이 많았다. 어룽어룽 햇살을 그러모으고, 고물고물 돋아나는 새싹의 기운도 얻고, 도란도란 시냇물과 나눌 얘기도 많았던 게다. 그래서 이제야 당도한 꽃은 더딘 걸음으로 모은 햇살과 물기와 흙의 기운을 단숨에 뿌려 놓았다. 연두보다 먼저 오는 산수유의 노란 꽃, 마을은 아예 노랑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일을 시작한다는 것. 나무아래 밭고랑이 곡진하다.

띠띠미 마을의 산수유는 전국에서 가장 늦게 꽃핀다. 경북의 북단인 데다 해발 고도가 높아서다. 마을의 산수유는 지금 만개다. 마을을 에워싼 연꽃 같은 문수산 자락도, 장독대 옆에도 개울가도 고샅길도 모두 노랑이다. 단아한 고택의 흙돌담도 노랗게 물들었고 한미한 폐가의 지붕도 노랗게 덮이었다. 노란 꽃 하늘 아래 손바닥만 한 땅을 갈아놓은 밭고랑이 곡진하다. 꽃이 핀다는 것은 일을 시작한다는 뜻이랬다. 거름 포대도 곳곳에 쌓여 있고 벌써 파릇하니 오른 부지런한 푸성귀도 눈에 띈다.  

꽃이 핀다는 것은 일을 시작한다는 것. 거름 포대도 곳곳에 쌓여있다.
산수유나무는 흙돌담 안팎을 넘나들며 꽃을 피웠다. 

띠띠미 마을은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400여 년 전 병자호란 때다. 개절공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은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던 삼전도의 치욕을 참지 못해 이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때 이곳은 온통 다래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한다. 두곡의 손에는 산수유 묘목 몇 그루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골짜기의 척박한 땅에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우리 자손은 벼슬하지 말고 이 열매만 따서 먹어라’ 했다 한다. 그 후 그의 자손이 대대로 뿌리를 내렸고, 지금도 두 집 가운데 한 집은 남양 홍씨다. 그가 처음 심은 산수유나무 두 그루가 지금도 마을 서쪽을 흐르는 개울 옆에 살아 있다고 한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가 젊은 소를 훈련시키던 장면이 이 마을에서 촬영되었었다. 

마을의 산수유나무는 5천 그루 이상, 대부분 100년이 넘었다. 의성의 산수유도 여기서 분양받아 나간 것이라고 한다. 산수유 세 그루면 자식 학비 걱정 없던 때가 있었다. 벼슬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봄꽃과 가을 열매가 함께 매달린 광경은 더는 기이한 일이 아니다. 중국산 산수유 열매는 고단하지만 값졌던 수확의 노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두곡 선생은 4백 년 훗날을 예측하지 못했다. 지금 띠띠미 마을은 20가구가 채 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가고 노인들만 남았다. 그러나 아직 산수유 농사를 짓는다. 수확하는 양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많지만, 품삯도 나오지 않지만, 정성으로 심고 키운다. 굳이 꽃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열매를 거두겠다는 뜻도 아니다. 그저 평생 산수유를 심고 길러온 이들에게 나무를 심는 일은 다만 삶이다. 이문이 남지 않는다고 농사를 쉬는 농사꾼이 있던가. 영화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가 젊은 소를 훈련시키던 장면이 이 마을에서 촬영되었었다. 

문수산 골짜기 소쿠리 같은 땅에 노란 산수유 꽃이 소복이 담기었다. 

조금 높은 산자락을 기어오른다. 마을이 제법 너르게 보이는 곳까지. 감미로운 피로감과 건전한 충격으로 무릎이 떨린다. 키 작은 봄꽃들도, 꽃그늘 속에 앉아있던 고양이도, 가지런한 밭고랑도, 단정한 마당들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몇 안 되는 지붕들만 꽃가지를 헤치고 손을 흔들 뿐, 온통 노랑이다. 누군가 이 골짜기에 두고 간 꽃바구니 같다. 봄이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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