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예술과 정신 – 문학, 미술, 조각,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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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예술과 정신 – 문학, 미술, 조각, 건축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3.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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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36강>_ 문광훈 충북대학교 교수의 「근대 예술과 정신 – 문학, 미술, 조각, 건축」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6. 서양 근대 문명과 그 세계적 영향’ 제 36강 문광훈 교수(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의 강연 중 결론부를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근대 예술과 정신 – 문학, 미술, 조각, 건축

문광훈 교수는 우선 “근대 혹은 근대성의 사상적 의미를 개념사적으로 조감하되, 이 근대성이 근대 예술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재구성을 시도한다. 그에 이어 “근대 예술을 이루는 여러 작품들” 가운데 문학에서는 무질(Robert Musil), 미술에서는 피카소와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 조각에서는 브랑쿠시(Constantin Brȃncuşi), 건축 분야에서는 문화포럼 베를린(Kulturforum Berlin)을 살펴보며 실제로 심미적 현대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감상하고 논평한다. 끝으로 “이를 통해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근대적인 것의 현재적 의미’를 되돌아보고, 좀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예술의 근현대성이 어디에 자리하는지, 그 역할과 기능 그리고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성찰에 나선다. 

지난 2월 6일, 문광훈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3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예술사의 의미는 그저 역사의 의미에 대립된다. 예술사는 그 개인적 특성으로 인해 인류사의 몰개성에 대한 인간의 복수다.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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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근대적인 것의 의미 - 남은 것

근대의 기획 이후 우리에게,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많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착잡하고 모순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를 포함하고, 그 실패의 내용은 근대의 고귀한 유산까지 무화시킬 만큼 참담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경험은 잔혹했지만, 그 각성은 부당하지 않다. 그러니 현대 예술이 가야 할 길은 이전보다 더 좁고 험난하며, 그 과제는 더 무거워져버렸다. 이 과제는 일단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이 글에서 언급한 예술가의 성취와 관련해서고, 둘째는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다.

첫째, 예술가의 성취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작자들은, 피카소이든 브랑쿠시든, 무질이건 샤로운이건, 뛰어난 예술가였다. 이들에게는 간단히 말하여 두 가지 열정이 있다. 하나는 그들 자신이 물려받은 지적 정신적 전통에 대한 깊은 존중이다. 다른 하나는 이 존중을 기계적으로 지닌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으로 소화하여 그가 사는 동시대의 현실적 요구에 맞게 적극적으로 변용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기 형식 속에서 시대를 넘어가는 보편적 형식을 새롭게 창출하였다.

둘째,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이와 관련하여 나는, 코르넬리아 클링어가 심미적 근대성의 세 요소로 “자율성(Autonomie)”과 “진정성(Authentizität)” 그리고 “이질성(Alterität)”을 거론한 데 대하여, 그와는 조금 다르게 ‘자율성’과 ‘자기 관련성’ 그리고 ‘자기 변형적 사건’을 언급하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합해져 ‘다른 현실과 다른 세계’를 지향한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은 모든 예술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작품들에 대한 심미적 경험에서, 적어도 이 작품이 제대로 된 것인 한, 수용자/독자/관객/청중이 추체험할 수 있는 가치들이다. 앞으로 우리가 재활성화시켜야 할 덕목은, 적어도 문학 예술이나 미학 혹은, 크게는 인문학 안에서 그것은 바로 이 자기 관련성에서 시작하는 예술 작품의 자율성과 이 자율성의 연마를 통한 자기 변형에의 부단한 시도일 것이다.

1. 이율배반과의 다층적 싸움

이와 관련하여 쓸 수 있는 내용이나 고려해야 할 사항도 여러 가지이지만, 나는 한 가지만 제안하고 싶다. 그 한 가지란 ‘이율배반과의 싸움’이다. 이율배반이나 모순은 삶에서 반드시 적대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삶의 불가피한 속성일 때도 있고, 놀랍게도 일상적 기쁨의 원천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속성을 직시해야 하고, 이렇게 직시하면서 수용해야 하며, 나아가 그와 대결해야 한다. 근대 이후의 복잡다기한 삶은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율배반과의 싸움은 네 가치 차원에서 상술할 수 있다.

1. 1. 지식과 회의 사이 - 학문적 차원

어느 진화학자는 진화론을 강의할 때 생겨나는 ‘세 개의 지뢰밭’으로 첫째, ‘진화냐 창조냐’, 둘째, ‘본성이나 양육이냐’, 셋째, ‘집단이냐 개체냐’의 문제가 있다고 토로하였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항 대립항은 진화론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세 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치학에서 ‘제도냐 인간이냐’의 문제나, 미학이나 철학에서 ‘감성이냐 이성이냐’, ‘육체냐 정신이냐’의 대립 구도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실용성과 비실용성, 기능과 무기능의 문제도 있고, 사회철학이나 정치철학에서의 자유와 책임의 문제도 있다. 나아가 과학과 신비, 지식과 회의의 대립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영역과 수준을 다르게 한 채, 크고 작은 이율배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학문의 탐구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여, ‘보다 높은 객관성’을 얻기 위한 싸움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첫째, 이 수많은 이항 대립의 이율배반적 축을 어떻게 서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결합’하는가. 이러한 구분에서 인식의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더 예리해진다면, 결합을 통해 인식의 내용은 더 넓은 전망을 갖는다. 둘째, 구분과 결합을 오가는 가운데 우리는 학문적으로 어떤 종합적 입지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마련된 입지점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다. 셋째, 이 입지점을 바탕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삶을 꾸려간다.

1. 2. 감각과 사고와 언어의 운동

이렇게 하기 위해 무엇보다 주체의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움직이는’ 것이어야 한다. 즉 매 순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정해진 명제나 원칙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여하한의 이율배반을 넘어 더 나은 상태, 좀 더 높은 타당성의 영역으로 옮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만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해하기를 그만두는 것은 나태다. 즉 비학문적/비과학적(nicht-wissenschaftlich)이다.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에는 멈춤도 필요하다. 어떠한 법칙은 탐구의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지의 포기를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해와 해석은 필요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 ‘인간의 것’에 불과함도 때로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더 중요한데, 전적으로 쓸모없음의 세계—무섭고 영원하며 아득하고 알 수 없는 세계로 열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감각과 사고와 언어의 방식으로 체화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말의 깊은 의미에서 좀 더 겸허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마침내 참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객관성과 보편성이야말로 깊은 의미에서 삶에 충실한 과학적 엄정성이 아닐까?

1. 3. 받아들임과 버림 – 일상적 차원

나날의 삶은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자고 다시 일하는 데서 시작하고 끝난다. 만인의 의식주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일이야말로 모든 정치경제학의 근본 목표다. 대부분의 인간사는 대개 이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주어진 생명의 온전하고 지속적인 영위 이외에 삶의 어떤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의식주의 충족이 인간적인 것의 모든 가능성이 아닌 것도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요구 수준을 이 ‘인간적인 것의 보다 높은 가능성’에 둔다면, 사태는 더 복잡해진다. 정치사회적 갈등이나 폭력의 문제가 이 지점에서 증폭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질적 생계적 차원의 충족 너머로, 그래서 무경계의 초월적 지평으로 우리의 관점을 열어둘 필요도 있다. 이 넓고 깊은 관점을 통해서만 의식주 자체의 문제도 좀 더 온전하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키려는 모든 가치가 주는 기쁨은, 단순히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릴 때, 아니 내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체험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사랑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거나 연인들 사이의 사랑만이 아니라,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고, 이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랑을 넘어 그 근원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쓰면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 자리하는 모든 가치들에, 그것이 사랑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아니면 선악이든, 내재한 어떤 배리(背理)이자 부정합(不整合)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이율배반과도 통한다. 삶에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이 없는 것이라면, 순수하고 완전한 슬픔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행도 반드시 불행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듯이, 그래서 시련으로 여겨졌던 시간이 의미 있는 도전의 계기로 드러나기도 한다. 불행이 행복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은 그 대목에서다. 마찬가지로 어떤 선은 시간이 지나면서 악으로 밝혀지기도 하고, 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나중에 선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하나의 선에 대해서도 사람들 사이의 견해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선의가 허울 좋은 자기만족에 그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 삶의 전부라거나, 우리가 아는 것만이 알 수 있는 것의 모두라고 여기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들의 목적이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개성과 세계를 지닌 채 그저 거기에 있고, 그렇게 거기 있는 채로 살아가는 것인가? 수많은 세상살이와 수백 수천 수만의 기쁨과 슬픔이 자리한다.

나는 만인의 독자성을 말하고, 사랑의 동력학과 그 변증법을 떠올린다. 오래갈 사랑은 이해와 관점의 인간주의적 제약까지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지금 여기의 구체적 사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나날의 경험 내용도 우리는 이율배반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1. 4. 심미적 차원

예술에서 형식이나 형상, 색채나 구성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중요한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어떤 ‘상징’과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이 상징과 성격으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하여, 삶과 생명, 인간성 그리고 의미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예술의 형태나 형식, 색채나 형상, 혹은 리듬과 선율 속에 내재한다. 자연스러움이나 친절, 선의나 고요함 혹은 사랑과 평화는 그렇게 내재된 가치들의 몇 가지 예다. 예술은 인간과 세상, 사물과 자연을 그리고 묘사하고 짓고 노래하는 가운데 이런 가치들을 암시한다.

감각과 사고와 언어를 유동적으로 작동시키려면, 그래서 사람과의 일상적 관계에서 유연하게 행동하려면, 어떤 원칙이나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원칙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 그러니까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가 ‘예술의 자율성’을 떠올리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예술의 자율성이 중요한 것은, 예술이 자신의 자율적 작품을 통해 그 작품을 읽고 이해하고 경험하는 수용자 자신의 자율성을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수용자는 자율적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음미하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연마하고, 이 심미적 경험을 통해 ‘자율적 주체’로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이런 자율적 성장의 과정은 그 자체로 인문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기 정체성의 형성뿐만 아니라, 그 해체와 균열까지 포함한다. 납득할 만한 자기 동일성은 해체와 이 해체를 통한 검토를 통해 비로소 잠시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른 자율성은 오직 타율성에 대한 응전의 방식과 그 수준에서 결정된다. 예술과 철학, 문학과 미학과 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도 이 모든 분과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활동이, 그것이 읽기든 보기든, 듣기든 쓰기든, 바로 주체의 자율적 자기 형성에 기여하는 데 있다. 이 형성 과정을, 다시 더 간단히, 단계적으로 정리해보자.

첫째, 어제나 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저기 저곳이나 저 멀리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이 때문에 현존적 순간은 예술의 경험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둘째,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시작하고, 이 ‘우리’를 끌어들이기 이전에 ‘나’부터 걸음을 내딛는 일, 그래서 ‘집단’이 아니라 이 집단을 구성하는 ‘개개인’이 주체가 되는 것(바로 이 ‘나’로서의 개인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의 질적 변별성이 있다!),

셋째, 주어진 본성 속에서, 그러나 이 본성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본성을 ‘갈고 닦으면서’(이런 점에서 예술론은 모든 본성론/본질주의적 실체론과 구분된다), 그래서 ‘자연’이 아니라 부단한 ‘양육’과 ‘연마’를 통해 조금씩 변화해가는 것(이것이 심미적 교양/교육론이다),

넷째, 나아가 이렇게 내가 변화하는 가운데 나의 이 변화가 내 옆의 너와 그들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어지고, 그래서 자기 변화가 결국 타자 변화로 확대되듯이, 자기 동일성이 점차 타자성과 결합하며(이것이 심미적인 것의 사회정치적 차원이다),

다섯째, 이 모든 변화가 외재적 요인이나 힘 혹은 규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래서 주체 ‘스스로 동의한 내면의 절실한 마음으로부터’, 이 마음의 심급으로서의 양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래서 이 내면적 실존의 자발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형이 사회정치적 공동체적 변화로 이어지는 길(이 점에서 심미적 교양론은 여타의 도덕론이나 윤리학과 구분된다), 그런 길과 방법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심미적인 것의 성찰적 잠재력이다. 물론 이 양심이라는 심급도, 여느 다른 정체성의 가치처럼,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 아니라, 부단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약속의 땅’이라는 관념 없이 실행해가는, 그러나 이 실행의 내용이 성찰이 되고, 이 성찰 속에서 표현이 되며, 표현 속에서 실천을 준비하는 일… 이 모든 성찰-표현-실천이 하나의 자기 형성적 과정이 되도록 할 일이다. 이를테면 예술의 자율성 개념을 견지하되 상품/자본의 현실과 싸워야 하고, 이렇게 상품 사회적 노동 조건과 싸우는 가운데서도 삶의 물질적 근본 토대를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능성의 감각을 탐색하되 이런 탐색이 새로운 실용성과 경제성을 간과해선 곤란하다. 모사 원칙에 반기를 들고, 사물의 본질을 향한 추상화 경향도 존중하지만, 그러나 그 바탕은 여전히 현실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현존적 가치에 골몰하되 대상의 숨은 진실도 늘 상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선미의 현실적 실현가능성을 회의한다고 해서 진선미 자체를 부인하는 데로 이어져서도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근대적 정신문화의 유산으로 간주되는 여러 가치들—자유와 자율성, 그리고 칸트적 의미의 ‘전달 가능성’이나 ‘비판 가능성’ 그리고 책임 개념을 여전히,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면서 견지할 필요가 있다. 파멸시키려는 사람에게서 신은 이성을 가장 먼저 빼앗는다고 했던가? 이성을 포기할 순 없다. 그것은 근대의 여느 다른 가치들처럼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한다. 새로운 예술 언어가 필요하고, 새로운 심미적 감수성, 새로운 심미적 사유가 요청된다.

2.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

이런 고민을 통해 우리가 다다르는 지점은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이다. 결국 예술의 모든 탐구는, 다른 분야에서의 여러 다른 활동이 그러하듯이, ‘현재적 삶의 보다 높은 인간화’에 기여하는 데로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도, 예술에 대한 탐구도 지금 여기 삶의 더 높은 실현을 위한 게 아니라면, 어디다 쓸 것인가?

오늘의 현실을 구성하는 경험의 우발성과 파편성에도 불구하고, 또 모든 좌절과 회의와 거듭되는 이론적 피로에도 불구하고 다른 현실을 향한 예술적 탐구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 탐구는 새롭게 보고, 다르게 느끼며, 더 정확하게 사유하는 데 있다. 이렇게 도달한 다른 시각과 감정과 사유는 어디로 이어지는가? 그것은 마땅히 삶의 다른 조형으로, 삶의 다른 형식 내용적 변형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넘어 예술을 통한 다른 현실의 가능성, 다른 시간의 도래는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삶의 인간적 지평을 예술 속에서, 심미적인 것의 표현적 가능성 속에서, 이 표현적 가능성의 앞과 뒤 그리고 그 너머를 통해 새롭게 열 수 있는가? 자율의 정신은 타율성과 싸워야 하고, 사유는 현실의 환멸과 이론의 피로를 견뎌내야 하며, 비판은 비판 속에서 비판을 넘어가야 한다. 이런 거듭된 물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이 글의 처음—근대 예술과 그 정신이 남긴 의미를 묻는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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