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과 학문의 경계를 횡단하며 중국 이해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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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학문의 경계를 횡단하며 중국 이해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1.03.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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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정치사상사 |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920쪽

이 책은 한국인에 의해 쓰인 첫 중국정치사상사로서 저자가 2017년 집필한 영어판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 

그간 중국정치사상에 관한 국제적인 논의는 샤오궁취안의 『중국정치사상사』, 거자오광(葛兆光)의 『중국사상사』, 류쩌화(劉澤華)와 그의 동료들이 집필한 『중국정치사상사』 등, 이미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는 중국학자들의 저술에 기대어 이루어져왔다. 이 저서들은 대개 중국정치사상이 전제국가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시각에 기초하고 있는데, 저자는 기존의 이러한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그간 중국과 중국정치사상에 대한 관습적 해석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처럼 분명한 문제의식을 지닌 이 책은, 일련의 테마들을 통해 중국정치사상에 대한 비민족적이고 비본질주의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중국정치사상의 역사를 단순화하거나 유교라는 본질주의적 언명에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미시적인 분석과 거시적인 서사를 유려하게 결합함으로써 중국정치사상의 긴 흐름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는 이 책은 중국의 지적 전통에 대한 우리의 앎을 혁신적으로 확장해온 새로운 학문적 업적들을 반영하면서 중국 사상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훌륭히 복원해냈다. 특히 ‘중국’을 원래부터 존재해온 단일한 덩어리로 보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행위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명되고 재발명되면서 꾸준히 움직이는 표적이자 일종의 구성물로 간주함으로써, 기존의 역사서술 방법과 결별을 시도한다.

기존의 중국정치사상사 책은 일반적으로 시대와 학자 또는 그의 주요 사상을 중심으로 단순히 나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와 달리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시기별로 출현한 정치질서의 비전, 즉 ‘계몽된 관습 공동체, 국가, 형이상학 공화국, 독재, 정체政體, 시민사회, 제국’ 등에 주목하면서 이들 테마를 중심으로 새로운 목차 구성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중국정치사상 연구에서는 없던 혁신적인 시도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적 질서와 각 시기를 관통하는 사상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 그 정치적 사유의 진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나감으로써 중국정치사상사에 일관된 서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은 목적론적 서사를 거부하며 표면 뒤의 변화를 읽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특히 정치사상을 ‘전승된 지적 자원에 대한 창조적인 반응’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와 이에 상응하는 ‘독창적인 질문’을 기반으로, 외적 환경의 변화가 어떤 창의적인 지적 변화로 이어지는지 고찰한 부분은 압권이다.

『논어』의 “우물에 빠지는 일”에 관한 구절이 후대에 이르러 『맹자』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장으로 이어지면서 각각의 시대마다 사상가들에 의해 어떻게 반복적으로 재해석되는지를 추적하거나, 이(理)와 기(氣)의 범주와 개념을 탐색하는 데 집중하면서 이들 맥락에 담긴 보다 큰 이슈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저자의 집요한 질문과 해석은 3천 년 중국정치사상사의 역사를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요 관전 포인트는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학문 분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개념을 융통성 있게 활용하거나 광범한 문학 및 예술 자료를 정치사상의 텍스트로 읽어낸 점이다.

저자는 중국의 원사료뿐 아니라 한국, 일본, 서양 학계의 다양한 문헌까지 능숙하게 활용함으로써 역사적이면서 철학적인 내러티브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공자가 구상한 계몽된 관습 공동체를 공동체 내 개개인의 미시적 행위 양태를 매개로 해석할 때 미셸 푸코를 비롯한 서양 학자의 미시성에 대한 개념을 차용하거나, 장자의 호접몽을 ‘익스트림 롱 숏’이라는 예술 언어로 해석하고, 19세기 근대 동아시아의 중화주의를 ‘픽션’이란 개념으로 해석하는 등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에 구애되거나 주저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다양한 개념을 융통성 있게 활용한다.

이 책은 공문서 이외의 자료를 통해서도 중국의 정치사상을 발굴해내고 있다. 당나라 때 원진이 쓴 『앵앵전』, 송대 인생의 유한함을 논한 문학작품으로 여겨져온 소식의 「적벽부」, 원나라 때 마치원이 쓴 『한궁추』뿐 아니라 조창운의 그림 〈유신완조입천태산도〉, 조맹부의 〈이양도〉, 청나라 옹정제의 13점에 달하는 비공식 초상화와 건륭제의 비공식 초상화인 〈시일시의도〉, 그리고 〈평안춘신도〉 등의 문학과 예술 자료는 사료의 다층적 의미를 추적해나가는 저자에 의해 적재적소에 활용됨으로써 중국정치사상을 읽는 정치 텍스트로 재탄생한다. 특히 당나라, 남송과 금, 몽골제국, 청나라 등 중국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 느껴지는 시기에 나온 이 자료들은 평면적인 문헌 자료의 한계를 넘어 해당 시기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정치 텍스트로 탈바꿈한다.

융통성 있는 개념의 활용과 독특한 사료 선택, 여기에 더해 사료의 다층적 의미를 추적하며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의 전범을 보여주는 저자의 집요한 탐구 방법은 중국에 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국내 지식인들에게 사상사 연구 방법론의 새로운 진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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