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소위 '친일'로 나아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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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소위 '친일'로 나아갔는가?
  • 장 신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근대사
  • 승인 2021.03.21 1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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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조선·동아일보의 탄생: 언론에서 기업으로』 (장신 지음, 역사비평사, 320쪽, 2021.01)

2020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주년이었다. 성대한 기념식과 함께 100년의 의미를 되새길 학술행사도 열려야 했지만 세계를 흔든 팬데믹 상황은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100년은 질곡의 근현대를 정면에서 부딪치면서 살아온 생존의 역사였다. 학교나 교회도 아닌 회사, 그것도 신문사의 100년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현실에서는 조선일보가 백년사를 간행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이전과 비교할 때 새로움이 없었다.

이 책은 두 신문의 전체 백 년 중 1920년 창간부터 1940년 폐간까지를 다루었다. 약 15년간에 걸친 필자의 언론 연구의 중간 결산이다. 새로운 논문을 추가했지만 이미 발표된 글을 조금 손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굳이 책을 낸 까닭은 글을 쓸 때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며 한국의 언론 현실과 언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에 한 마디 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민족지’와 ‘친일지’라는 이분법의 시각을 배제했다. 사람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신문사도 시대 또는 구성원에 따라서 그 성격이 얼마든지 달라지는 까닭이다. 어느 특정 시기의 단면으로 평가하지 않고 매 시기마다 신문사가 당면했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위기 국면에서 최소한 둘 이상의 선택지가 있을 때 역사에서 보는 그 길로 가는 결정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결과를 책에 담았다.

그렇다면 일제에 저항하던 두 신문은, 왜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처럼 되었는가. 필자는 언론의 상업화 또는 기업화에서 해답을 찾았다. 조선의 신문들은 만성적으로 경영난에 시달렸다. 적자의 원인은 자본금과 경영능력 부족 외에도 신문사를 당대의 ‘민족운동기관’으로 여기는 언론관도 한몫을 했다. 이것이 급격히 바뀌게 된 계기는 1933년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와 장악이었다. 일제에 저항하면서 영업 수익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검열의 주체인 일제와 그를 비판하기를 원하는 독자의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가 필요했다. 그 줄타기마저 1936년 8월의 일장기 말소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사라졌다. 신문사가 언론이기보다 기업임을 내외에 공포하는 순간이었다. 부제인 「언론에서 기업으로」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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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신문통제에관한건(1940)

창간 이후 오랫동안 두 신문사는 기자, 나아가 편집국의 권한이 강했다. 경영자와 편집자의 생각이 같을 때도 있었고, 설사 다를 때도 경영자들은 편집권을 존중하였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1925년 이후부터 편집권을 경영진의 구상대로 재편했고, 1933년 이후 조선일보가 그 뒤를 따르면서 월급쟁이 기자는 현실로 되었다. 이처럼 언론의 상업화는 편집권의 독립을 부정하였다. 편집권의 독립이 사라졌을 때 지면은 어떻게 변했는가를 통해 편집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였다.

그동안 역사학은 신문 지면을 주로 분석했는데 이 책은 신문 제작을 둘러싼 정치행위에 주목했다. 곧 신문을 만드는 주체로서 기자와 데스크, 경영진, 그리고 대주주에 관심을 두었다.  종래 1920년대의 동아일보를 ‘민족주의 우파’, 조선일보를 ‘민족주의 좌파’의 대변지로 여기고 사설이나 기사를 분석하였다. 그러한 분석이 전혀 근거 없지 않지만, 필자는 어느 시점부터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지, 또 그 이전의 지면을 어떻게 규정할지를 고민했다. 달리 말해 역사학의 기본인 사료비판을 함으로써 매체를 이용한 연구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의 언론정책을 고정된 틀로서 보지 않았다.  총독부는 문화정치의 대표적 성과로서 한글신문의 발간을 내세웠기에 1920년 민간신문의 창간 허용 때부터 조선의 여론을 의식하였다. 검열에 따른 잦은 압수는 기사의 허용치를 둘러싼 총독부와 신문사의 ‘밀당’이었다. 물론 총독에 따라 언론정책과 방법도 달라졌다. 1920년대의 사이토 총독은 은밀한 뒷공작을 즐겨했고 1930년대 전반의 우가키 총독은 그러지 않았다. 1936년에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는 여론뿐 아니라 총독부의 기존 관행도 따르지 않았다. 1940년의 ‘강제폐간’은 시대 상황 외에 총독의 개성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부록의 자료는 연구 과정에서 얻었는데, 학계와 공유함으로써 연구가 풍부해지기를 기대하면서 수록하였다. 

 

장 신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근대사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정책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에서 한국근대사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사상통제정책과 인사정책, 식민주의사학을 중심으로 한 역사학의 생산과 유통, 동아일보·조선일보의 경영과 편집권의 관계 등을 연구했다. 진행 중이거나 계획하는 연구는 ‘감시와 미행-한국근현대 요시찰제도의 역사’, ‘명문과 학벌의 탄생’, ‘방응모 평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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