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고문에 쓰러진 천재 박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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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문에 쓰러진 천재 박태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1.03.2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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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⑯_ 모진 고문에 쓰러진 천재 박태보

박태보, 그는 누구인가?

인현왕후와 장희빈!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왕비와 후궁인 이 두 여인의 갈등에 대해서는 텔레비전 사극의 단골 소재가 아닌가 싶다. 장희빈의 원자(元子) 출산에 이은 인현왕후의 폐비(廢妃), 이후 인현왕후의 복귀와 장희빈의 사사(賜死)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조선 정치사에서 격동의 시대로 명명할 만하다. 라이벌인 이 두 여인의 부침에 따라 당시 정국은 세 차례에 걸쳐 소위 환국(換局)이라는 정치 주도 세력의 교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 관리들이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희생된 학자들 중에 박태보(朴泰輔)가 있었다. 국왕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자식을 원자로 삼고 투기를 한다는 이유로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려 하자, 그는 직언을 하며 온몸으로 고문을 감당하여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그럼 박태보는 어떤 인물이었나?

박세당 초상화. 박세당의 둘째 아들인 박태보 초상화는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장서각 소장.<br>
박세당 초상화. 박세당의 둘째 아들인 박태보 초상화는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장서각 소장.

박태보는 1654년(효종 5)에 태어났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해가 1689년(숙종 15)이었으니 불과 3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 된다. 그의 아버지는 서인(西人)의 한 갈래인 소론(少論)의 지도자 박세당(朴世堂)이었고,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南九萬)이 그에게 외삼촌이 된다. 소론계로 분류되는 그의 집안 또한 대대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세족이었다.

아버지 박세당이 장원 급제한 것처럼 박태보 또한 숙종 3년인 1677년에 24살의 젊은 나이에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이후 그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의 내직은 물론 이천 현감, 파주 목사 등의 지방관을 거치는 등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태보의 잘생긴 얼굴에 반한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결국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 평생 수절하다 죽었다는 야사(野史)가 전해질 정도로 박태보의 외모 또한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뼈대 있는 집안, 뛰어난 학문적 재능, 준수한 용모 등 뭐 하나 뒤질 것 없이 모든 것을 갖춘 박태보. 그에게 닥친 모진 불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등 연대기 기록에도 잘 나오지만, 특히 연려실기술, 박태보전을 읽어보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사건과 궁중에서의 가혹한 고문의 실상을 자세히 목도할 수 있다.

숙종의 폐비 시도에 맞서 반대 상소를 주도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박태보의 비극적 죽음을 가져온 사건의 발단은 숙종의 인현왕후에 대한 폐출 시도였다. 1688년 10월에 아이를 갖지 못한 인현왕후와 달리 후궁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어 이듬해인 1689년 1월에 숙종은 곧바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원자(元子)로 봉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는 일을 강행하였다. 이어 숙종은 인현왕후의 투기를 비난하는 비망기(備忘記)를 조정에 내림으로서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오두인, 박태보 등 약 80여 명이 모여 상소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당초 상소를 위해 모여든 선비 중에는 상소문 초본을 넣고 온 이들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전 응교 박태보가 여러 글을 가져다가 손수 첨삭하여 글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해서 전 판서 오두인을 상소 대표인 소두(疏頭)로 하여 승정원에 상소를 바쳤는데, 이때가 기사년(1689년) 4월 25일 오후 4시경이었다.

황혼 녘에 승지를 불러들여 상소문을 읽자마자 숙종은 상소를 올린 이들을 즉시 잡아다 친국(親鞫)할 것을 명령한다. 상소문에는 옛 성왕들은 배필인 왕비를 중히 여겼음을 지적하고, 설령 왕비에게 과실이 있더라도 망극한 죄명을 씌워서 무서운 위엄을 떨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런 상소문의 내용이 숙종의 화를 돋운 것이다.

숙종이 박태보를 국문한 장소인 창덕궁 인정문. 당시 인정전 앞의 인정문, 숙장문 일대는 국문장으로 자주 쓰였다.

원래 한밤중에는 대역죄인이라도 국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이날 밤 10시경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 나와서 급히 의금부 당상과 대신, 삼사 관리들을 부르고, 친국할 형틀을 준비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런 급박한 명령에 뜰에 쓸 횃불을 준비하지 못한 신하들은 심지어 궐문 가까이 있는 시전 가게를 헐어서 땔감으로 준비해야 했다.

상소에 참여한 여러 선비들 중 일부는 저물도록 답이 안 내려와 집으로 돌아간 자들도 있었고, 오직 박태보가 오두인, 이세화, 심수량, 김몽신, 이인엽, 조대수, 김덕기 등과 함께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숙종의 추상같은 체포 명령에 따라 금오랑(金吾郞)이 나장을 거느리고 와서 먼저 오두인을 데려갔고, 이어 이세화, 유헌이 잡혀 들어가서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상소문 작성자로 지목된 박태보가 그 뒤를 이었다.

매질과 함께 혹독한 압슬, 낙형을 당하다

국문장에서 숙종이 상소를 작성한 배경을 추궁하자 박태보는 당당하게 말했다.

“군신, 부자는 일체이옵니다. 이제 어느 사람이 제 아비가 만일 지나친 노염을 내어 죄 없는 제 어미를 내쫓고자 하면 그 자식된 자가 어찌 울면서 제 아비에게 간하지 않으오리까? 신들이 만 번 죽을 마음으로 한 장 상소를 올렸을 뿐이지 어찌 전하를 배반할 뜻이 있겠습니까?”
 
박태보가 계속해서 말대답을 하자 크게 노한 숙종은 매를 몹시 때리라고 엄하게 분부하였다. 임금의 분노가 계속되고 호령이 더욱 엄하여 장치는 소리가 궁궐 너머 향교동에까지 들렸다. 이를 박태보전에는 골육이 다 깨져 유혈이 낭자한데도 박태보는 조금도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자, 숙종이 부채로 안석(案席)을 치며, “이렇게 형장을 가했는데도 아프다는 소리가 없으니 이런 독한 물건이 무슨 일을 못하리오. 엄히 치라!” 했다고 전한다.

박태보가 두 차례의 엄한 매질을 동반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승복을 하지 않자 이때부터 오두인, 이세화는 내버려 두고 화살이 박태보에게 집중되었다. 숙종은 반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하며 박태보에게 압슬형을 시행하라고 명령한다. 압슬형은 자갈이나 사금파리 같은 것을 바닥에 깔고 죄인을 무릎 꿇게 한 후 그 위에 널판을 올려 넣고 여러 사람이 널판에 올라가서 밟는 고문이었다. 당시 좌우에 각각 세 명의 건장한 나졸들이 널에 올라가 소리 맞춰 뛰자, 널판 속에서 박태보의 무릎뼈와 사금파리가 깨지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압슬형이 이어지자 이를 집행하던 나졸은 그 참혹함에 울면서 뛰었으며, 좌우에서 보는 신하들도 얼굴빛을 잃고 물러났다. 그렇지만 박태보의 안색은 변함없고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죄인 널뛰는 형벌.’ 박태보에게 가해진 압슬형의 경우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게 하여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밟았으므로 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김준근 그림.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발가락 사이에 불 놓는 형벌.’ 화승(火繩)을 발가락 사이에 끼우고 불을 붙여 발에 화상을 입히는 고문. 박태보가 당한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낙형과는 다르다. 김준근 그림.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숙종이 더욱 노하여 압슬 형구는 없애고 화형 도구를 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니, 박태보에게 몸을 지지는 고문인 낙형(烙刑)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장들이 숯 두 섬을 피워 화염이 치솟자, 박태보를 큰 기둥에 거꾸로 매달아 놓은 채 두 손 넓이의 넓적한 쇠 두 개를 불에 넣어 달구고 식으면 서로 바꾸어 달구어 지지게 했다. 박태보가 “신이 듣사오니 무릎을 누르는 고문이나 화형은 모두 역적을 다스리는 극형이라 하옵는데, 신이 무슨 죄가 있사옵기에 역적과 같이 치죄하십니까?”하니, 숙종은 “네 죄는 역적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원래 낙형은 발바닥만 지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박태보에게는 옷을 벗기고 온몸을 지지기를 두 차례나 거듭하였다.

“빨리 사형을 내리소서. 신의 머리는 베실 수 있지만, 자백은 받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는 신장, 압슬, 낙형으로 죽은 나무로 변해가던 박태보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숙종에게 남긴 말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조용히 돌아가라.”

“박태보가 전부터 독한 것은 알았지만 과연 그러하다. 참혹한 형벌을 거듭하여도 아프다는 소리도 끝내 없으니 그 독한 것이 효종 임금 때 친국을 받다 죽은 김홍욱(金弘郁)보다 더 심하다. 병조에 분부하여 국문장을 설치하고, 다시 엄하게 형벌하여 물으라. 이후 또 상소가 있으면 마땅히 역적을 다스리는 법률로 할 것이니 이것을 전국에 알리라.”

다음날인 26일 오전 8시경에 숙종이 국문장을 떠나며 한 말이다. 이렇게 해서 박태보는 밤샘 고문에 이어 내병조(內兵曹)에서 다시 한번 목내선(睦來善)에게 심문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형장에 무릎뼈가 깨져서 실낱같은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었다.

숙종은 그 이튿날 재차 추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박태보의 몸이 더 이상의 국문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대신들의 만류로 숙종은 박태보에게 사형을 감하여 진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미 모진 고문으로 인해 박태보의 회생은 불가능했다. 유배지로 향한 박태보는 겨우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른 5월 1일에 병세가 최고에 달하여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박태보를 보러온 아버지 박세당은 결국 가망이 없음을 알아챘다.

“네 이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어찌하겠느냐. 다만 조용히 죽어서 마지막을 빛나게 하라.”

“조용히 가겠습니다.”

아들과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눈 박세당은 문을 닫고 나와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고 한다. 박태보가 죽은 5월 5일은 모진 고문이 있고 열흘이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박태보 묘소. 의정부시 장암동 소재.
박태보를 추모하기 위해 1695년 건립한 노강서원(鷺江書院). 당초 노량진에 세워졌으나 6·25 때 소실되어 의정부시 장암동 반남박씨 서계종택 근처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상 박태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불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조선왕조 국문장에서 자행된 여러 고문의 참상도 말해주고 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박태보가 당한 가혹한 압슬형과 낙형 고문은 숙종의 아들 영조에 의해 비로소 전면 금지되기에 이른 사실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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